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107화 (외전) (107/116)
  • 외전 1화. 여름에 만나, 그리고 겨울

    우연히 기사를 하나 보았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방송계에 진출한 세향 홀딩스 손녀 최승아가 충격 고백을 했는데, 요즘 눈이 가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연예인은 아니다.

    포털에 최승아를 검색해 나이를 확인해보았다.

    이제 스물다섯. 만개한 꽃처럼 예쁜 나이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까불고 있다, 생각하며 요원은 주머니에 핸드폰을 꽤 신경질적으로 욱여넣었다.

    이 기사에서 언급된 ‘눈이 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처음이 아니었고 그때마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유리천장 너머의 세계에 사는 남자와 연애하면 이러한 일은 어차피 숙명같이 따라붙는 것들이니, 그러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래. 받아들이자고.

    그렇게 마음을 먹었음에도 불구, 요원은 이러한 일을 숙명처럼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심란함 속에 빠져 그저 허우적거렸다.

    “여기 자장면이요.”

    팔각정 사장이 없는 팔각정에 들어선 요원이 순경 모자를 벗으며 자리에 몸을 앉혔다.

    턱을 괸 채로 창밖 너머의 풍경을 가만 응시하면서 그 남자를 떠올렸다. 지금쯤 인도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제 남자를 떠올렸다.

    한국엔 겨울이 찾아왔고 그 남자와 연애한 지 1년 하고도 벌써 5개월.

    유독, 생각이 많은 겨울이다.

    ***

    인도의 현 날씨는 한국과는 달리 뜨거운 여름이었다.

    더운 날씨도 날씨지만 최악의 공기 질이 사람의 숨을 턱턱 막히게 했고 최악의 공기 질도 공기 질이지만 빵빵! 빵빵! 빵빵! 사방에서 쉬지 않고 들려오는 클랙슨 소리가 청각에 예민한 남자의 짜증 지수를 한껏 끌어올렸다.

    남자는 미국에서 열리는 최대 규모의 유통업 박람회 참관 후 곧장 인도로 날아왔다.

    올해의 유통 업계 핵심은 첨단 기술인 인공지능 시스템과 연관이 있었는데, 쉽게 말해, 물건을 운반하는 로봇이라든가 물류 센터 내 재고를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시스템 등 말이다.

    그래서 남자는, 인도에서 열리는 첨단 기술 관련한 박람회 참관 및 인도 지사 방문 차원에서 인도에 머물렀다.

    벌써 해외 출장길에 오른 지도 4주란 시간이 흘렀으니, 이 말인즉슨, 제 여자를 4주째 보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남자가 총수 자리에 앉고 나선 인도 지사가 눈에 띄게 변하였다.

    동녘 그룹의 해외 지사 중, 가장 성과 없고 희망 없던 곳이 바로 여기 인도 지사다.

    사실, 인도 시장에서 성공하는 건 동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기업에겐 어려운 일이다.

    하해경 회장은 생전에 희망 없는 인도 지사를 진작 포기했고 철수를 고려했던 것으로 안다.

    그래서 인도 지사는 좌천 용도로 이용되곤 했었는데 남자는 조금 달랐다.

    인도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이곳에 오히려 흥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오기도 생겼고 집념도 생겼다. 도전하고 싶은 욕구, 정복해보고 싶은 욕구.

    하태경이 남자를 무모하다고 표현하는 데엔 아마 이러한 남자의 성정이 한몫했을지도 모른다.

    물류 1센터 내를 감찰하는 남자의 뒤를 주재원들의 조심스러우면서도 바쁜 발걸음이 내내 쫓았다.

    뚜벅뚜벅, 거침없던 걸음이 한 곳에 갑자기 멈추어 서자 주재원들의 발에도 급하게 제동이 걸렸다.

    중간에 멈추어 선 남자가 물류 센터 내를 다시금 휘이- 살폈고 주재원들은 긴장된 낯빛으로 그의 우월한 뒤태를 바라보았다. 물류 센터에서 작업 중이던 현지 직원들 역시 피지컬 좋은 남자를 적나라하게 훑었다.

