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101화 (101/116)
  • 101화. 풀벌레가 다시 울던 밤

    [ ※ 101-102 추천곡 : 자우림 – 영원히 영원히 ]

    사랑해.

    고백하지 않으려 했다. 잠자코 묻어두려고만 했다. 나는 곧 떠날 사람이니 말이다.

    그런데 너의 눈동자를 보고 꼭 한번은 말해주고 싶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일 테니. 내 마음을 네가 알아주었으면 해서. 한 번이라도 바라봐주었으면 해서.

    맞아. 나는 끝까지 이기적인 새끼야.

    “넌 나 사랑해?”

    가뜩이나 하얀 여자의 얼굴에 갈수록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그저 입술을 작게 떨어트린 채로 눈만 연신 깜빡거릴 뿐이었다.

    지금 요원의 머릿속은 여기저기에서 폭탄이 펑펑 터지는 전쟁통 속 같았다.

    특히 남자의 입에서 전해 들은 ‘사랑’이란 단어가 그랬다.

    그를 향한 감정이 대체 무엇인지 자신조차 가늠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예고도 없이 전쟁이 터졌다.

    사랑이란 감정이 대체 무엇인지, 사랑이란 뜻은 또 무엇인지, 요원은 아무것도 모르는 지경에 다다랐다.

    내 이름이 뭐였더라? 자신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아주 혼미해졌다.

    여자의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무경은 그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냈다.

    그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답은 늘 이거였다.

    너의 마음이 나와 같지 않음을 알기에.

    “그럼. 너 아직 날 원망하니?”

    여전히 요원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대답하지 못했다.

    “미워하는 건 아닐 거야. 나 그렇게 생각하면 될까?”

    한참 말이 없던 그녀가 뒤늦게 고개를 움직였다. 여전히 무언가에 홀린 사람의 얼굴을 해선.

    그래. 네가 날 미워하지만 않는다면. 그거면 난 된 것 같아.

    욕심부리지 말자.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에게 그저 이방인일 뿐이니.

    네가 나를 잊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다가도 또, 언젠가는 완전히 잊기를 바라니.

    무경은 모든 정리가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꼬리를 부드럽게 밀어 올렸다.

    “요원아.”

    무경이 여전히 멍해 있는 요원의 손을 그러쥐었다.

    “나와의 연애는 어땠어?”

    그때까지도 요원은, 무경에 대한 제 감정을 곱씹어보는 중이었다.

    자신이 방금 그에게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다시 처음부터 되짚어보는 중이었다.

    “행복했어?”

    그 생각을 작정하고 방해하려는 듯이, 요원의 손을 위로 끌어올린 무경이 그녀의 새하얀 손등 위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나는 딱 죽고 싶을 만큼 행복했거든.”

    요원과 시선을 다정하게 맞춘 무경이 그녀의 복숭앗빛 뺨을 엄지로 슥 문지르며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서정적인 답을 들려주었다.

    “너와 있는 매 순간이 내겐 천국과도 같아서. 지금 당장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될 만큼.”

    물론,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을진 의문이지만 지옥이어도 너와 함께라면 좋을 것 같았거든.

    너는 당연히 천국에 갈 사람이었지만, 죽어서만큼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를 내 옆에 붙잡아 둘 계획이다. 그곳이 아무리 지옥이라 할지라도. 네가 있는 곳 어디든 내겐 천국일 테니.

    제법 무서운 무경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요원은, 그저 그의 손에 뺨을 맡긴 채로 멍하니 있었다.

    “…….”

    “…….”

    무경도 꽤 오랜 시간 말없이 요원을 바라보았다.

    무경은 집요하게 그녀를 제 시야 속에 새겨넣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것이 마치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처럼, 그녀를 제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예쁜 이마. 예쁜 눈썹. 예쁜 눈. 예쁜 코. 예쁜 입술. 예쁜 얼굴선. 네 미소가 어땠는지. 너의 찡그린 모습은 또 어땠는지.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동자는 무슨 색이었는지.

    너는 언젠가 나를 잊어도, 나는 너를 잊지 않기 위해 말이다.

    그렇게 새겨넣고 새겨넣고 또 새겨넣다가 무경이 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간 자정, 내가 너와 이별한 날, D-0.

    “나 좀 안아줄래?”

    양은 밥상을 옆으로 밀쳐낸 무경이 활짝 벌린 팔만큼 시원하게 웃었다.

    요원이 여전히 움직이지를 못하니 무경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아 제 품으로 당겼다.

    체온과 체온이 맞닿은 순간. 그래.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무경은 요원의 몸이 부서지도록 세게 꽉, 끌어안으며 달콤한 살 냄새가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제 입술을 묻었다.

