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109화 (109/116)

외전 3화. 냉전의 시대

요원은 설레는 마음으로 남자의 레지던스에서 그를 기다렸다.

소풍 전날의 어린아이처럼 어제는 잠을 조금 설쳤던 것도 같다.

근 한 달 만에 보는 제 남자이니 당연했다.

한 시간 전에 인천 공항에서 출발했다고 하니 재회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다.

요원은 한국 음식이 그리울 남자를 위해 고춧가루를 한가득 털어 넣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사실, 아직도 그 남자를 잘 모르겠다. 정말 대단한 사람인 건 알겠는데, 그와 1년 하고도 5개월이란 시간 동안 연애를 하다 보니 그가 그리 대단한 사람 같진 않았다.

익숙해진 걸까. 아니면 평범한 첫 만남 때문인가.

물론, 남자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 때가 더 많았지만 어째서 남자와 잘 섞이는가 생각해 보았더니, 내가 그를 너무 좋아해서, 주변을 전부 차단하고 시야를 가리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중인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나는 남자가 그만큼이나 좋고, 하루하루 더 사랑에 빠지는걸. 아직은 헤어짐을 생각할 수 없는걸.

나도 내가 누군가를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으나 그게 가능했다.

그럼에도, 결혼이란 엄청난 인생 퀘스트에 남자의 옆자리를 욕심내본 적 없다.

일섭의 반대는 기본이고 결혼은 급이 맞는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축복받을 일임을 알기에.

어느 날은 그런 현실적인 생각들이 요원을 서럽게 했다.

1년 5개월이나 함께하였으나, 결혼을 꿈꿀 수는 없기에.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연애와 결혼은 결이 다른 것들이니까. 연애가 판타지라면 결혼은 현실임을 알기에.

그래서, 세향 홀딩스 손녀의 기사를 보았을 땐 차가운 바람이 들어온 것처럼 목 안이 다 시큰거렸다. 그런 여자에게 결국엔 남자를 보내줘야 함을 알기에.

어느 날 남자가 내게 와서 결혼할 여자가 생겼다고 말한다면 나는, 기꺼이 남자를 보내줄 마음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네가 나를 가지고 놀았냐고 멱살을 부여잡고 원망하다가 매달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도 안다. 내 말엔 어폐가 있다는 것을.

나는 남자가 내 곁에 없으면 죽을 것 같고 남자 곁에 나 아닌 다른 여자가 있는 건 죽어도 못 볼 것 같다가도, 또 내가 남자의 곁에 있는 그림도 그릴 수가 없으니.

그는 나와 결혼할 마음이 있을까.

없다고 하면 서럽고 있다고 해도 슬프다.

사실 내 머릿속은 좀, 아주 많이, 복잡하다.

***

삐비삑. 삐빅.

도어 록 소리가 들려왔다.

소파에 앉아 무경을 기다리던 요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넓은 집 안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뛰어갔다.

덜컹.

문이 열리자마자 핸드폰을 한쪽 귀에 받친 무경과 눈이 맞았다.

무경은 웬일로 슈트가 아닌 편안한 차림이었다.

검은 PK셔츠에 검은 슬랙스를 입고 검은 캐시미어 코트를 걸쳐 입은 남자는 온통 까맸지만 요원은 눈이 부셨다.

“고생 많았어요. 월요일에 봅시다.”

간결하게 통화를 끝마친 무경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 사이, 그의 등 뒤에서부터 육중한 현관문이 쿵,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한 달 만이에요.”

눈매를 접어 미소 짓는 요원을 무경은 잠시 바라보다가 “잘 지냈어?” 하는 안부와 함께 그대로 손을 뻗어 요원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나 공항에서 샤워하고 왔어.”

샤워? 급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요원이 눈썹을 치켜 올리기 무섭게 손에 가볍게 힘을 주어 요원을 훅, 당긴 무경이 그녀를 한 방향으로 끌어 세웠다.

