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110화 (110/116)
  • 외전 4화. 남매끼니 싸우지 잔 마야

    하해경 회장이 운명한 지도 벌써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동녘 家의 삼 남매는 여전히 서로를 못 견뎌 했지만, 오히려 하해경 회장이 세상을 떠나고 나선 모두가 조금은 편안해 보였다.

    하해경 회장은 떠나기 직전에 하태경을 그룹사 부회장 자리에, 하가경을 사장 자리에 앉혔다. 그래야 네가 조금 편안할 거란 말을 덧붙이면서.

    하해경 회장의 막내아들 사랑은 숨이 끊기는 그 순간까지도 남달랐던 것 같다.

    물론, 사회의 시선은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결국 자기들끼리 해 먹는 고집스러운 핏줄 승계라는 비판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그들을 까대는 기사는 하나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오지 못했다.

    무경이 이 자리에 가만 앉아 생각이라는 걸 해보니 최근에 깨달은 바가 하나 더 있었는데, 하태경과 하가경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핏줄을 후려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는 안 보였던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 눈에 보였다. 두 사람이 진짜 마음먹고 손을 잡았더라면 막내 따위 무서울 게 뭐 있었을까 싶은 거다.

    무경 역시 혈육이라는 특별한 관계 덕에 그들에게 쌍욕을 박아댄 거지. 주변에서 보는 하태경과 하가경이 어디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인물들인가. 모두가 어려워하는 사람들이지. 그러니 주연이 늘 물어보지 않았나.

    ‘자기는 그 두 사람, 정말 안 무서워?’

    가만 보면 우리는 서로 허세만 엄청 잡았을 뿐.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의 등 뒤에 진짜 칼을 찔러넣어 상처를 남기는 짓거리는 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서로의 약점을 손에 쥐고 협박 용도로만 사용했지.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를 아직 가족으로 보긴 본다는 건데.

    그런가? 우리는 서로를 정말 그렇게 보고 있나?

    먹지도 않는 오일 파스타를 포크로 돌돌 말던 무경이 한 테이블에 앉아있는 제 형과 누나를 가만 바라보았다.

    동녘 남매에게 이처럼 변화는 또 있었다.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한 번씩은 셋이 모여 식사 한 끼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하해경 회장의 불꽃이 꺼지려던 순간에, 그가 제 마지막 바람을 옅어지는 숨과 함께 남겼기 때문인데.

    ‘나…… 남매끼니…… 싸…… 싸우지 잔…… 마야…… 가찹게…… 가찹게…… 지내…… 라잉.’

    그 말엔 대단한 어폐가 있었다. 동녘 家의 삼 남매를 누구보다 멀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그는 정녕 마지막 순간까지도 깨닫지 못한 것인가.

    그래도 탓하고 싶진 않았고, 가시는 마음 편할 수 있게 동녘의 삼 남매는 그러겠다 대답하며 하해경 회장의 식어가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하해경 회장은 동녘의 삼 남매를 차례차례 바라보았고 선선한 미소와 함께 눈을 감았다. 평온한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도현은 오지 않았다. 어쩌면, 도현이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잔혹한 복수였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하해경 회장은, 마지막으로 도현을 진심으로 보고 싶어 했으니까.

    “또 배우 만나신다면서요.”

    포크로 샐러드를 뒤적거리면서 무경이 굳게 다물린 입을 열었다.

    “회장님, 내 뒷조사하셨니?”

    꼰 다리를 까딱까딱하면서 하가경은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뒷조사는 무슨. 알아서 잘만 사진 찍혀주던데. 이번에도 스폰이에요?”

    하가경이 상체만 앞으로 슬쩍 기울여 무경을 아니꼽게 쳐다봤다.

    “나 이제 회장님한테 내 사생활도 보고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 줬으면 좋겠는데요.”

    “뭐야?”

    “대답해 봐요. 사랑이면 신경 안 쓰고. 스폰이면 정리하시고.”

    “뭔데 정리하라 말라야?”

    하가경이 자신을 어떻게 쳐다보든 말든, 무경은 고귀한 자태로 입가를 닦으며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눈치 챙겨요. 내가 지금 부탁하는 거로 보여?”

    “너 진짜!”

    하가경이 발끈하듯 꼰 다리를 확 풀었다가 곧 내면의 평화를 되찾으려는 사람처럼 호흡을 가다듬었다.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또 이제 자신들의 손에 동녘의 운명이 걸려있는 만큼, 세 사람은 예전처럼 서로에게 쌍욕을 박진 않았다.

    물론, 아예 박지 않는 건 아니었고 나름 서로를 존중해주려 최소한의 노력들은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누나.”

    아버지가 떠나고 언젠가부터 무경은 하가경을 이런 식으로 불렀는데, 그때마다 하가경은 그 다정한 어투에 흠칫거릴 때가 종종 있었다.