    주재원들과는 다른 무례한 시선이었지만 여기 사람들은 그게 잘못된 것임을 모르는 것 같다. 인도 어딜 가나 이러한 시선들이 남자에게 자석처럼 들러붙었으니.

    이 더운 날씨에도 완전하고도 완벽한 슈트 차림을 장착한 이유는, 이제 자신이 곧 동녘을 대표하는 얼굴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복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안전모를 쓴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현지 직원들을 똑같은 시선으로 훑었다. 역시 무례한 시선이다.

    저에게 까딱 인사하는 현지 직원들을 검은 시선으로 조이면서 남자는, 특유의 고저 없는 음성을 뱉었다.

    “지금 내 뒤에 있는 주재원이 총 몇 명이에요.”

    “저 포함 총 열한 명입니다.”

    현장 감독이 얼른 나서서 대답했다.

    “현장 분위기가 참 마음에 안 드네요.”

    남자가 눈매를 살풋 찡그렸고 기겁한 현장 감독이 남자의 옆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서서 조심히 물었다.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열한 명이라면서.”

    남자가 제 곁에 선 현장 감독을 엇비슥이 깔아보며 미소 지었다.

    “여러분들이 대답해 봐요. 모르면 말 안 되고.”

    예상치 못한 지시에 당황한 것도 잠시, 열한 명의 주재원은 눈동자를 열심히 굴려 현장 내를 살폈고 남자는 안전모를 벗었다.

    “알아도 대답하고 몰라도 대답하고. 쉽잖아.”

    그러나, 그 누구 하나 대답을 쉬이 하지 못하는 상황은 이어졌고 안전모에 눌린 것 같은 머리칼 안쪽에 손을 찔러넣어 볼륨감을 살리던 남자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제 곁에 있는 그쪽은 현장 감독님이 아니신지.”

    “맞습니다, 회장님. 제가 총괄하고 있습니다.”

    “현지인들 교육은 잘하고 있어요?”

    “예. 확실하게 합니다.”

    “우리 동녘은 기본을 중시하는 기업인데 현장 감독님은 현장에서의 기본 교육이 뭐라 생각하시는지.”

    “현장에서의 기본은 안전입니다.”

    안전, 이란 막힘 없는 대답에 남자가 조금 웃었던 것도 같다.

    “그래요? 그렇습니까? 안전이 맞아요?”

    아는 지식도 상대가 확신하냐 되물어오면 그때부턴 혼란이 오는 거다. 특히, 상대는 자신이 몸담은 기업의 총수가 아닌가.

    “아, 안전 맞습니다.”

    현장 감독이 또 대표로 나서서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현장 감독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기본이라는 안전 교육은. 잘하고 있습니까?”

    “아주 철저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예.”

    남자는 거짓말처럼 미소를 거두었고 급격하게 낮아진 목소리가 현장 감독의 귀에 제대로 감겼다.

    “그런데 왜 경고를 안 줘.”

    “……예?”

    “나 지금 안 쓰고 있잖아.”

    크게 떨리는 현장 감독의 눈을 바라보면서 남자는 안전모를 까딱 흔들었다.

    “……아.”

    “나만 안 썼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들릴 듯 말 듯 한 한숨과 함께 센터 내를 다시금 휘- 훑던 남자가 한 걸음 두 걸음, 근처의 현지 직원들에게로 걸음을 옮겼고 주재원들의 곤혹스러운 시선이 그의 뒤를 가쁘게 좇았다.

    허리를 굽힌 남자는 대뜸 한 곳으로 팔을 뻗었는데, 컨베이어 아래에 숨겨진 안전모 몇 개를 들어 올렸다.

    놀란 주재원들의 시선이 현지 직원들의 머리 위로 황급히 향했다.

    그들의 머리 위에 안전모가 없음을 뒤늦게 확인하곤 망했다, 하는 얼굴로 동시에 입술을 꽉 깨물기도 한다.

    “내가 1센터를 도는 이 한 시간 동안 안전모 미착용 현장 인원만 열 명을 넘게 봤는데. 우리 동녘의 인재, 주재원 여러분들께선 눈이 다 없으신가?”

