외전 7화. 서운하네요
요원이 방문을 열고 나오자 눈앞엔 정말로 목소리의 주인공이 있었다.
대청마루 위에 다리를 넓게 쩍, 벌리고 앉아 고개는 한껏 뒤로 젖힌 채 멘톨 캔디를 와드득 씹고 있는 남자가.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가려다가 자신들이 맞닥트린 상황을 자각하고선 애써 표정 관리를 한 채로 그와 멀찌감치 섰다.
조금 전까진 사과해야지, 했던 마음은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의미 없는 자존심 싸움이다.
“이 시간에 여긴 또 어떻게 오셨어요?”
“차 타고 왔는데요.”
“그러니까 무슨 차요.”
“너는 지금 그게…….”
존나 중요하냐고! 언성이 높아지려는 것을 겨우 자제하면서 무경은 자세를 고쳐 앉으려 했다.
“무슨 차냐면…….”
무경이 백야까지 어떻게 왔냐면 주연의 차를 타고 왔다.
무경을 백야마을 입구 인조바위 쪽에 내려준 주연은 아자 아자, 를 외치며 다시 서울로 돌아갔고 무경은 언젠가 주연에게 이 은혜를 꼭 갚아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비틀비틀, 요원의 집으로 향했다. 눈물 나는 우정이 아닐 수 없다.
“됐고…….”
후, 술에 젖은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바로잡는 도중에 아래로 고개를 푹 떨어트린 무경이 평소보다 가라앉은 음성을 뽐냈다.
“자기야.”
호칭과는 달리 상대에 대한 원망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하나만 물어보자.”
머리를 쓸어올리던 무경이 앉은 채로 비틀거려 요원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무경은 괜찮다고 말하듯 손을 들어 올렸는데, 손에 힘이 빠졌는지 쥐고 있던 틴 케이스마저 발아래로 챙, 소리와 함께 떨구었다.
이 장거리를 내려오면서 술이 깰 법도 하였으나 무경이 더 취한 이유는 하나였다.
주연이 차 안에서 건넨 술 때문이었다.
여자는 자고로 술에 취한 남자 앞에서 마음이 약해진다는, 말도 안 되는 설득에 당해버렸고 또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싶은 사람처럼 믿어버렸다.
단 하나의 호구 새끼처럼.
“너…….”
마음이 괴로울 때 마시는 술은 독이라고 하던데, 술을 평소에 그다지 즐기지도 않았는데, 오늘따라 주연이 내민 술은 혀에 쫙쫙 감겨들었다.
“……이제 내가 싫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무경이 요원과 불안정하게 눈을 맞추며 재차 물었다.
“내가 싫어졌어? 나보다 다른 새끼가 더 좋아졌어? 그래서 그래? 그 새낀 어떤 새끼야. 그 새낀 뭐 하는 새낀데.”
요원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무경은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또 입을 열었다. 마음이 급한 만큼 아무런 말이 흘렀다.
“채 순경은 여전히 도의가 없지. 사람을 이렇게 찐따 새끼로 만들어놨으면 적어도 책임이란 걸 져야 할 거 아니야.”
그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찐따라는 묘사에 설핏 잇새로 웃음이 새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꾹 참으면서 요원은 물었다.
“이 시간에 만취해서 온 사람은 도의가 있는 거고요?”
“말 돌리지 말고 대답이나 해. 너 내가 싫어?”
“저는요.”
“그런 거면 미안해.”
요원에게 대답할 새도 주지 않고 무경은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그녀에게서 정말로 싫어졌단 말이 나올까 근심스러웠으므로.
“내가 미안하다.”
그가 여전히 머리를 숙인 채로 술에 취한 음성을 중얼거렸다.
“네 입장 몰라줘서 미안해. 자격지심 운운하며 상처 줘서 미안해. 뻔하다고 했던 말도 미안하고. 나 가지고 노냐고 물었던 것도 미안. 그냥 내가 다…….”
존나게 미안해.
남자의 옆모습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마른 땅을 쓸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처럼 쓸쓸한 느낌이었다.