    “우리 중 누구 한 명이라도 삐끗하는 날엔 동녘은 무너지는 거야. 아버지 계실 때와는 상황이 또 많이 달라요. 누나가 정말 몰라 이래?”

    정말로 달랐다. 하해경 회장이 없는 동녘을 대부분은 위기이자 고비로 보았으니.

    “이미지 관리해요. 응? 같은 식구끼리 메이킹 한번 끝내주게 해보자고.”

    하가경은,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이젠 날 가르치려 든다며 분해했지만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는지 말을 아꼈다.

    “왜 대답이 없어요. 어?”

    무경은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하가경에게 대답을 재차 강요했고 하가경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어, 하고 대답을 흐렸다.

    어휴. 지겨워.

    생각하면서 다시 접시 위로 시선을 내린 무경이 화제를 돌렸다.

    “이번에 도입된 배송 시스템, 형님의 추진하에 진행된 거로 압니다. 신선하단 평이 많아요. 덕분에 취약했던 시간대 매출도 상승했고 제가 아직 형님께 배울 점이 참 많다는 걸 느낍니다.”

    무경은 하해경 회장과는 다르게 하태경을 대했다.

    누구와 절대 비교하는 짓 따윈 하지 않았고 자신을 낮춤과 동시에 상대를 자연스럽게 치켜세워주는 여유도 가졌다.

    하해경 회장이 높이 평가했던 무경의 장점 중 하나다.

    덕분에 무경을 향해 늘 날을 세우던 하태경도 조금은 유해진 듯싶다. 물론, 그의 진짜 속내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향 최 부회장이 내게 전화를 했더구나.”

    업무와 관련 없는 말에 흥미가 떨어진 무경은 이제 나이프와 포크를 쥐고 스테이크를 서걱서걱 썰었다.

    “너와 식사 한 끼 같이하고 싶다는데 얼마 전 나온 기사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기사라 함은 「동녘 그룹 하무경 총수, 결혼 임박! 상대는 세향 홀딩스 최 부회장의 막내딸?」 증권가 지라시에서부터 나온 터무니 없는 말장난이라 기사라고 칭하기도 쪽팔릴 지경이었지만.

    “그 시골 순경 데리고 놀 만큼 데리고 놀았으면 이제 슬슬 정리해라. 너도 이제 네 가정을 꾸려야지.”

    두툼한 고깃덩어리 위에 포크를 쿡 박아넣은 무경은 그것을 입안에 밀어 넣으면서 하태경을 평화로이 바라보았다.

    “최승아 양, 이번 기회에 한번 만나나 봐라. 방송계로 진출했다고는 하지만 그 광대놀음 언제까지 하겠냐. 아직은 나이가 어려 세향에서 가만 놔두는 것일 뿐, 곧 세향으로 돌아가 자리 하나 꿰찰 거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결혼도 결국엔 비즈니스인 건데 세향 정도면 투자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입안의 고깃덩어리를 씹고, 삼키고, 또 한 조각 깔끔하게 밀어 넣으면서 무경은 하태경을 그저 지켜만 보았다.

    그 눈빛엔, 앞으로 상대가 뭐라고 더 지껄일지에 대한 흥미로움이 묻어나 있는 것도 같았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평민과 결혼했을 때의 마지막은 늘 같다.”

    하태경은 얼굴과 잘 어울리는 고리타분한 조언을 계속해서 얹었다.

    “위자료와 양육권 관련한 이혼 소송. 대대적으로 뉴스에 얼굴 나오고 조롱하는 기사들은 수백 개 터져 나오고 국민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네가 방금 가경이에게 이야기했듯 너도 동녘을 생각해서 이미지 관리하란 소리다. 싸구려 만들지 말라는 소리야.”

    챙, 하는 소리가 순식간에 공기를 찢었다. 무경이 접시 위에 포크와 나이프를 던지듯이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데리고 놀긴 뭘 데리고 놀아요, 씨발. 아주 뜻대로 안 돼 미치겠는데.”

    섬뜩하게 내뱉어진 날것의 욕설에 오랜만에 좋은 구경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하가경은 웃으며 턱을 괴었고 하태경의 미간엔 깊은 주름이 패었다.

    “그래서. 진짜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소리냐? 기어코 동녘을 싸구려로 만들겠단 소리야?”

    “동녘의 총수, 대한민국 순경과 결혼 임박.”

    무경이 기사의 헤드라인을 읽듯 검지를 허공에 일직선으로 주욱 그으면서 웃었다.

    “존나 고상한데, 왜.”