    안전모를 쥔 채로 성큼성큼, 주재원들에게로 발걸음을 옮긴 남자가 그들의 앞에 우뚝 멈춰 서며 뇌까렸다.

    “내가 볼 땐 있는데.”

    그들의 발아래로 안전모를 탕, 떨군 남자의 입술은 분명 호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으나.

    “서운하네요. 안전사고 나면 인도에서 셧다운인 거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들이.”

    웃지 않는 검은 눈으로 상대방을 살벌하게 기선제압 하는 이 남자는.

    “현장 인원들 전부 모아서 안전 교육 다시 하세요.”

    여전히 동녘 그룹 내에서 검은 재규어라 불렸다.

    물류 2센터 옆, 식당 건물로 향한 무경과 태호는 한국식 백반을 먹었다.

    조금 늦은 점심이었다.

    차태호 실장은 여전히 동녘 총수가 된 무경의 오른팔로 활동 중이었고 파격 승진은 덤이었다.

    무경의 뒤를 지키는 그림자 비서실장 5인 중, 가장 우위를 선점하고 있었으니.

    “속은 괜찮으십니까? 어제 과음하셨잖습니까.”

    “죽겠어요.”

    태호가 핸드폰 액정을 툭툭 터치하는 그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여전히 위가 약한 남자는, 해외에선 시한폭탄을 달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연애를 하고 나선 위경련이 오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가 위경련을 앓던 사람임을 어쩔 땐 망각할 정도로.

    요즘 담배를 덜 태우셔서 그러나? 생각도 해보았지만 마음먹고 금연을 했을 때에도 툭하면 위가 뒤틀리던 사람이 아닌가.

    그러니 결국 답은 하나였다.

    “인도 지사엔 술고래들만 모였나. 나도 마신다면 꽤 마시는 사람인데. 이야, 다들 세데?”

    무경의 과음 소식을 접한 영양사가 메뉴에 급하게 추가한 칼칼한 북엇국을 떠먹으면서 무경은 중얼거렸다.

    피곤하긴 한지 남자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조금 탁하게 느껴졌다.

    “회장님께서 이렇게 인도 지사도 친히 방문해주시고 신경 써주시는 모습 보여주시니, 직원들의 사기도 덩달아 올라간 것 같습니다.”

    “사기는 무슨. 다들 죽을상 하고 앉아있던데.”

    “그야, 마음은 다들 그렇지 않은데 워낙 대단한 분이시니까요.”

    “차 실장님은 뭔 아침부터 그렇게 립서비스를 해요.”

    “예?”

    “그러지 마요.”

    쌀밥엔 손도 대지 않은 무경이 숟가락을 탁, 내려두며 뜻밖의 질문을 했다.

    “차 실장님은 프러포즈를 어떻게 하셨어요.”

    “예, 저는 프러포즈를. 예?”

    막 숟가락을 쥔 태호가 눈을 치떴다. 무테안경 뒤 놀란 눈동자를 가만 마주하면서 무경은 다시 숟가락을 들어 북엇국을 떴다. 무슨 문제 있냐는 듯 눈썹을 한번 들었다 내리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회장님. 설마?”

    “맞아요. 생각하는 그거.”

    태호의 입술이 작게 떨어졌고 무경은 연신 북엇국을 떠먹으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해줘야 할지를 도통 모르겠어. 조용하고 차분한 걸 좋아할 것 같긴 한데 또 어떨 때 보면 그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

    “참 어렵네요. 이러나저러나 욕먹게 생겼으니.”

    입으론 불평을 뱉어도 제 여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입가에 번지는 미소까진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태호는 자신이 마치 프러포즈라도 받은 사람인 양 벅찬 얼굴을 해서 말했다.

    “온 마음을 다해 축하드립니다.”

    “뭘 또 온 마음까지 다하고 그래. 그런 건 됐고 대답이나 해봐요. 차 실장님은 프러포즈를 어떻게 했어요.”

    “아. 저요? 저는…….”

    숟가락을 내려둔 무경이 뒷말을 흐리는 태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게 그러니까…… 저 같은 경우는 말이죠……?”

    태호는 평소와는 달리 당황한 모습을 여과 없이 표출하듯 제 목 언저리를 긁적였다가 뒷머리를 긁적였다가를 반복했다.

