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111화 (111/116)

외전 5화.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언덕처럼

[ ※ 외전 5-7화 추천곡 : 양요섭 –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 ]

정적은 계속되었다. 그 누구 하나 쉽게 입을 뗄 수 없는 시간이었다.

거절한 요원도, 거절당한 무경도, 엄청난 적막의 크기가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반쯤 넋이 나가 있던 무경의 잇새에서 킥, 조금 자조적인 웃음이 흐른 건 그로부터 얼마가 더 지난 뒤였다.

“나 지금 까인 거야?”

그래. 까였다.

사귀다가 차인 것도 아니고 무려 까였다. 반지 내밀고 프러포즈했다가.

프러포즈하고 까이는 새끼는 아마 전 세계에 나 하나뿐이 없을 거라 생각하니 더욱더 기가 찼다.

와씨, 하무경이 이젠 하다 하다…….

아까부터 죄인처럼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는 요원에게선 말이 없었고 무경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날카로운 입술을 열었다.

“1년 5개월간 나는 너와 좋았는데, 우리 자기는 아니었나 봐.”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어떤 문젠데. 내가 너무 뻣뻣했어? 빌까? 아니면. 요란한 게 취향인데 내가 너무 조용하게 했나? 나갈래?”

“솔직히…….”

요원이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예쁜 얼굴이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잔인한 입술을 연다.

“하무경 씨와 결혼을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래서 제가 좀 많이 당황스럽네요.”

지가 당황스럽단다. 까인 건 난데.

무경이 하, 하고 웃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당황스럽다고. 네가.”

이럴 때 보면 너는 꼭 감정 없는 쇳덩어리 같다. 나 혼자만 존나 안달이 나서는.

“제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제겐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어서 그래요.”

말은 참 예쁘게도 잘해.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그거 아니잖아.

무경이 어처구니없단 듯 소리 내어 웃으며 제 찡그려진 눈썹을 긁어 올렸다.

“아, 그러니까 정리하면 이건가? 하무경은 연애 재질이지 결혼 재질은 아니다. 왜 그 쉬운 말을 어렵게 돌려 해요. 듣는 하무경 더 기분 나쁘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잖아요, 우리.”

“거울을 봐. 우리 잘 어울려.”

“그런 뜻 아닌 거 아시면서 그래요. 결혼은 급에 맞는 사람과 하세요.”

삐이- 요원의 단언에 이명이 들려 무경은 큼직한 손으로 한쪽 귀를 덮었다. 사포처럼 거친 요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긁고 지나간 기분이 들었다.

그 목소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도 머릿속에 자국을 남긴 것처럼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가라니.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어떻게.

“연애만 하자고.”

생전 처음 보는 낯빛을 한 무경이 고저 없는 음성을 뇌까렸다.

“몸이나 좀 섞으면서.”

남자의 상처받은 얼굴은 꽤나 장관이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낙인과도 같은 상처를 지닌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너를 육체적으론 만족을 시켜주니까. 너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거지?”

“왜 또 결론이 그런 식으로 나요. 그런 얘기가 아니라요.”

“어때, 나 가지고 노는 기분은? 재밌어?”

“가지고 논 적 없어요.”

“너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상대의 기분이 그런 거면 넌 그런 거고. 그러니까 너 맞아. 나 가지고 노는 거.”

요원도 무경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무경의 눈에 그녀의 상처 따윈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내가 진짜 설마 해서 묻는데. 혹시 기사 보고 이래? 세향?”

그의 입에서 나온 세향이란 단어에 요원은 무의식중에 아랫입술을 감쳐 물었고 무경은 어이없네, 라고 중얼거리며 작게 웃었다.

“아, 자격지심. 매력 없는데.”

욱하는 심정에 말이 잘못 튀어 나갔다.

“뭐라고요? 자격지심?”

삽시간에 굳어버린 요원의 얼굴에 아차 싶었지만 무경은 멈출 수 없었다.

“응. 자격지심.”

멈추지 않는다.