“서운한 게 있으면 말을 해. 내가 사과할게. 헤어지자는 말만 제발 좀 하지 마. 네가 그 말을 하면 내가…….”
남자가 가슴팍을 쥐었다. 코트 안에 숨겨진 셔츠와 넥타이가 남자의 손아귀에 동시에 잡혀 와락 구겨졌다.
“여기가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아……. 그래서 그래.”
저 남자를 몇 초만 더 바라보고 있다간 자신도 그 쓸쓸함에 함께 휩쓸려 가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요원은 좋았다. 그래도 좋을 것만 같다. 그와 함께 휩쓸려 가는 곳이 그 아무리 수렁이라 할지라도, 나는 정말 좋을 것만 같아.
“나는 그래, 요원아. 채 순경, 나는 네가 나한테 왜 이러는지 도통…….”
“많이 좋아해요.”
무슨 말을 덧붙이기 위해 가슴을 크게 한번 들썩였던 무경의 호흡이 그대로 멎은 순간이었다.
“요즘은 혼자 그런 생각도 해요. 하무경을 데리고 외딴 섬으로 도망칠까. 하무경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잘나빠진 얼굴을 서서히 들어 올린 무경이 눈매를 가늘게 찡그리면서 요원을 바라봤다.
“……뭐?”
“좋아한다고요.”
처음 들어보는 고백도 아니면서 무경은 고백이란 것 자체를 아예 처음 들어보는 사람과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는 하무경 씨를…….”
요원이 숨을 한번 참았다가 진심을 터트렸다.
“너무나 사랑하고 있어요.”
당혹스러워 커다랗게 벌어졌던 남자의 눈매가 점차 제자리를 찾아갔다.
“네가 날 사랑해? 그런데 어떻게 헤어지잔 말을 그렇게 쉽게 해. 사랑이 그렇게 쉬워? 넌 다 쉬워?”
여전히 서운함이 남아있는 감정도 일부러 숨기지 않았다.
“그건…….”
뒷말을 흐리던 요원이 한 걸음 두 걸음, 대청마루 위의 무경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섰다.
무경은 제게로 살랑살랑 다가오는 요원을 새벽보다 더 검푸른 눈으로 줄곧 응시하고 있었다.
“그건 말이에요.”
벌어진 무경의 다리 사이에 요원이 몸을 낮춰 앉았다.
그가 조금 전 떨어트렸던 멘톨 틴 케이스를 집어 그의 손에 잘 쥐여주면서 요원은, 무경을 올려다본 채 눈을 휘어 사랑스럽게 웃었다.
이 쌀쌀한 날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녹아내리는 미소라 생각했다.
“내가 다 잘못했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무경의 눈매가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하마터면 육성으로 욕설을 씹어뱉을 뻔도 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이 와중에도 꼴려서 너의 뒤통수를 끌어당겨 입 맞추고 당장에라도 박고 싶은 나란 새끼는 정말로 쉬운 놈이 맞았고.
이런 나를 손쉽게 가지고 노는 너는, 정말로 뜻대로 되지가 않아 나를 미치게 하는 어려운 여자가 맞았으니.
“옴마, 시방 이거시 먼 난리여?”
조금 전, 무경이 일으킨 소란 때문에 잠에서 깬 갑순이 대청마루에 앉아 요원을 음란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무경을 향해 냅다 소리 질렀다.
“너 시방 또 술 처먹고 온 것이여!”
“하, 할머니.”
갑순의 고함에 움찔거린 요원이 낮추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고, 야릇했던 분위기가 단숨에 깨어지자 제 머리칼 안쪽에 손을 찔러넣은 무경은 인상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또 라고 해야 이제 겨우 두 번 아니겠습니까.”
일섭은 갑순보다 조금 더 늦게 나왔는데, 그저 뒷짐 진 채 서서 무경을 건너다볼 뿐이었다.
“마침 잘 나오셨어요.”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 세운 무경이 머리가 땅에 닿을 것처럼 허리 굽혀 갑순과 일섭을 향해 인사했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취한 사람답지 않게 정확한 발음 역시 오랜 숙련의 결과였으나, 흐트러진 모습까진 어찌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제가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이 시간에 찾아뵈었으니 부디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는 사람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무경은 두 발로 서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비틀거렸으니.