    그저 두 눈만 질끈 감았다.

    너, 나를 사랑해주면 좋았을 것을.

    ***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버린 새벽녘.

    대청마루 위에 앉아 연신 줄담배를 태우는 무경의 집에선 아지랑이 같은 연기가 외로이 피어올랐다.

    꽁초를 짓이기고 또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연기를 빨았다 뱉었다 하는 것을 무한적으로 반복했다.

    마당에 놓여있는 제 캐리어를 가만 바라보며 담배를 빨았다.

    요원은 식사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보냈다.

    그녀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자꾸만 들어가질 않고 머뭇거렸고, 무경은 요원을 안심시키듯이 환하게 웃어 보이며 내일 또 보자는 말과 함께 그녀를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너는 혹시 알았을까. 내가 곧 떠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나. 가는 내 마음 편하라고.

    그게 아니라면…….

    너는 아침이 밝는 대로 우리 집에 올 테고, 내가 없는 이 빈집을 보고 잠시 상실감을 동반한 허탈감 그리고 배신감마저 느낄 수도 있겠구나.

    그래. 차라리 그편이 더 낫겠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너는, 그저 이런 나를 끝까지 답 없는 개새끼로만 알아주면 되는 거였으니.

    네 마음이 편한 이별을 해주고 싶었으나, 결국은 또 내 멋대로 굴어 미안할 뿐이다.

    처음부터 끝을 정해두고 시작한 연애였기에 여자와의 이별은 사실 쉬웠다.

    아니. 죽을 만큼 어려웠나?

    “…….”

    담배 끝이 빨갛게 타들어 갈 때마다 무경의 가슴속은 회색빛 연기로 가득 찼다.

    연기를 후우, 길게 내뱉던 무경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몇 번의 터치로 사진첩에 들어가서 요원에게서 전달받은 사진을 가만 바라보며 연기를 빨고 또 길게 뱉었다.

    오리배 위에서 저와 같은 구명조끼를 입은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았다.

    너 내게 행복하라 했던가.

    너와 헤어지고 나 당장은 힘들어도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나는.

    다시 웃고, 밥도 잘 먹고, 잘 자고 할 테지만.

    행복은, 글쎄.

    물론, 소소한 행복 정도야 느끼며 살아갈 순 있겠으나.

    너와 함께했던 이 시절만큼의 행복을 내가 또다시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사실 아니라고 보거든.

    너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불행할 것 같다.

    아. 자꾸만 이 여자가 내 발길을 붙잡는구나. 끝까지 내 발길을 붙잡는구나.

    너는 내 인생의 걸림돌인가 아니면 디딤돌인가.

    너는 내 인생의 불행이었나 아니면 축복이었나.

    눈매를 가늘게 찡그리며 다시 볼이 움푹 팰 정도로 담배 연기를 뻑뻑 빨아대던 무경이 손가락으로 눈 앞머리를 꾹 눌렀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 연기가 눈에 들어갔는지 눈꺼풀을 닫자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이잉. 그때 진동이 울렸다.

    -상무님. 백야마을 입구 앞입니다.

    꽁초를 집어 던진 무경이 손등으로 제 눈꺼풀을 대충 문질러 닦으며 읏샤, 하는 기합과 함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뚜벅뚜벅, 그의 구둣발 소리가 마당을 가로지르고 캐리어를 손에 쥔 그가 철문을 끼이익 열었다.

    행여라도 누군가가 캐리어의 바퀴 소리를 들을까 바닥에 끌진 못하고, 한 손에 꽉 쥔 채로 앞서 뚜벅뚜벅 걸어 나아가던 그가 잠시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 자리에 한동안 가만 멈춰 서서 숨을 고르던 남자가 잠시 캐리어를 비포장 길 위에 내려두고는 뒤를 돌았다.

    “…….”

    어둠에 잠식된 백야마을을 한참을 건너다보던 그가 자세를 다잡고 허리를 일정 각도로 꺾어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랜 시간 허리를 세우지 못하던 남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허리를 꼿꼿하게 세울 수 있었다.

    아름다운 백야마을, 그리고 너.

    영원히 이곳에서 평안할지니.

    캐리어를 다시금 손에 쥔 남자가 백야마을을 완전히 등지고 뒤돌아서 뚜벅뚜벅, 저 어둑한 길로 사라진다.

    뚜벅뚜벅. 뚜벅.

    뚜벅뚜벅.

    뚜벅.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어둠 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그 시간에, 잠자던 풀벌레가 모두 다 깨어나 찌르르르 찌르르르, 갑자기 울어대기 시작했다.

    풀벌레가 다시 울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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