    예전 같았더라면 여기에서 끝내지 않고 이 씨발놈아, 라는 천박한 욕설을 추가해서 개싸움을 만들어야 정상이었지만 무경은 그저 리넨 냅킨으로 입가를 툭툭 조용히 닦을 뿐이었다.

    “그리고 제 이미지는 제가 알아서 잘 메이킹할 테니 형님이나 신경 좀 쓰시죠. 괜히 포썸 사진 퍼져서 싸구려 걸레짝 만들지 마시고. 떡을 치셔도 형수님이랑 집에서 좀 곱게 치시라고.”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라.”

    하태경이 쥐고 있는 나이프와 포크를 접시 위에 조금 거칠게 내려두었다.

    “옆집 둘째 아들 말이다. 평범한 회사원과 결혼해서 지금 꼴이 어떻게 되었는지 너 아냐. 뒷집 막내딸 말이다. 가난한 유학생 만나다 주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엔 자살했다. 그런 거다. 급이 맞지 않은 사람들끼리 만나면 결말은 그런 거야. 너는 아버지 돌아가신 걸 감사히 여겨라. 아버지 살아 계셨으면 지금쯤 그 순경은,”

    “형님.”

    하태경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실수인 척 테이블 다리를 구둣발로 쾅, 한 번 치는 무경의 의도된 행동 때문이었다.

    “1절만 하세요.”

    무경은 이제 유리잔을 손에 그러쥔 채 빙그레 미소 지었다.

    “지금 우리 분위기 좋은데, 왜.”

    한숨을 삼킨 하태경이 다시 신사다운 자태로 나이프와 포크를 각각 손에 쥐고서 점잖은 어투를 구사했다.

    “중요한 것은, 상대도 원하는 바더냐.”

    하태경의 허를 찌르는 그 예리한 질문엔 그나마 남아있던 미소도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그 시골 순경도 너와 같은 마음이냐 묻는 거다.”

    이 씨발놈이 진짜 뭘 알고 저러나? 나한테 미행 붙인 거 아니야? 우리 집에 도청장치라도 설치하셨나?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게 존나게 들쑤시네, 존나 짜증 나게.

    딱 그런 얼굴로 하태경을 내다보던 무경이 꽉 물었던 어금니에 간신히 힘을 풀면서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관심도 없으면서 이제 와 꼴 받게 훈수 두지 마시고, 소중한 식사 한 끼 좋은 마음으로 마저 하시죠.”

    “아무튼, 어린놈이 싸가지 하고는.”

    취해버린 하가경이 옆에서 나사 하나 풀린 사람처럼 웃었고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진 무경 역시 하가경을 비딱하게 쳐다보며 킥, 실소했다.

    “누나. 설마 그거 나한테 하는 소리는 아니지?”

    찡그린 미간을 중지로 긁적이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설마.”

    똑같이 중지로 관자놀이를 긁으며 대답하는 하가경이 또 실실 웃는다.

    예전 같았더라면 벌써, 재밌냐 이 썅년아? 라는 천박한 욕설로 더한 개싸움을 만들어야 정상이었지만 무경은 그저 쥐고 있는 리넨 냅킨을 테이블 위에 탁 내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었다.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가 없다.

    “왜 일어나?”

    어쩐지 하가경은 시시한 결말에 아쉬운 낯빛이었고 하태경은 입맛이 떨어진 얼굴로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두며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글쎄. 오랜만에 위가 뒤틀리네.”

    많이들 드시고 가세요, 테이블 위를 두 번 쿵쿵 노크하듯 두드린 무경이 매니저가 가져다주는 코트와 머플러를 받아들며 그들을 지나쳤다.

    건방진 자식, 목을 긁는 하태경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부터 작게 들려왔지만 무경은 못 들은 사람처럼 뚜벅뚜벅, 레스토랑 밖을 걸어 나갔다.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대기하고 있는 세단 뒷좌석에 코트와 머플러를 던져넣으며 올라탄 무경이 짜증스러운 낯빛으로 눈을 감으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맛있었어요. 너무 맛있어서 불 지르고 싶을 정도로.”

    진담을 농담처럼 하면서 감았던 눈을 다시 뜬 무경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우리 방 기사님도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예, 회장님.”

    여전히 요원에게서 들어온 연락은 한 통 없고 무경도 이번엔 절대로 굽히지 않을 심산이었다.

    까인 건 난데 내가 매달리기까지 해야 해? 동녘의 하무경을 대체 뭐로 보고.

    츳,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찬 무경이 눈을 감았다.

    오늘 밤은 정말로 위가 뒤틀릴 모양인지 심상찮은 통증이 아래에서부터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통증이었다.

    눈썹을 구기며 한쪽 팔로 제 배를 감싸 안은 무경이 심란한 머리로 며칠 전 일을 떠올려보았다.

    무경이 프러포즈했다가 대차게 까였던, 그날의 후일담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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