“난 걔가 누군지도 모르고 인사 한번 나눈 기억도 없는데, 그 삼류 지라시 수준도 안 되는 기사 몇 줄 달랑 읽고 이러는 거.”

나도 안다. 부드럽게 타이르고 다독여서 너의 진짜 속마음을 끌어내야 한다는 거 나 너무 잘 알아. 그 기사 보고 너 얼마나 속상했을까, 신경 많이 썼을 거야. 입장을 바꿔 너와 떡집 새끼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을 접하게 된다면 나는……. 그래. 나도 잘 알아. 너 이러는 거 너무 당연하고 몰아세우면 안 되는 것도 알고 내가 정말 잘 아는데.

“네가 지금 부리는 게 자격지심이야, 요원아.”

그런데, 요원아. 내가 지금은 마음이 너무 급해서…….

“채요원은 다른 줄 알았는데.”

그래.

“너도 뻔하네.”

그래서 그래.

“내가…… 뻔해?”

어디선가 무언가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들린다. 무경을 주기 위해 데우고 있는 찌개인지, 요원의 속마음인지는 모른다.

“내가, 그러니까 내가요…….”

요원은 최대한 참아보기 위해 아래턱에 힘을 줘보기도 하고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어보기도 했다.

“내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그러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울컥 감정을 한꺼번에 쏟아내듯 그렇게 소리쳤다.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냐고!”

그를 쏘아보는 눈동자가 점차 다른 색으로 물들었으나 여전히 그 상처 입은 눈동자를 무경은 보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뭐, 하무경 씨가 연애하자고 하면 해야 하고, 결혼하자고 하면 해야 되는. 뭐 그런 사람인가? 그런 사람이에요 내가?”

“응.”

“으응?”

“그래 줬으면 좋겠는데요.”

“이 미친놈이.”

“고마워, 자기야. 흥분된다.”

상대의 뻔뻔함에 말문이 막힌 사람은 요원이다. 하도 기가 차서 말은 나오지 않고 요원은 그저 헛웃음 치며 무경이 환장하는 저의 새하얀 목덜미를 연신 신경질적으로 문지를 뿐이었다.

“왜 웃어요, 채 순경.”

여자의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어 당장에라도 선명한 키스 마크를 남기고 싶은 눈빛을 한 주제에, 무경은 차게 짓씹었다.

“지금 웃을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내가 즐거워서 웃는 거로 보여요?”

“웃어, 자기야. 까인 사람은 나잖아.”

신랄한 비아냥은 끊이질 않고, 욱하고 치민 화를 차마 주체하지 못한 요원 역시 또 한 번 남자의 심장에 따가운 비수를 박아넣었다.

“말 나온 김에 조금 더 솔직해질게요. 우리 집에서 하무경 씨 별로 안 좋아해요. 별로가 뭐야. 완전 싫어하시지.”

“무슨 소리야. 할머님은 그렇다 쳐도 아버님이 날 얼마나 예뻐하시는데.”

“그거 아닌데.”

“그거 맞아.”

“완전히 잘못 보셨어요.”

“내가?”

그때까진 가볍게 여겼으나 이어지는 여자의 목소리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네. 아버지는 조금 더 정확히는 무경 씨를 굉장히 부담스러워하세요. 예뻐하는 게 아니라 싫어하시는 거라고요. 그 정도 눈치도 없으세요?”

금세 기분이 바닥을 쳤다.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연애만 하라고. 그 이상은 안 된다고.”

바닥이 뭐야. 바닥을 쳤다는 표현도 사실은 부족하지.

“저는, 집에서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사람과는 결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게 자식 된 도리라고 생각해요.”

누군 자식 된 도리를 몰라서 백야마을을 포기한 줄 아나.

자식 된 도리보다는 상생, 상생보단 마을 사람들과의 의리, 의리보단 너를 향한 내 감정이 더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따지려다가 쪼잔해 보여 관뒀다.

또 한 번의 광대한 침묵이 흐르던 것도 결국엔 잠시였을 뿐이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죠.”