쿵.

요원의 등이 벽에 부딪혔고 하체를 요원에게 바짝 붙여 선 무경이 여자의 목덜미를 붙잡아 그대로 제게로 당기며 입 맞췄다.

입 맞췄다는 표현은 사실 조금 얌전할지도 모른다.

지금의 무경은, 참을 수 없는 갈증에 목마름을 호소하는 사람처럼, 그녀의 모든 것을 마셔버릴 듯이 요원의 입술을 물고 빨고 깨물고 농밀하게 혀를 빨고 당기고 얽고를 반복하였으니.

남자가 고의로 하체를 더욱 바짝 밀착시켜 노골적으로 문지르자, 아래에서부터 확연하게 닿아오는 남자의 욕정에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흐읍…….”

밀고 들어오는 난폭한 기세에 호흡이 곤란하여 남자의 어깨를 여러 번 밀어내려 하였으나, 코트를 막 벗은 남자는 그 손을 거추장스럽단 듯이 단숨에 결박시키면서 점차 아래로, 아래로, 몸을 낮췄다.

“잡아.”

속박하고 있던 요원의 손은 제 머리칼을 붙잡게 하고, 요원의 다리 한쪽을 가뿐하게 잡아 올린 무경이 그녀의 새하얗고도 작은 발 하나를 제 어깨 위에 올렸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빨고 싶다고 했잖아.”

“배 안 고파요?”

“응. 고파.”

“밥.”

“밥솥.”

“아니…… 내가 김치찌개 해놨는데…… 밥을 먹어요, 우리.”

“내가 이런 말까진 정말 안 하고 싶었는데. 자기 요리 정말 못해.”

“뭐라고요?”

“들었잖아.”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심한 말 아니고 사실이니 가만히 좀 있어.”

너라도 맛있게 먹게.

그의 마지막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요원이 입고 있는 치마를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위로 젖힌 무경이 한곳에 음란한 얼굴을 파묻고 집요하게 빨아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 아! 자, 잠시만요!”

만나자마자 그가 달려들 것이란 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으나, 이렇게까진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요원은 적잖게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 자, 잠시…….”

요원의 손에 엄청난 힘이 들어갔고 무경의 머리칼을 잡아 뜯을 듯이 그렇게 꽉 붙잡게 되었다.

거센 힘으로 머리칼이 붙잡혔기에 아플 법도 하였으나, 짧게 신음하는 것 외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무경은 계속해서 한 곳을 끈질기게 흠빨아댔다.

혀끝에 닿는 맛이 꼭, 평소 즐겨 먹는 화한 레몬 민트 맛 같단 생각을 하면서.

“아, 으응, 거기 이상, 흣, 해요.”

“몇 번을 알려줘. 이 행위는 원래가 이상할수록 더 좋은 거라고.”

“거기 싫어, 싫어. 그만, 그만요.”

“뭐라고, 자기야? 좋다고?”

“아, 그만, 그만.”

“어, 자기야. 더 해달라고?”

잊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가장 잘한다는 섹스라는 행위에서 배려도 양보도 없다는 것을.

아, 신음하는 여자의 새하얀 목이 뒤로 꺾였다. 두 눈도 질끈 감겼다.

시야가 까맣게 점멸되자마자 파바바박! 눈앞에서 형형색색의 폭죽이 터졌고 들려오는 음란한 소리는 퍼레이드 속 웅장한 음악과도 같았다.

남자와의 연애는 그랬다. 매일매일이 화려한 축제 같았다.

사랑.

나는 당신과 1년 하고도 5개월째, 가을 풍경만큼이나 깊어지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근 한 달 만의 정사는 어느 때보다도 격정적이었다.

요원은 안달이 났고 무경은 더 안달이 나서는 사람보단 흡사 본능만 남아있는 짐승에 가까운 행위가 침실 안에서 내내 이루어졌다.

