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콰쾅!
남자가 떠났다. 남자가 작별 인사도 없이 마을을 떠났다.
늘 같은 수법인 줄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는 자신이 참 우습다.
그래도 더는 남자가 괘씸하지도, 밉지도 않았다.
남자가 떠나고 마을엔 비가 계속해서 내렸다. 벌써 이틀째였다.
장마가 온 건가?
요원이 우산을 살짝 뒤로 젖혀 운치 있는 백야마을을 시야에 담으며 동네를 거닐었다.
말도 없이 떠난 뒤로 남자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 어떠한 메시지에도 답 하나 주지 않는다. 이럴 땐 조금 미웠다.
끝을 정해두고 시작한 관계임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대체 무얼 기대한 걸까.
사랑한다던 남자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못 하던 내가, 남자와 수시로 연락하며 친구로라도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던가.
참 순진하기도 하다. 한편으론 참 못된 것 같기도 하고.
‘사랑해.’
떠나지 못한 남자의 음성이 공기처럼 주변을 맴돈다.
‘넌 나 사랑해?’
이틀간 잠도 못 이루고 그 질문을 수도 없이 곱씹어보았건만, 여전히 답을 잘 모르겠다.
내 감정을 내가 이리도 모르리라곤 전엔 알지 못하던 일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남자를 향한 내 감정을 처음부터 되짚어본다.
남자에게 처음 느꼈던 감정은 호감이었다. 그리고 설렘이었고. 감정이 짙어지나 싶다가 뒤통수를 세게 한 대 후려 맞았지?
그 뒤에 이어졌던 감정은 배신감, 분노, 환멸, 염증, 증오,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남자를 향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었던 건, 온 힘을 다해 남자를 미워하려 할수록 내가 더 미워졌단 것이다. 내가 더 지쳐갔단 것이다.
그래서 또, 남자를 미워하는 것을 멈추었더니 이어졌던 감정은 뭣 모를 연민, 애틋함…….
말로는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온갖 헝클어진 감정이 남자를 향했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을 더 모르겠다.
내가 지금 남자에게 느끼는 이 마음이 대체 무엇인지.
지금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나는 남자가 보고 싶다는 정도였다.
서울로 무작정 찾아가 볼까? 인사는 하고 헤어져야 하지 않겠냐는 같잖은 핑계를 들고.
서울에 올라가 연락을 하면 그래도 얼굴은 한번 보여주지 않을까?
커피 한잔 정도는 마실 사이는 되지 않나?
이상한 기대라는 것을 또 가져본다.
진흙 웅덩이를 밟아 더러워진 신발로 열심히 동네를 거닐던 요원이 우당탕거리는 잡음에 자리에 잠시 멈춰 서서 한곳을 응시했다.
잡음이 들려온 곳은 놀랍게도 무경의 집 안쪽이었다.
“하무경 씨?!”
머리보다 입이 먼저 반응했고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탁탁 탁!
정신없이 그곳으로 뛰어가 철문을 세게 열어젖힌 순간에, 요원의 눈이 큼지막하게 벌어졌다.
단풍을 닮은 그녀의 적갈색 눈동자에 실망감이 서린 것도 잠시.
마치 귀인이라도 만난듯이 금세 또 반가움을 드러내 활짝 웃는다.
“김 작가님. 아니. 하도현 씨. 오랜만이네요.”
대청마루 위에서 무경의 짐을 정리하던 도현이 마당을 멋대로 침범한 요원을 표정 없이 바라봤다.
무표정한 얼굴 뒤엔 이유를 알 수 없는 냉담한 시선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도현은 대답 대신 빈 상자 안에 물건을 다시 담기 시작했다.
민망함에 잠시 아랫입술을 감쳐 물었던 요원이 용기를 내 입술을 떼었다.
“하무경 씨는…… 잘 지내나요?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헤어져서요.”
도현은 한결같이 대답하지 않고 연속해서 상자 안에 작은 물건들을 채워 넣었다.
“제 전화를 안 받더라고요. 메시지에 답도 없고…….”