“결례는 니미 지랄을 하고 자빠졌네. 그거슬 아는 놈이 시방 이 시간에 술을 퍼마시고 찾아오냐잉.”
“그래서 제가 지금 결례라고,”
“흠.”
주의를 시키는 듯한 요원의 헛기침에 뒷말을 꾹 삼킨 무경이 자신보다 키가 작은 갑순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워메 추워 디져 불것네. 할 말이 머시냐고잉!”
갑순이 대청마루 위에 털썩 앉으며 그를 재촉했다. 세운 한쪽 무릎 위에 팔을 척 올린 갑순의 옆으로 일섭도 말없이 앉았다.
“그러니까 제가 아파트로 이사 가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어르신도 때론 그 고집을 좀,”
“니 잔소리 할라고 이 시간에 여그까정 왔냐잉. 지랄염병 하덜 말고 할 말이나 퍼뜩 하드라고.”
“죄송합니다.”
무경은 사죄하듯이 다시 한번 갑순과 일섭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칼 같은 각도였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뒷말을 흐린 무경은 허리를 숙인 자세 그대로였다. 각 잡혀 정확한 각도가 어느 순간 삐끗하여 조금 더 앞으로 기울어진 것 같기도.
“그러니까…….”
금방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것만 같은 무경의 자세를 바로잡아주기 위해 한 걸음 더 다가서는 요원의 행동보다도,
“제가요…….”
무경의 쪽이 더 빨라 한숨과도 같은 음성이 왈칵 터져 나왔다.
“두 분께 정말 서운하네요.”
놀랍게도, 그 뒤론 기억이 까만 점멸이다.
***
커튼이 없는 창문 틈새로 빛이 스몄다.
시골 장롱 냄새가 나는 이불 위에서 곤히 잠들어있던 무경의 곱상한 얼굴이 불시에 와락 일그러졌다.
눈썹을 몇 번 꿈틀거리던 그가 서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고, 눈을 뜸과 동시에 밀려오는 엄청난 숙취에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찌르르르 울리는 관자놀이를 연거푸 문질렀다.
아, 씨발 머리야.
다시 눈을 감고 중지와 검지로 관자놀이를 사납게 문지르던 무경이 재차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숙취에 전 검은 눈동자가 주변을 빠르게 휘- 훑는다.
필름이 끊기진 않았으나 끊겼던 것 같고, 기억은 분명 있으나 없는 것과도 같다.
라주연의 차를 타고 요원의 집까지 온 것도 기억하고, 갑순과 일섭에게 대강 뭐라 했는지도 기억은 나고, 갑순이 주는 꿀물을 마셨고, 꿀물을 마시는 동안에도 요원의 손을 놓지 않고 가슴을 만지듯 주물럭대다가 갑순에게 뒤통수를 한 방 세게 후려 맞았던 것도 같고, 그 뒤론 샤워를 하러 갔던 것 같기도 하고, 샤워를 마치고 나와선 요원의 방으로 당당하게 들어가 한 번만 달라고 말했다가 쫓겨난 것도 같은데.
쫓겨났음에도 포기를 모르고 다시 들어가 입으로라도 한 번만 해달라고 했던가?
기억은 자연스레 이어져 있지 않고 퍼즐 조각처럼 뚝뚝 끊겨 있었으니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
환장한다, 환장해.
갈수록 추태를 부리는 저 자신이 한심한 무경은 찌르르르, 울리는 관자놀이를 찡그려진 얼굴로 연신 문지르면서 한숨을 삼켰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무경의 핸드폰이 언제부터 울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제야 진동 소리가 들렸다.
반쯤 상체를 일으켰던 무경이 윽, 신음하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오늘따라 이 빌어먹을 숙취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긴 팔을 뻗어 마룻바닥 위를 더듬거려 제 코트를 낚아챈 그가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남은 배터리는 얼마 없고 액정 속 시계는 오전 9시를 막 지나가고 있었으며 발신자는 태호였다.
