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104화 (104/116)
  • 104화. 찬란한 소생(蘇生)

    무정한 시간은 자꾸만 흐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요원의 걸음 역시 점차 빨라지고 고갯짓은 더욱 분주해졌다. 그래도 남자를 찾을 수가 없어 절망적이었다.

    여전히 남자는 전화에 응답을 않고.

    여기까지 오면서 굳세게 다잡았던 마음은 자꾸만 무너져내리려 한다.

    이제 정말 다신 남자를 볼 수 없을까 봐.

    그러다가 또 그가 미워지려 한다. 자기 마음대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하무경 씨가.

    왜 멋대로 내 인생에 나타나서. 왜 잘살고 있는 내 마음속에 멋대로 들어와서. 그렇게 멋대로 헤집어놓고. 왜 그는 또 멋대로 떠나려 드는가.

    눈 깜짝할 사이에 박혀 들어와 내 세상을 온통 찬란하게 물들여놓고.

    이제 그를 미워할 수도 없으니, 나는. 이렇게 남자와 헤어지게 되면,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핸드폰을 귓가에 내내 붙인 채로 공항 내를 뛰어다니는 창백한 요원의 이마 위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뚜우. 뚜우. 뚜우.

    “하무경 씨. 하무경 씨. 하무경 씨.”

    정신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며 출국장을 샅샅이 뒤지듯이 돌아다녔다.

    뚜우. 뚜우. 뚜우.

    “하무경 씨. 하무경 씨. 하무경 씨. 하무경 씨.”

    다시는 부를 수 없는 이름이 될까 봐서 마음이 무겁다. 두렵다. 초조하다. 기억 저편으로 영원히 사라지는 이름이 될까 봐서.

    “하무경 씨. 하무경 씨. 하무경 씨.”

    뚜우. 뚜우. 뚜우.

    “하무경 씨. 하무경 씨!”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주변을 빠르게 두리번거리는 얼굴은 딱 울기 직전이었다.

    그녀의 곁을 지나치던 인파가 그녀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순경복을 입은 채로 누군가를 애타게 찾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무경 씨!”

    탁.

    앞을 보지 못한 요원이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치며 손에 그러쥐고 있던 핸드폰마저 저 멀리로 떨어트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상대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하고 사과하며 막 허리를 굽혀 핸드폰을 쥐려다가 그대로 무너지듯 주르륵 주저앉아버렸다.

    뜨거운 마음은 부정하였으나, 차가운 머리가 제게 냉정하게 조언했다.

    남자는 떠났다고. 그러니 그만 잊으라고. 잊어야 한다고. 그래야 네가 산다고.

    아. 남자는 떠났구나. 또 이렇게 우리는 엇갈렸구나. 우리는 정말, 안 될 인연이구나. 그렇구나.

    “하아…….”

    한숨이 흘렀다. 말도 안 되게 구슬픈 한숨이었다.

    세워진 무릎 위에 이마를 기대며 절망 섞인 탄식을 흘려보냈다.

    꽤 오랜 시간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부동자세로 있던 때였다.

    요원의 어깨가 붙잡혔고 누군가의 손에 의해 속절없이 상대의 품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하아!”

    막혔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내듯이 요원의 잇새에서 그런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굳이 얼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체취만으로도 알 수 있다.

    자신을 끌어안은 이 남자가 대체 누구인지.

    “나 참 진짜. 설마 설마 했다.”

    큼직한 손이 제 뒤통수를 다정하게 쓸어내린다. 익숙한 체온이다.

    “여기에서 날 찾으면 안 되지. 나 같은 사람은 들어가는 비밀 통로가 다 따로 있는데.”

    턱이 가볍게 떨려왔다.

    입술을 꾹 깨물자 요원의 눈에서 거짓말처럼 눈물이 솟아올랐다. 눈을 한 번 깜빡였더니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눈물이 구슬처럼 굴러떨어지기 무섭게 눈 안은 금세 또 그렁그렁해졌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저 비밀 통로까지 다 들리더라. 내가 안 올 수가 있어야지?”

    눈물은 자꾸만 주르륵 흐르고 요원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울음소리에 말소리가 다 먹혔기 때문이다.

    “채 순경. 울어?”

    무경이 제 품에 얌전히 안겨있는 요원을 떼어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왜 울어? 설마 나랑 헤어지는 게 슬퍼서? 이야. 이거 정말 영광인데?”

    24시간, 365일 내내 멀끔한 차림의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또 상냥하게 웃어준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하무경 씨…….”

    화내려고 했다. 분명 따지려고 했다.

    이렇게 또 말도 없이 멋대로 떠나버리면 남겨진 나는 뭐가 되냐고.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았냐고. 왜 사람이 매사 그렇게 이기적이냐고.

    이건 날 위하는 것도 뭣도 아니라고.