긴 비행으로 인하여 지칠 법도 하였으나 무경은 싸도 싸도 죽지를 않았고, 결국 그의 아래에서 눈물을 터트린 건 여러 번 안아달라고 부탁했던 요원이다.

원래 눈물이 없는 쪽인데 오늘은 왜 울었는지 의문이다.

그 정도로 힘들었던 건지, 그 정도로 좋았던 건지, 아님 둘 다인지.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고 샤워를 끝마친 요원은 아일랜드 식탁 앞에 앉아 무경이 가져온 한라봉을 먹었다.

참 희한한 게, 인도를 다녀온 남자는 어디에선가 한라봉을 들고 왔다.

“결혼하자.”

아앙- 크게 벌린 입안에 막 탱글한 한라봉 과육을 욱여넣으려던 때에, 역시 샤워를 마치고 나온 무경이 아일랜드 식탁 위에 반지 하나를 내려두며 담백한 어조를 뱉었다.

“나 가져. 너 줄게.”

요원은 여전히 입을 크게 벌린 채로, 그 크기만큼이나 눈도 커다랗게 벌린 채로, 제 곁에 선 무경을 넋을 놓고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아직 인지하지 못한 얼굴이다.

무경은 마르지 않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픽 웃었다.

어쩐지 그녀의 눈 밑이 잘게 경련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 많이 놀랐겠지. 그래도 아주 좋아 죽겠지.

“턱 빠지겠다.”

무경이 웃으며 요원의 턱 밑을 두 번 툭툭 두드리자, 자동문이 닫히듯 요원의 쩍 벌어진 입술도 다시 굳게 다물렸다.

“왜. 맘에 안 들어? 시끌벅적하게 해주는 게 취향이야? 그러면 하루만 줘. 다시 해줄게.”

요원의 손목을 부드럽게 그러쥔 무경이 그녀의 손에 가만 쥐어져 있는 과육을 제 입안에 깔끔히 머금었다. 요원의 손가락도 농밀하게 한번 빨아주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입안에 퍼지는 달큼한 한라봉 맛을 음미하면서 무경은, 요원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여전히 요원에게서 들려오는 답은 없고, 눈 뜨고 기절했나? 싶어 그녀의 작은 얼굴 앞에서 엄지와 중지를 맞물려 딱딱, 크게 소리를 내보았다.

“자기야. 숨 쉬어.”

요원의 눈꺼풀이 무경의 손가락 스냅에 따라 깜빡깜빡했기에 그제야 안심한 무경은 힘 빠진 요원의 손을 붙잡았다.

“연습 많이 했거든. 그런데 나다운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서.”

그 손가락에 딱 맞는 반지를 끼워 넣으면서 무경은 반지처럼 화려하게 미소 지었다.

“결혼해. 오빠가 가진 거 너 다 줄게.”

시계는 째깍째깍,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돌아갔는데 그 당연한 숨쉬기를 요원은 아까부터 하지 못하고 있었다.

숨도, 요원의 시계도, 함께 멈춘 기이한 순간이었다.

무경은 여전히 대답 없는 요원을 턱을 괸 채 가만 응시했다. 조금 지루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다.

“자기야. 대답 안 해줄 거야?”

그의 얼굴에 여름 바닷바람처럼 따뜻하게 번져있던 미소가 겨울의 잔혹한 날씨처럼 뚝, 급격하게 영하를 찍게 된 시점은.

“죄송합니다.”

무경이 손수 끼워준 반지를 빼내 아일랜드 상판 위에 다시 고이 내려둔 요원의 돌발 행동에 의해서였다.

“거절하겠습니다.”

변수였다.

“뭐.”

하무경이 어떠한 대책도 세우지 않은.

“거절?”

엄청난 변수.

평화롭고 아름다운 꽃밭 길을 함께 거닐던 두 사람 사이에 냉전의 시대가 도래했다.

어쩐지 쉽게 종전될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그런, 냉전의 시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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