도현은 여전히 요원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문 채였다.
뾰족해 보이는 입술이 어딘지 모르게 요원을 탐탁지 않아 하는 눈치다.
“하무경 씨가 많이 바쁜가 봐요?”
자신을 반기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뜬구름 잡듯이 또 질문을 던져본다.
혹시, 무경에 대한 소식 하나라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하여.
헤어진 지 겨우 이틀째인데 그가 이처럼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탁.
상자 안에 마지막 물건을 집어 던진 도현이 고개를 가만 들어 올려 요원을 서늘하게 직시했다.
이렇게 보니 누가 동생 아니랄까 봐서, 도현은 남자와 눈빛이 굉장히 흡사했다.
하, 잇새로 새어 나오는 냉소적인 탄식마저도.
“아…… 바쁘신데 죄송해요. 나중에 다시 올게요.”
요원이 뒤돌았다가 아차, 소리 내며 다시 반 바퀴 뒤돌아 생글,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으시다면 짐 정리하시는 것 좀 도와드릴까요?”
“형이야 당연히 바쁘지 않을까요?”
그제야 도현이 반응했고.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현재로선 알 수 있는 게 하나 없는데?”
주제를 벗어난 도현의 말은 마치 맞추기 어려운 퍼즐 같았다.
머릿속에서 잠시 이리저리 그의 말을 맞추어보던 요원이 “네?” 웃으며 되물었다.
고작 빈 상자 하나를 품에 끌어안으며 대청마루 위를 훌쩍 내려온 도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오늘 인도로 출국하거든요. 언제 돌아올지 아무도 모르고요. 이런 걸 우리 세계에선 좌천이라고 하죠.”
여전히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에 두 눈을 깜빡깜빡, 몇 번 반복해보던 요원이 픽 웃으며 제 귓불을 어루만졌다.
“좌천이라니. 누가요?”
다시 반문하는 요원의 얼굴에 남은 싱그러운 웃음기는 곧, 사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형이요. 그쪽이 잘 아는 하무경.”
요원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도현이 그녀의 앞에 비딱하게 섰다.
“인도로 쫓겨난다고요. 오늘.”
“…….”
“이 빌어먹을 촌마을 하나 때문에.”
요원이 마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처럼 작게 웃었다.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한번 들썩였던 그녀가 잠시 눈썹 앞머리를 찡그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한번 비스듬히 기울여도 보고 또다시 피식 웃기를 반복하던 요원은, 도현을 올려다보며 아주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다시 한번 웃으며 조금 짜증스레 말했다.
“좌천이라니. 한국을 떠난다니. 쫓겨난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하무경 씨한텐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요. 하무경 씨는 단 한 번도 제게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는데요.”
“그러니까 돈 받고 나가시지 그러셨어요. 그럼 모두가 행복했을 텐데. 한두 푼 쥐여드리겠다는 것도 아니었잖아요. 왜 시골 사람들은 이렇게 꽉 막혔죠? 왜 일을 이렇게 어렵게 가요?”
“이봐요, 하도현 씨!”
“상황 파악이 아직 덜 된 모양인데요, 채요원 순경님.”
요원의 말을 댕강 자른 도현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요원의 얼굴에다 대고 싸늘한 어조를 씹었다.
“형 오늘 완전히 한국을 떠난다고.”
그 말엔 요원이 주춤 한발 뒤로 물러났다.
“이제 채요원 순경님은 우리 형을 다신 볼 수 없단 뜻이에요.”
그녀의 몸이 불시에 비틀거린 것도 같다.
“그러니 혹시라도, 아직도 우리 형에게 안 좋은 감정이 남아있다면 이쯤에서 그만 퉁 치시지 그래요.”
거친 파도에 휩쓸리는 힘 없는 모래성처럼.
“서로 피해 본 건 피차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요원의 얼굴이 서서히 부서지는 것을 도현은 똑똑히 목격했다.
“채 순경님은 피해 본 게 뭐야. 오히려 득 봤죠. 축하드려요. 부자 되셨던데.”