    그의 수상쩍은 행동에 한쪽 눈썹을 가벼이 올린 무경이 한숨을 쉬며 상황을 파악했다.

    “프러포즈 안 하셨구나, 우리 차 실장님.”

    “아…… 예.”

    죄송합니다, 태호가 사과하며 고개를 뚝 떨어트렸고 무경은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그게 왜 나한테 죄송할 일입니까? 아내분한테 미안해할 일이지.”

    “죄송합니다.”

    “가만 보면 우리 차 실장님도 참. 좀 그렇네요.”

    “예. 제가 좀 그렇습니다.”

    “나한테 하는 거 반만이라도 아내분께 좀 해주세요. 결국, 곁에 남는 사람은 자식새끼도 아니고 부모님도 아니고 내 아내, 내 남편이라고 하잖습니까.”

    “예. 마음속에 깊게 새기겠습니다.”

    총수 자리에 오르면서 무경은 잔소리가 늘었는데 괜히 무안해진 태호가 속히 화제를 돌렸다.

    “라주연 상무님께 여쭤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라 상무?”

    “예. 여자니까 여자 마음을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음, 그런가?

    무경이 제 아래턱을 문지르며 그 제안에 동했다가 이내 고개를 젓는다.

    라주연은 무경이 회장직에 오르자마자 회장 오빠, 회장 오빠, 라고 불러댔는데 이건 무슨 다방도 아니고 자기야, 보다 더 싫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도움 되는 사람이 하나 없나.

    무경이 낮은 한숨과 함께 다시 느른하게 팔짱을 낄 때였다.

    핸드폰 액정이 순간 번쩍하더니 이런 메시지가 액정에 튀어 올랐다.

    -너무 보고 싶어요.

    상대의 메시지를 비현실적인 것 보듯 쳐다보며, 눈에 꼭꼭 새겨넣으면서, 심장의 뻐근함을 느끼면서, 핸드폰을 집어 든 무경이 답장을 보내려 하였으나 상대가 한 박자 더 빨랐다.

    -저 지금 바쁘니까 답장은 하지 마세요. 제가 다시 연락할게요.

    아주 가지고 놀아라.

    미간을 찡그렸던 무경이 이내 설핏 웃으며 손에서 핸드폰을 내려두었다. 아무렴 어떤가 싶다.

    너는 내가 보고 싶지. 나는 너로 인해 애달아.

    언젠가 내가 싫어질까. 나 아닌 다른 새끼가 좋아질까. 내가 한국에 없는 사이, 그 떡집 새끼가 개수작을 부리진 않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데, 애가 타는 이 마음은 언제야 끝이 나나. 결혼이란 법적 테두리 안에 너를 끌고 오면, 그러면 내 마음 그땐 조금 편안해지나.

    머릿속은 호텔 내 금고 안에 있을 반지를 떠올리면서도, 잘 훈련받은 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주재원들의 인사를 받았다.

    반지를 가지고 온 것은, 예행연습을 위해서다. 어떻게 주는 게 가장 기억에 남을까 하여.

    무경과 요원의 연애 1년 하고도 5개월.

    여름에 만나, 다시 여름을 지나, 그리고 겨울.

    무경은 동녘 그룹의 총수로서, 요원은 여전한 백야마을의 지킴이로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기에 자주 만나야 일주일에 한 번, 혹은 이 주일에 한두 번이 전부였고.

    어떤 날엔 무경이 백야로, 어떤 날엔 요원이 서울로.

    지금처럼 무경이 장기 출장길에 오르게 되면 더 만나지를 못하고.

    보고 싶고. 하고 싶고. 빨고 싶고. 그립고.

    남자는 이토록 항상 요원을 생각했다. 요원만을 생각했다. 자신의 그녀만을 생각했다.

    여전히 요원을 생각하는 남자의 심장은 작열하는 태양에 절여진 것만큼이나 뜨거웠고, 요원을 생각하는 남자의 머릿속은 도파민이란 물질로 가득했다.

    사랑.

    나는 너와 1년 하고도 5개월째, 봄꽃만큼이나 알록달록한 사랑을 하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