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108화 (108/116)
  • 외전 2화. XX 인도 XX

    [ ※ 외전 2-3화 추천곡 : 마마무 – Piano Man ]

    하루의 일정을 모두 끝마치고 현재 머무르는 인도 뉴델리 내 최고급 호텔로 돌아온 무경은 가장 먼저 금고 앞에 섰다.

    삐삐삐삑.

    비밀번호를 눌러 잘 보관된 쥬얼리 케이스를 꺼내든 그가 넥타이를 풀고, 셔츠 소매의 커프스링크를 풀고, 벨트 버클을 열고, 셔츠 단추를 하나둘 끌러 내리면서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고 입욕제를 푼 뒤, 녹초가 된 몸을 욕조에 앉히면서 머리를 뒤로 젖혔다.

    “하아…….”

    존나 귀 아프네, 씨발. 피 나는 거 아니야?

    온종일 들은 클랙슨 소리 때문인지 귀가 다 먹먹했기에 제 귓가를 사납게 문지르면서 쥬얼리 케이스를 열었다.

    엄지와 검지로 집은 물방울 다이아 반지를 무경은 마치, 감정사와 같은 신중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하면서 주면 좋을까.

    ‘결혼하자.’

    너무 심심한데.

    ‘채요원. 너 나랑 결혼해.’

    어딘가 이상한데.

    ‘자기야, 오빠랑 결혼할까?’

    너무 가벼운데.

    ‘너 나랑 결혼 안 하면 내가!’

    씨발, 협박하냐?

    헛웃음 치며 반지를 쥬얼리 케이스에 다시 잘 넣은 무경이 그것을 젖지 않을 곳에 내려둔 뒤, 다시 욕조에 머리를 기대고 수증기 가득한 욕실의 천장을 가만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습관처럼 들고 다니는 핸드폰의 액정을 젖은 손가락으로 툭 한 번 터치하여 시간을 확인했다.

    인도와 한국의 시차는 3시간 30분.

    지금 여기가 밤 8시 30분이니 한국은 딱 자정이겠구나.

    연락을 주겠다는 상대에게선 온종일 연락이 없었고, 무경 또한 정신없이 바빠 연락할 틈이 없었다.

    자려나. 자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멋대로 움직인 손은 요원과의 통화를 시도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간 뒤에야 상대가 전화에 응답했다.

    [……채 순경입니다.]

    “설마. 잔 건 아니지?”

    [잤는데요. 전화 때문에 깼지만.]

    “잠이 와?”

    [잘 오던데요.]

    말문이 막혔다.

    나는 매일 밤을 허전한 침대 위에서 존나 뒤척거리며 잠을 통 이루지를 못하는데, 너는 지금 존나 잠이 오냐고 따져 물으려다가 쪼잔해 보여 관뒀다.

    [인도는 어때요? 거긴 덥죠? 여긴 너무 추워요. 내일은 눈이 오려나 봐요.]

    괜히 미안했는지 착해빠진 요원이 화제를 전환하는 것이 느껴졌다.

    “인도는…….”

    끝말을 흐리면서 뻐근한 목덜미를 주물렀다.

    “죄다 거지 같아.”

    물의 수면과 맞닿은 팔꿈치가 찰방찰방 젖은 소리를 냈다.

    [왜 말을 그렇게 해요. 좋게 생각해요.]

    “이 상황을 어떻게 좋게 생각할까요. 새끼들이 1초도 쉬지 않고 경적을 눌러대서 지금 내 귀가 나갈 것 같은데. 음식도 거지 같고 공기는 더 거지 같고 사람들도 짜증 나 죽겠는데.”

    여전히 무경에게 비아냥이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는데, 건너편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순간 아차 싶었다.

    “이 말의 결론은.”

    화가 났구나 싶어서 속히 사태를 수습했다.

    “난 채요원이 있는 대한민국이 제일 좋다고.”

    다행히 이 방법이 통했는지 요원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 순간에 무경은 안도의 숨을 작게 내쉰 것도 같다.

    무서울 것 하나 없던 하무경의 인생에도 무서운 게 하나 생겼다. 채요원이다.

    나는 네가 회까닥할 만큼 사랑스럽고, 애가 탈 정도로 그립다가, 실성할 만큼 예뻐 죽겠으며,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거든.

    “채 순경은 오늘 어떤 하루를 보냈어요.”

    두 사람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은 정말로 다양했다.

    어쩔 땐, 채 순경. 어쩔 땐 하무경 씨. 어쩔 땐, 자기야. 어쩔 땐, 오빠. 어쩔 땐, 요원아. 어쩔 땐, 무경 씨. 어쩔 땐, 너. 상대도 어쩔 땐, 너, 야, 이 미친놈아, 변태 새끼 등등.