    그래서 입을 벌려 말했다.

    “사랑해요.”

    미소 짓고 있던 무경의 얼굴이 빛이 바래듯 점차…….

    “사랑한다고요.”

    그렇게 그 미소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상무님. 이제 가셔야…… 아. 채 순경님. 와주셨군요.”

    무경의 좌천 길을 보좌하기로 한 태호가 여권과 항공권을 쥔 채로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마음이 다급해진 요원이 무경의 셔츠 깃을 꽉 움켜쥔 채로 그의 귓가에 때려 박듯이 다시 한번 차근차근 일러주었다.

    “사랑해. 내가 하무경 씨를요. 사랑한다고요.”

    미소를 잃어버린 무경의 얼굴은.

    “…….”

    그러니까 요원을 비스듬히 깔아보는 무경의 얼굴엔 표정 변화가 하나 없었는데 어찌나 무표정인지 냉담해 보이기까지 하여 요원을 당황하게 했다.

    “사랑하는데. 나 정말 사랑하는데.”

    믿지 않는 귀신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처럼 무경의 표정이 딱 그랬으니.

    “사랑해.”

    태호가 되레 고백을 받은 사람과도 같은 얼굴이었으니.

    “내가 정말 사랑하는데, 하무경 씨를.”

    그래서 요원은 한 번만 믿어달라고 애원하듯이 그의 옷깃을 더 꽉 부여잡고 그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서브리미널인지 뭔지. 나에겐 하무경 씨가 역치하였어요. 나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내 무의식에 완전히 각인되었다고요. 더는 떨쳐낼 수 없어요.”

    “…….”

    “사랑해요.”

    침묵의 시간이 흐른다.

    초조한 마음으로 시계를 힐끔힐끔 확인하던 태호가 요원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조심스레 껴들었다.

    “상무님. 진짜 가셔야 합니다.”

    무경은 비현실적인 세상 속에 혼자 뚝 떨어진 사람과도 같은 얼굴로,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아직 이해를 못 한 표정으로, 딱 그런 얼굴로 요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해요, 하무경 씨.”

    붉게 충혈된 여자의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면서도 여전히 무경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무경은 어쩌면 그 모든 게 짜증스러워졌을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고백을 들어버린 자신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여자도, 빨리 가자 재촉하는 태호도, 여자를 두고 가야만 하는 제 상황도.

    그냥 그런 모든 것들이 짜증스러워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경은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

    여전히 제 아래에 있는 요원을 몇 초간 더 딱딱하게 내려다보던 그가, 그녀의 정수리 위를 가볍게 헝클어트리듯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조금 피곤한 낯빛으로 뒤돌았다.

    그리고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상무님!”

    “하무경 씨!”

    당황한 태호가 자신을 쫓아오고 요원이 뒤에서 자신을 불렀지만, 무경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무경 씨, 하무경 씨, 제 이름이 아득하게 들려왔지만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나아가는데 모래 속에 발이 푹푹 빠지는 듯해서, 남자는 사막 위를 걷고 있는 기분을 받았다.

    웅웅 귓속을 맴도는 여자의 목소리 때문에 마치 동굴 안을 향해 가는 기분마저 들었다.

    “하무경 씨! 안 가면 안 돼요?”

    요원의 용기 있는 외침이 공항 내를 쩌렁쩌렁 울렸다.

    “혼자서 그러지 말고! 우리가! 우리 백야가! 하무경 씨를 어떻게든 도울 테니까! 그러니까, 하무경 씨!”

    멀어지고 있는데 그럴수록 더욱 크게 들렸다. 그러나, 무경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앞을 향해 걸어 나아갔다.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공항 끝을 향해 가면서 무경은,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분했을지도 모른다.

    “가지 말아요…….”

    그 자리에 홀로 남겨진 요원은 점차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무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사랑하니까…….”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 괜찮지 않아서.

    “내가 정말 사랑하니까…….”

    그런 복잡한 감정들이 파도처럼 한꺼번에 자신을 덮치면서 요원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엉엉 울었다.

    그 자리에 남아 오랜 시간 울었다.

    짧고도 찬란했던 사랑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기약 없는 이별이었다.

    .

    .

    .

    [변곡점 變曲點]

    “하무경 상무님. 저희 항공사를 이용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가시는 길 불편하시지 않게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퍼스트 클래스를 찾아온 사무장이 이마를 괴고 앉아있는 무경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응을 보이지 않는 무경 때문에 태호가 사무장을 향해 애써 미소 지으며 대신 묵례했다.