조소를 품은 무경의 검은 눈빛이 사랑스러워 죽겠는 제 여자의 얼굴 위에 차디차게 머물러 탄식처럼 낮게 중얼거렸으니.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노력할게, 라는 대답이 나와도 시원찮을 판에 무경은 노력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의사를 내비친 거나 다름없었다.

거기에서 멈췄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무경은 언제나 입이 문제였다.

“어르신들이 날 좋아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은 꽤 어려워요. 채 순경은 벌써 잊었어요? 전에도 한 번 실패했었잖아, 왜. 네 마을 먹으러 갔을 때.”

너만 먹었지, 라고 미운 입술이 또 중얼거린다.

이 변태 새끼가, 요원은 그 욕설을 깊은숨과 함께 꾹, 삼켜 저 아래로 흘려보냈다.

“말씀 한번 참…….”

남자의 미우면서도 선이 고운 입술을 쳐다보던 요원이 더는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이, 표정을 바꾸고 목소리의 색도 완전히 바꾸어 침착한 어조로 상황을 정리했다.

“이견이 전혀 좁혀지질 않으니 답은 이미 나온 것 같네요.”

“그 답이 뭔데.”

“아시잖아요.”

“몰라. 모르니까 묻지.”

“표정을 보아하니 잘 아시는 것 같은데요, 왜.”

그녀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말은 끝까지 입에 올리지 않으려던 무경은, 잠시 숨을 참고 꽉 깨물었던 어금니에도 힘을 풀며 그 말을 결국엔 입에 올렸다.

“헤어지자고?”

“서로의 집에서 반대가 있다면 그게 맞지 않을까요?”

“난 우리 집에서 너를 반대한다고 말한 적 없는데.”

“하무경 씨 집에선 저를 반대할 가치도 못 느끼나 보죠.”

“자격지심 버려, 자기야. 그거 정말 매력 없어.”

“자격지심 아니고 사실이잖아요. 그러니까 헤어져요. 그게 맞아요.”

“고작 그런 이유로.”

“제겐 고작인 이유가 아니니까요.”

심장이 아팠다. 너는 가끔 내 심장이 강철로 만들어진 줄 아는 것 같은데, 아니다. 아니야. 나도 사람이야, 요원아.

남자의 억장은 이미 와르르 무너져내린 지 오래였으나, 마음과 대립하는 견고한 얼굴엔 큰 변화가 없어 보였다.

“말 한번 참 쉽게 하네.”

요원은 더는 아무런 말을 덧붙이지 않았고 그 침묵이 더해질수록 무경은 갈증을 호소하는 제 목가를 어루만졌다. 불안이란 감정이 자신을 점차 갉아먹는 기분을 느꼈다.

“너는 참 좋겠다? 그렇게 다 쉬워서.”

결국, 갈증을 이겨내지 못한 무경이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나 최신형 정수기 앞에 섰다.

유리잔을 꺼내 물을 채우고 원샷했다. 물을 삼키고 다 마신 유리잔을 싱크대에 내려두는 행동엔 여유가 하나 없어 보였다. 유리잔은 내려둔다기보단 던진 거나 진배없다. 그 소리에 요원이 몸을 다 흠칫거릴 정도였으니.

“채요원 씨.”

무경이 다시 요원의 맞은편에 앉으며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파릇한 미소라 생각했다.

“혹시 알까 모르겠는데.”

조금 전, 요원이 아일랜드 상판 위에 내려두었던 반지를 거두어가듯 손에 꽉 쥐면서 무경은 또 웃었다.

“채 순경, 너는 있잖아.”

싱그러웠던 미소가 자조로 바뀐 건 순간이었고, 처음 보는 살벌한 눈동자가 요원을 작살처럼 내리꽂으며 냉담하게 짓씹는다.

“너는 나를 너무 쉽게 포기해.”

가장 행복했어야 할 날에 냉전을 시작한 연인. 똑같은 상처를 받은 두 사람.

남자의 얼굴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언덕처럼 고요했고, 여자의 얼굴은 깊은 산처럼 무덤덤했다.

사랑.

나는 너와 1년 하고도 5개월째, 겨울 풍경만큼이나 더욱 외로워지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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