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1%
[ ※ 103-104 추천곡 : 에일리 – 잠시 안녕처럼 ]
무경이 본사를 정리하자마자 백운엔 수많은 하무경 상무 라인의 사람들이 다녀갔다.
직원급은 감히 백운에 발을 들일 수가 없으니, 그나마 하 회장과 대화 정도 나눌 수 있는 급의 사람들이 그를 찾았다.
그들이 하 회장 앞에서 부탁한 것은 단 하나였다.
하무경 상무 인도 좌천 건, 재고해 주십시오.
하 회장은 데크의 안락한 흔들의자에 앉아 황금소나무를 바라보며 단마디를 뱉었다.
“느그들 시방 모가지 다 잘리고 잡어 환장했냐잉.”
시간 차를 두고 하가경이 찾아왔다.
여러모로 정말 잘하신 일이란 말과 함께 기대에 찬 눈동자로 물었다.
“저는 아버지, 사장 자리 주실 거예요?”
그다음엔 격노한 정연이 다가와 한 시간가량을 떠들어댔지만, 하 회장의 귀엔 아무런 소리도 남은 것이 없었다.
하 회장은 피로한 눈을 감았고, 소리소문없이 찾아온 도현이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정연이 나가고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난 후다.
“건강은 좀 어떠세요, 회장님.”
하태경, 하가경도 묻지 않는 안부를 묻는 도현의 목소리엔 반응하듯.
하 회장이 주름진 눈꺼풀을 더디게 밀어 올리며 답했다.
“용건만 말해야.”
“회장님이 어떻게 이러세요. 제게 이러실 순 없어요.”
잠시나마 풀 죽어있던 도현의 낯빛이 금세 바뀌어 하 회장을 원망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시키시는 일은 뭐든 다 했습니다. 형에게 동녘을 주실 거로 생각했으니까요.”
하 회장의 앞에서 처음으로 격앙된 목소리를 꺼내 들었다.
“형을 위하는 일이라면 저 뭐든 다 했습니다. 형이 동녘을 원했으니까요.”
“형이 아니고 하무경 상무라 부르드랑께.”
이 와중에도 호칭을 바로잡는 하 회장이, 도현은 감정 없는 고철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좌천이라니요? 제 노력의 대가가 고작 좌천이라니요? 하태경에게 동녘을 주실 거였으면 제가 왜 여태 이러고 살았던 겁니까?”
“하태경이 니 친구냐잉. 건방지게.”
“친구 아닙니다. 저에겐 그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지요. 그래서 더 화가 나요. 그런 사람이 동녘을 쥘 거였으면 저 이렇게 안 살았어요.”
하 회장은 침묵을 지킨 채로 황금소나무에서 시선을 떼지를 못했다.
“제가 동녘을 위해 바친 세월. 하무경 상무를 위해 바친 세월. 아버지께서 그렇게 흘려보내신 제 세월. 모두 다 책임지세요.”
하 회장이 흔들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워 도현을 마주 보았다.
“내가 죽을 때가 되긴 된 모냥이다.”
마르고 작은 노인이었지만 눈빛 하나만은 여전히 볼만하다 생각했다.
“사방에서 똥개 새끼들이 몰려와가꼬 겁도 없이 이라고 짖어댄 거 본께.”
지팡이 위에 두 손을 얹고 있던 하 회장이 손가락 한 개를 까딱거렸다.
파블로프의 개인 도현에겐 그 손짓이 일종의 종인 셈이었다.
그 신호에 즉각 반응하듯 도현은, 의지와는 달리 하 회장의 앞에서 고개를 떨어트렸다.
“하도현이는 지금부텀 내 야글 잘 듣더라고.”
노곤하고 고단함을 뒤로한 단단한 목소리가 도현의 귀에 흐른다.
“나가 세 사람에게 일부 지분을 증여해주었다. 그 결과, 현재 하태경의 그룹사 지분율 18.13%. 하가경 17.62%. 하무경 17.14%가 되었다.”
도현이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기를 돌리던 때에 하 회장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그까정 다 들린다잉.”
제 앞에서 처음으로 웃어준 아버지였으며 도현은 그 미소를 신기한 것 쳐다보듯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았다.
“맞다. 하태경과 하무경의 차이는 0.99%다.”
하 회장이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황금소나무로 시선을 돌렸다.