요원의 변해가는 표정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관망하던 도현은 작정한 듯이 그녀의 감정을 더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도대체 우리 형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나 잘 모르겠는데요. 여러모로 대단하시네요. 그 짧은 기간 동안 천하의 하무경을 간이고 쓸개고 뭐고 다 빼주는 호구로 만드시고.”
도현이 상자를 잠시 마당 위에 내려두고 제 뒷주머니를 뒤적여 지갑을 잡아챘다.
“받으세요.”
부동산 명함 하나를 꺼내든 도현이 그것을 요원의 앞에 내밀며 눈썹을 비딱하게 올렸다.
“이야기는 다 됐으니 가서 키 받으시고요.”
서울 송파구에 있는 부동산 명함이었다.
“키라니 무슨…….”
아까부터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지 요원이 제 가슴께를 움켜쥐며 간신히 단마디를 뱉었다.
“레지던스요. 형이 주라던데요?”
요원이 찡그린 얼굴로 웃었다. 차라리 웃지 않는 편이 더 나을 정도의 괴로운 미소였다,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그땐 나를 속이는 당신에게 너무 화가 나서. 그저 화가 나서.
당신에게 바라는 건 나 아무것도 없었다.
말했었잖아. 나는 당신이 백수였음이 더 나았을 것 같다고. 말했었잖아. 나는 당신이 아무런 이유 없이 좋았다고.
아니다.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던가?
“축하드려요. 마을도 지키시고 서울 레지던스도 소유하시고. 설마. 우리가 주겠다는 그 12억이 부족해서 머리 쓰신 건 아니죠?”
도현은 아까부터 끊임없이 빈정거렸으나 요원은 그 빈정거림을 상대할 기력도 정신도 하나 없었다.
“하무경 씨…… 몇 시……, 비행기예요? 설마 벌써, 떠난 건, 아니죠?”
숨이 턱턱 막혀와서 음절 마디마디가 뚝뚝 끊겼다.
“동생분 입장에선, 제가, 미우신 건, 백번 천번, 만 번, 알겠는데요. 다 이해하겠는데요.”
우산 손잡이를 쥐고 있는 요원의 손이 덜덜거리고 있음을 도현은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비행기 시간 좀, 알려주세요.”
“제가 왜요?”
“그야 당연히!”
요원이 불시에 소리를 내지른 그 순간.
그래.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콰쾅!
흠칫 놀란 요원이 뒤를 돌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실제로 하늘에선 천둥 번개가 쳤으나, 요원이 지금 놀란 것은 그것 때문은 아닌 듯 보였다.
‘사랑해.’
탁.
요원이 내내 쥐고 있던 우산이 마당 위로 곤두박질쳤다.
‘넌 나 사랑해?’
쏴아아아아아.
그녀를 보호해주던 우산이 사라지고 나서부턴 요원의 머리 위로, 몸 위로, 마음 위로, 비가 세차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모든 먹구름이 그녀의 위로 한꺼번에 몰린 듯이, 세상에 쏟아지는 모든 비를 혼자 맞고 있는 사람처럼, 요원은 그렇게 아주 빠르게 젖어갔다.
“꼭 할 말이…….”
혼란스러움에 흔들리던 여자의 표정이 점차 확신에 찬 무엇으로 변하였고.
“있거든요.”
도현을 직시하는 그 눈동자는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무경 씨에게.”
여자는 비에 홀딱 젖어가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그렇지 않은 듯 보였다.
요원의 눈빛을 가늠하듯 한동안 더 가만 응시하던 도현이 손목으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밤 10시 40분 비행기예요. 편명은 KX380. 제1 여객터미널로 가세요. 지금 출발하시면, 뭐. 잘하면 한 번은 더 볼 수도 있겠네요.”
“고맙습니다.”
요원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가 도현을 빠르게 등졌다.
탁탁. 탁탁탁탁. 탁탁탁탁탁!
그때부터 요원은 무서운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어디론가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는 그녀를 가느다래진 눈매로 응시하면서 도현은, 일전 하 회장과 있었던 그 일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