가만있어 봐. 오늘 평일이잖아. 나 씨발 지금 출근 안 한 거야?
그간 여자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미친놈처럼 굴었던 건 맞지만, 그래도 이성은 있었기에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던 무경인데. 프러포즈를 거절당했던 일이 그에겐 상당히 충격이었던 것 같다.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으면서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가 말았다.
메시지가 들어온 것이 보였는데 요원의 이름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뻑뻑한 눈가를 손바닥으로 몇 번 문지르던 그가 계속해서 울리는 태호의 전화를 거절한 뒤에 몇 번의 터치 끝에 요원의 메시지를 액정에 한가득 띄웠다.
-식사하시고 과수원으로 오세요. 할 말이 있어요.
안 그래도 숙취로 괴로운 무경의 머리가 더욱 찡하니 울렸다.
어제 그 추태를 보고 혹시 정떨어졌나? 나 완전히 정리하려고 그러나? 채요원이면 그러고도 남을 여잔데. 그런데 어제 분명 날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나는 미안하다고 했고 요원이는 내게 잘못했다고도 한 것 같은데.
근데 그게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환상이었는지 이제는 존나 다 헷갈릴 지경이네.
뚝뚝 끊긴 기억을 다시 이어보려 아무리 노력해도 잘 이어지질 않자,
그 미친년이 나한테 대체 뭘 먹인 거야?
애꿎은 화살의 방향은 아무런 죄 없는 주연을 가리켰고, 새벽에만 해도 주연에게 꼭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다짐했던 무경은 더는 없었다. 참 가벼운 우정이 아닐 수 없다.
찌푸린 얼굴로 핸드폰을 손에서 놓은 무경이 앓는 소리를 내며 한쪽 팔을 이마 위에 얹을 때였다.
“야이 오사랄 놈아!”
쾅! 닫혀있던 방문이 거세게 열리며 양은 밥상을 무경의 옆에 퉁명스레 내려둔 갑순이 소리쳤다.
“밥이나 처먹어야?”
무경만을 위해 차려진 밥상 위엔, 무경을 위해 끓인 오골계 삼계탕과 김이 피어오르는 따끈한 쌀밥과 정성이 들어간 갖가지 반찬 및 삶은 양배추가 올려져 있었다.
“어르신. 지금 뭐 저 사육하십니까? 아침부터 이거 다 안 들어가요. 과일 같은 거 없어요? 그거면 되는데요.”
“니 참말로 내 손에 디지고 잡냐잉. 싸게 싸게 와 앉아라잉.”
한숨을 내쉰 무경이 밥상 앞에 양반다리 하고 앉았다. 누군가 차려주는 밥상이 더 익숙하기에 불편한 기색은 일절 없어 보인다.
숙취로 얼굴을 구기고 있는 무경의 앞에 갑순이 앉았고, 세운 무릎 위에 팔 하나를 툭 걸친 갑순이 그때부턴 무경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하는데, 이건 거의 뭐 사람 하나 죽일 듯한 살기 어린 시선이라 갑자기 이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내가 어제 어르신께 뭐 실수한 게 있던가?
딱히 그럴 만한 게 없던 것 같아 무경은 애써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 숟가락을 들었다.
뜨거운 삼계탕 국물을 깔끔하게 입안에 넣고 맛을 본 무경이 여전히 저를 노려보고 있는 갑순과 눈을 맞춘 채로 싱그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맛있네요. 좋은데요?”
그제야 주름진 눈가를 인자하게 휘어 웃은 갑순이 무경의 쌀밥 위에 오골계 다리를 뜯어 올려주며 웃음기 밴 음성으로 구시렁거렸다.
“당연히 맛나제, 하 서방아. 누구 손맛인디.”
뜨듯한 국을 떠 올리는 무경의 손짓이 불시에 멈추었다.
무경이 놀란 눈을 들어 갑순을 바라보았으나, 갑순은 그를 쳐다보지 않고 말없이 그의 쌀밥 위에 잘 익은 김치를 올려줄 뿐이었다.
1년 하고도 5개월.
갑순은 무경이 단 한 번도 싫었던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