“그라고 나한티 남은 지분은 인자 단 1%다.”
열기를 품은 바람이 불어왔다.
눈을 감은 하 회장은 그 바람을 한껏 느끼며 아무도 예상 못 했던 말을 꺼냈다.
“나가 그 1%를 하도현이 너한티 증여해줄 거신데.”
도현의 얼굴에 전엔 없던 복잡미묘한 감정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 지분은 니가 힘을 실어 주고 잡은 사람한티 실어 주면 된다.”
무경을 위한 희생을 또 강요하는 것 같기도, 그간 동녘에 쌓인 설움을 이런 식으로 풀라고 결정권을 쥐여주는 것 같기도.
의중을 잘 모르겠는 도현은 생각에 잠겼고 하 회장은 그 생각에 힘을 실었다.
“그깟 시골 가시나 터전은 지켜주고 잡고, 죽어가는 애비의 마지막 소원은 못 들어준께 미안하고, 내가 인도로 꼭 나가라 항께 나를 위한 효심으로다가 잠자코 나가는 거 아니냐, 저거시.”
하도현의 답이 늘 하나이듯 하 회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답은 하무경이다.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뒤로하고 보아도, 처음부터 끝까지 하 회장에게 답은 하무경이었다.
하무경이 아직 보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가족끼리 굳이 진흙탕 싸움하지 않아도, 자신이 그의 손에 이 회사를 굳이 쥐여주지 않아도, 하무경은 아주 손쉽게 이 회사를 쥘 수 있는 사람임을.
벌써 몇 년 전부터 그것이 가능했던 사람임을.
인도로 나가라는 자신의 지시에 따를 것이 아니라, 하무경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자신의 목을 꺾어도 됐었다.
오늘 감히 겁도 없이 회장을 찾아와 고개 뻣뻣하게 쳐들던 하무경의 수많은 사람을 보아라.
여차하면 회장까지 치겠다는 하무경 상무 사람들의 표정은 오금이 다 저릴 정도였으니.
감히 주인 앞에서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동녘의 개새끼, 하도현을 보아라.
그가 여태 섬기던 진짜 주인은 하 회장이 아니었으니.
인정에 약하다 그것이 하무경의 단점이라 늘 이야기했었는데, 그 단점이 결국은 그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자 강점임을.
그러니 하 회장은 자신을 실망시켰던 그 하무경에게 또다시 기대라는 걸 가져본다.
이번엔 그가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고, 현재 갇힌 생각의 틀을 깨고 스스로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그놈이 시방 눈에 머시 단단히 씌어가꼬 생각을 제대로 못 하고 있어야. 판단력이 솔찬히 흐려졌어잉. 원래 사내놈들이 다 그라제. 여자에 이게 회까닥 가블믄 이게 아예 나가부는 거여. 아주 멍청한 종족들이제.”
하 회장이 지팡이를 짚고 있던 손을 움직여 제 관자놀이를 툭툭 느리게 두드렸다.
“그래도 째깐만 기다려 봐라잉. 곧 정신 차릴 거시다.”
하 회장이 한숨과 함께 백운의 정원을 시야에 한가득 담으며 퍽 다정한 목소리를 읊조렸다.
“가만히 놔두면 지도 아차 하는 순간이 올 거시다. 늘 그래왔응께.”
비로소, 도현은 하 회장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그러니 하도현아. 그놈 정신 차리면 말이다. 그놈이 원하는 대로 해줘라잉. 네게 주는 마지막 임무다. 알아듣냐잉.”
아까와는 다르게 자세를 바르게 고쳐잡은 도현이 고개를 45도 각도로 숙이며 기꺼이 대답했다.
“무조건 그리하겠습니다.”
누군가는 도현에게 왜 무경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사실 미워하고 증오하고 원망하는 편이 더 납득되는 관계였기에.
무경을 고고한 황태자로만 살게 하려고, 하무경을 위해 제 손에 묻힌 오물만 얼마던가.
그럼에도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증오할 수 없는 이유는. 원망할 수 없는 이유는.
언젠가 하태경이 무경을 업어주었던 그 체온이 따스했고, 하가경이 무경에게 쥐여주었던 그 우유가 달콤하였듯이.