    [음. 꽤 괜찮은 하루였어요.]

    “정말?”

    [네.]

    “다시 잘 생각하고 대답해. 정말로 괜찮은 하루였어?”

    [음. 다시 잘 생각해 봐도 꽤 괜찮은 하루였는데요?]

    “궁금한 게, 그거 언제까지 할 거야? 1년 5개월이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

    마음과는 달리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먼저 튀어 나갔다.

    [내가 뭘 그만해야 되는데요?]

    “내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다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거잖아, 너.”

    [뭘요. 어떤 하루를 보냈냐고 해서 잘 보냈다는 대답이 왜요.]

    “잘 들어 봐, 자기야. 남자가 이러한 상황에서 듣고 싶은 대답은 말이야.”

    하, 시니컬한 한숨을 뱉으면서 이마 위에 멋대로 흩어진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쓸어올렸다. 하무경이 하다 하다 이젠 이런 것까지 알려주고 있다, 생각하면서.

    “하루가 아주 엉망이었어요. 잘 보내지 못했어요. 최악이었어요. 보고 싶어서.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아.]

    “물론, 자기야. 여기에서 남자를 조금 더 꼴리게 만들고 싶으면.”

    [아니요. 거기까지만 해요. 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

    “보고 싶다, 요원아.”

    뜻밖의 말이었던지 요원이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무경은 상상할 수 있었다. 요원은 지금 벌게진 뺨을 해선 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귀여워서 머리를 조금 더 뒤로 젖히며 낮게 웃었다.

    “나는 네가 진심으로 보고 싶어.”

    무슨 말이 더 필요해.

    다정한 웃음기 밴 남자의 목소리가 욕실 내를 메운 수증기 속에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너는 나 안 보고 싶잖아. 그러니까 잘 지냈지.”

    확인받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어쭙잖은 투정을 부려본다. 요원에게선 한동안 들려오는 대답이 없다가 그녀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저도…….]

    귓가에 스미는 요원의 목소리가 마치, 듣기 좋은 선율의 자장가와도 같아서 갑자기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마찬가지예요.]

    무거운 눈꺼풀이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나도 무경 씨가 진심으로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오자마자…….]

    뒷말을 더 자세히 듣기 위해 자꾸만 가라앉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밀어 올렸다.

    [……안아주세요. 한 번으론 부족하니까 여러 번…… 이면 더 좋고.]

    작게 떨어진 무경의 잇새로 아, 침음 같은 낮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또 이런 식으로 응용을 해주시나.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안다는 말은 꼭 채요원을 위해 탄생한 말 같다.

    시선을 비스듬히 내린 무경은 금세 팽팽해진 제 아래를 깔아보며 기가 찬다는 듯 킥, 웃었다.

    이야, 이젠 하다 하다 전화만으로도 선다.

    “채요원은 참.”

    내가 꼴리는 포인트를 너무 잘 안다니까.

    다시 가늘게 좁혀진 남자의 검다 못해 서슬 퍼렇게까지 느껴지는 눈동자 속에 붉은 욕망이 피어올랐다.

    “자기야.”

    입꼬리를 유연하게 휘어 화려한 미소를 지은 무경이 대놓고 물었다.

    “오빠가 지금 넣어줄까.”

    여자를 갈망하는 정직한 육체만큼이나 남자는 여전히 야했고.

    [거기에서…… 어떻게요?]

    그런 남자에게 뒤지지 않는 여자는 여전히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자기 손.”

    그래, 맞아. 우리는 말이야.

    “아래로 내려 볼래요?”

    1년 하고도 5개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했기에 더욱 특별했을지도 모른다.

    ***

    한동안의 긴 적막이 흐르다가 요원이 가까스로 침묵을 깼다.

    [제 손을…… 왜요?]

    “안아주려고.”

    [음…… 그러니까 제가 조금 이해가…… 안 되는데요.]

    요원은 여전히 돌직구로 때려 박아야 이해를 했기에, 무경은 이젠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욕조 옆 창밖을 응시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폰섹 하자고. 이래도 몰라?”

    [포…… 네?]

    “우리 둘 다 욕구가 꽤 쌓인 것 같은데 풀어야 하지 않겠어요?”

    [욕구가 쌓인 건 맞는데요. 저는 그거는 좀…… 그래요.]

    “왜. 부끄러워?”

    [부끄러운 건 둘째 치고요.]

    요원이 반대편에서 차분하지만 적나라한 한숨을 내쉬는 것이 느껴졌다.