    사무장이 그제야 똑같이 묵례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까지 여러분을 모시고 가는 기장입니다. 항로상의 날씨는 대체로 양호할 것으로 예상되며…… 좌석에 앉아 계실 때는 여러분의 안전을 위하여 좌석벨트를 메어주시고……」

    기장 방송이 흘러나오고 이륙 준비를 위한 승무원들이 이코노미석의 통로를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반면, 퍼스트 클래스에 배치된 승무원은 메뉴판을 가져와 승객들에게 건네며 차분하게 묻는다.

    “샴페인이나 와인이 필요하시면 말씀 주십시오.”

    특히, 동녘 그룹의 막내아들을 모시게 된 담당 승무원은 그에게 더욱 신경을 쏟았다.

    “차태호 실장님.”

    무경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이륙 준비가 모두 다 끝난 비행기가 활주로 위를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아까 채요원이 나한테 뭐라고 했어요?”

    “예?”

    “아까 채 순경이…….”

    내내 이마를 괴고 있던 손을 치워낸 그제야 무경의 눈빛이 드러났다.

    “나한테 뭐라고 했냐고.”

    안 그래도 검은 눈빛이 더욱더 짙어진 듯하여 태호가 순간 흠칫거릴 정도였다.

    “아…….”

    태호가 머뭇거리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상무님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들은 것 같습니다.”

    “들은 것 같다고, 아님 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맞아요? 내가 환청을 들은 게 아니라?”

    “네. 제대로 들으신 것 같습니다.”

    “들으신 것 같다고, 아님 들으셨다고.”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사랑. 사랑한단 말이지…….

    여전히 무경은 풀기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사람처럼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화제를 전환했다.

    “근데 하태경도 하가경도 배웅을 안 나왔네요?”

    “예? 아. 예.”

    “전화 한 통도 없었죠?”

    “예. 그렇습니다.”

    하. 무경의 잇새에서 차가운 웃음이 흘렀다.

    아니, 씨발. 동생이 인도로 좌천을 나간다는데 이것들은 어떻게 된 게 연락 한 통이 없어? 니들은 진짜 상도덕이 없다, 이 썅것들아.

    내가 얌전히 물러나 준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잘 다녀오란 연락 한 통을 안 해?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없어? 니까짓 것들이? 감히?

    ‘사랑해요.’

    귓전을 찰나에 스치는 여자의 음성은 분노에 치밀었던 무경을 또 한 번 고독한 상념에 잠기게 했다.

    ‘사랑한다고요.’

    사랑.

    ‘사랑하는데.’

    잠깐.

    ‘나 정말 사랑하는데. 내가 정말 사랑하는데, 하무경 씨를.’

    사랑한다고? 누가.

    ‘사랑해. 내가 하무경 씨를요. 사랑한다고요.’

    채요원이? 내가 아는 그 채 순경이 나를? 내가 사랑하는 그 채 순경이 나를?

    ‘사랑해요, 하무경 씨.’

    그래? 채요원이 나 하무경을 사랑해?

    ‘사랑해요.’

    그런데 난 왜 지금 여기에 씨발 처앉아있나.

    자신에게 궁극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하무경 씨! 안 가면 안 돼요?’

    그러게? 내가 왜 가? 내가 왜 좌천이 돼? 나는 잘못한 게 하나 없는데 씨발 내가 왜 좌천이 돼?

    모럴적으로 살아보겠다는 게, 다 같이 상생하겠다는 게,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야?

    난 존나 씨발 억울해. 이렇게는 억울해. 가려면 내가 아니라 능력 없는 니들이 나가야지?

    내가 씨발 왜 가. 천하의 하무경이 왜 좌천을 나가.

    ‘나는 싫네. 그냥 쥐여주긴 싫네. 언젠가 니 힘으로 가져가라잉.’

    ‘사랑해요, 하무경 씨.’

    하 회장의 목소리와 요원의 목소리가 뇌리를 동시에 교차한 그 순간에.

    그래.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지금껏 혼란해 보이던 무경의 눈빛은 다시 견고해졌으며 비행기가 엄청난 속도로 활주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띵.

    벨트를 착용하라는 신호가 기내에 울리던 순간에 무경은 되레 벨트를 풀었다.

    “차태호 실장님.”

    그러고는 제 곁의 태호를 비스듬히 깔아보며 이상한 지시를 내린다.

    “비행기 좀 세워보세요.”

    “예?”

    “나, 내려야겠는데?”

    태호의 입술이 동시에 작게 떨어졌다.

    방금 전해 들은 황당무계한 말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남자의 눈빛 때문이었다.

    누구도 함부로 마주 볼 수 없는 검은 재규어의 눈빛이 소생했기 때문이다.

    하무경을 향한 채요원의 진심 어린 고백은, 하무경을 찬란하게 소생시켰을 뿐 아니라 동녘 그룹에 앞으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참이었다.

    그리고 하무경은 어쩌면, 내일 뉴스에 나올지도 모르겠다.

    제2의 땅콩 회항 버금가는 사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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