하무경이 도현에게 고개 뻣뻣하게 들고 밥도 먹고 계속해서 그렇게 살라고 해주었던, 그 말이 아직도 이렇게나 가슴에 박혀서. 이렇게나 가슴에 진하게 남아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들 하는데, 그 말 한마디로 하무경은 언젠가 제 손에 왕국을 거머쥐게 될지도…….
***
밤 9시가 조금 넘어 요원은 인천공항 제1 여객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반드시 시간 안에 도착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왔다.
오는 길에 동녘 그룹에 대해 검색해보았다.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이 있었는지 다시 되짚어보았다.
기가 막히게, 오늘 날짜로 여러 개의 기사가 터진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동녘 그룹 하해경 회장, 건강이 심상치 않다. 관련주 이상 없나?」
「동녘 그룹, 비상경영체제 돌입. 하해경 회장의 건강 악화와 관련 있나.」
「장남은 위대했다! 장남 손 들어준, 동녘 그룹 하해경 회장.」
「동녘家 ‘막내의 반란’ 이제 막 내리나.」
핸드폰을 귓가에 댄 채로 요원은 넓은 출국장 안을 두리번거리며 헤맸다.
여름 휴가 기간이라 그런지 출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요원은 한 사람만을 찾아 헤맸다.
뚜우. 뚜우. 뚜우.
그에게 전화만 몇 번을 걸었는지 모른다. 아마 50번은 넘게 한 것 같다.
신호음은 가는데 전화는 받지 않고 메시지를 보내도 응답은커녕 확인도 안 하는 남자는 끝까지 제멋대로 구는 이기적인 개자식이었다.
울고 싶었다. 이대로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그러나 남자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요원은 인파를 뚫고 또 뚫고, 헤매고 또 헤매면서 남자를 찾아다녔다.
남자를 찾아 헤매면서 남자를 떠올려보았다.
‘나 오늘은 진짜, 안 줄 거지.’
내가 아는 그 남자는 창피함을 모르는 것 같다.
‘오늘 밤, 달빛이 끝내주는 이 밤, 나의 것을 그대의 것에 맞춰 넣어도 되겠소. 뭐, 이런 걸 원하시나?’
내가 아는 그 남자는 때론 천진난만하게 웃을 줄도 안다.
‘너. 나 안 잡아? 왜 안 잡아? 야. 채요원 순경. 잡아. 나 잡아줘.’
내가 아는 그 남자는 보통은 남자다운데 때때로 보여주는 아이 같은 모습이 여자의 모성애를 꽤나 자극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그 남자는……
‘난 안 되겠네.’
‘미안해요. 내가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내가.’
‘너…… 나 싫어하지 마. 미워하지 마.’
‘나한테 복수하고 싶지. 그럼 해. 내가 방법을 알려줄 테니.’
내내 괴로워하고 있었구나.
그리고 하무경 씨는…….
‘제보해요. 동녘 그룹의 하무경 상무가 채 순경네 마을을 무력으로 빼앗으려 하고 있다고. 강제 철거 강행 직전이라고. 그깟 아웃렛 하나 때문에.’
‘한 명은 더러운 꼴 봐야 끝나. 알잖아. 그 더러운 꼴, 내가 보겠다고.’
‘동녘으로부터 지키라고. 네 마을, 백야.’
‘회장님 설득했어. 손 떼셨어. 다 해결하고 왔어. 백야는 이제 동녘으로부터 영원히 안전해.’
‘지킴이면 지킴이답게 그 마을 지키라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지금처럼.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말고.’
‘나중에 혹시라도 다른 데 빼앗기면, 우리 동녘이 아주 자존심이 상하다 못해 빡이 돌 것 같거든? 그러니 꼴 받게 하지 마요. 우리 아주 무서운 사람들이야.’
나를 위해 계속 희생하고 있었구나. 그 마음을 나는 계속해서 몰라줬고.
그래서 하무경 씨는…….
‘그럼. 너 아직 날 원망하니?’
내게 계속해서 온 힘을 다해 말하고 있었구나.
‘미워하는 건 아닐 거야. 나 그렇게 생각하면 될까?’
그렇게.
‘나와의 연애는 어땠어? 행복했어?’
애타게.
‘나는 딱 죽고 싶을 만큼 행복했거든.’
자기 좀 한 번만 봐 달라고.
‘나 좀 안아줄래?’
나름의 방식대로.
‘사랑해’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