    [자꾸만 제 직업을 망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순경한테 폰섹을 하자니요. 저도 직업 사명감이 있는 사람인데 왜 자꾸 나를 이상한 사람을 만들고.]

    창밖에서 시선을 거둔 무경이 미간을 찡그리며 더욱 적나라한 한숨을 내쉬었다.

    “당최 이해를 해보려고 해도 정말 이해가 안 되네. 대체 애인 사이에 직업 사명감이 왜 필요하나.”

    무경이 운을 뗀 순간부터 요원은 이미 직감했다.

    “채 순경 나랑 불륜이야? 우리 원조예요? 채 순경 나한테 돈 받고 섹스해? 불법적인 관계야, 우리가?”

    그는 논리 없이 받아치며 반드시 자신을 설득할 것이다.

    [왜 또 이야기가…… 거기까지 가요.]

    “내가 너를 이상한 사람 만들었다면서. 너랑 나랑 나쁜 짓 하는 거 아닌데 왜 자꾸 그러는 거야. 사랑하는 사이에 폰섹이 나쁜 거야? 내가 알려줬지. 우린 우리의 감정의 최소치를 몸으로 표현하는 것뿐이라고. 우리 애 아니잖아.”

    [으, 또 그 소리. 듣기 싫어…….]

    요원은 소심한 반항을 해보았지만 무경은 이미 알고 있었다.

    “듣기 싫으면 그만 튕기고 내려 봐.”

    그녀와 오늘 어떻게든 폰섹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하다가 영 아닌 것 같으면 그때 관둬도 늦지 않잖아.”

    요원의 대답을 기다릴 여유가 없는 무경은 욕조에 머리를 뒤로 더 기대며 눈을 감았다.

    “중지부터 시작하자, 자기야.”

    젖은 머리칼에서 뚝뚝 흐르는 물줄기가 그의 이마를 타고 뺨을 타고 목을 타고, 땀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넣어 봐요. 내가 늘 하듯이.”

    눈감은 남자의 젖은 얼굴은 의연해 보이기까지 하였으나 그 아래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입 벌려봐. 내 혀가 채 순경 혀를 빤다고 생각하면서 손가락도 왔다 갔다 하면서.”

    거칠 것 없는 저렴한 말을 쏟아내는 남자의 눈 감은 세련된 옆태는 마치, 클래식의 역사에 관해 설명하는 고고한 귀족 같았으나 그 아래는 고고함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허리도 같이 흔들고.”

    [변태…….]

    “다른 손으론 가슴도 좀 주무르고.”

    [완전 변태…….]

    “신음도 뱉고 하면서.”

    [진짜 변태…….]

    변태만을 외치는 건너편에서 밭은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뱉은 숨이었을지도.

    아, 넣고 싶어 미치겠네.

    습기에 축축해진 머리칼을 조금 갈급한 모양새로 쓸어올리면서 무경은 다시금 시선을 제 아래로 뚝 떨어트렸는데, 조금 전보다 더욱 피가 몰려 단단해진 제 남성성을 확인하면서 픽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던 것도 같다.

    그냥은 가라앉을 것 같진 않고 찬물로 식혀야 하나. 그 짓도 씨발 하루 이틀이지, 오늘은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너도 야한 말 좀 뱉어보라고 해볼까? 그리고 잡고 흔들어?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젓는다. 거부감을 주기는 싫으니.

    그렇다면 결국에 남은 답은 하나였다.

    그 하나뿐인 결론에 다다르니 갑자기 무언가가 굉장히 억울해졌다.

    나는 왜 애인이 있는데도 넣지를 못하고 인도라는 먼 타지에서 혼자 딸이나 쳐야 하나, 하는 생각에.

    “자기야.”

    후, 짜증이 깃든 손으로 제 눈가를 가린 무경이 혼잣말하듯 이런 말을 낮게 중얼거렸다.

    “존나 빨고 싶어.”

    아, 요원은 그런 남자의 음담패설에 곧장 반응을 보였고 무경은 애가 타다 못해 이젠 허탈감까지 느끼는 얼굴로 고개를 아래로 푹 떨어트려 좌절했다.

    정작 좌절해야 할 것은 따로 있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 밤, 무경은 이 최고급 욕실에서, 위에서부터 떨어지는 찬물 아래에서 홀로 처량하게 열을 식혀야만 했다.

    한 번 흔들 땐 씨발을, 두 번 흔들 땐 존나 인도 씨발을 짓씹으면서. 그렇게, 아무런 잘못도 없는 한 국가를 탓하면서.

    사랑.

    나는 너와 1년 하고도 5개월째, 여름의 태양만큼이나 뜨거운 사랑을 하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