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100화 (100/116)

100화. 풀벌레가 울지 않던 밤

“그러니까…….”

제게 떨어진 끔찍한 임무에 소 축사 앞에 서 있는 무경의 낯빛은 백지장처럼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

“어르신들 말씀은 지금 저더러…….”

사색이 된 무경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아니요. 저는 절대로 못 합니다.”

“옴마? 머슬 모대! 소가 힘들어하믄 잔 도와주랑께?”

“한나도 안 어려. 봐야.”

흥분하려는 부임을 진정시킨 갑순이 침착하게 한쪽 팔을 들어 올리며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송아지가 태어날 것 가트믄 우덜이 신호를 줄 것잉께, 그라믄 너는 손을 깨깟하게 소독한 담에 어미 소 질내에 넣어불믄 되는 거시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낀다.

“그라고 송아지 머리가 제대로 나온다 싶을 때 어미 소의 진통에 맞차가꼬 아래 방향으로 이라고 시방 댕기믄,”

“우욱.”

적나라한 손동작에 제대로 비위가 상한 무경이 제 입을 틀어막으며 헛구역질을 시작하니, 곁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갑순과 부임이 ‘옴마?’ 소리를 내며 혀를 끌끌 찼다.

“아주 사내 새끼가 지랄을 떨고 처자빠졌네잉.”

“저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메슥거리는 제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던 무경이, 백기를 든 사람처럼 깔끔하게 한발 뒤로 물러났다.

“못 합니다. 수의사 부르세요.”

“시방, 이거시 수의사까정 부를 일이 아니랑게! 니 시방 일로 못 오냐!”

자꾸 뒤로 한 발 두 발 물러서려는 무경을 잡기 위해 갑순과 부임 또한 앞으로 전진했다.

“두 번 말씀 안 드립니다. 전 못 합니다.”

신경질적으로 장갑을 벗어 던진 무경이 막 등을 돌리던 순간.

“니가 진짜 우덜 손에 디지고 싶어 환장을 해부렀냐? 니가 또 두 번 말하면 머 어쩔 거시여!”

살벌한 기세로 무경에게로 일시에 달려든 갑순과 부임이 그의 뒷덜미를 잡아채 축사 안으로 질질 끌고 들어갔다.

백야파출소 내의 요원은 민원을 넣겠다 찾아온 무경을 제법 피로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야. 자기 동네 어르신들 좀 어떻게 좀 해봐. 특히 자기네 할머니. 나 이런 대우 받는 사람 아니라는 거 이제 다 알았잖아.”

다리를 옆으로 넓게 벌리고 앉아 제 한쪽 팔뚝을 들어 보인 그가 불평을 시작했다.

“내가 내 이 손을 소 새끼 질 안에 넣었다니까?”

푸흡!

컴퓨터 화면을 보는 척 무경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소장이 떨어진 거리에서 기침을 터트렸다.

“나는 내 커피 물도 내 손으로 안 받는 사람인데 내가 대체 왜 내 손으로 송아지 머리를 받고 있어야 하는데?”

“하, 하무경 씨. 아니. 하무경 상무님. 이 커피 한잔 드셔보실래요?”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게 막 커피잔을 들고 온 성준이 무경의 앞에 굽신거리며 그것을 내밀었다.

“봤지. 나는 내 손으로 커피를 타다 마셔본 적이 없어요.”

고맙습니다.

성준에게 까딱 인사하며 그 커피잔을 손에 그러쥔 무경이 의자에서 일어나 요원이 앉아있는 자리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내가 송아지 머리 받는 사람이야? 내가 그런 일 하는 사람이야? 나 그런 일 하는 사람 아니야. 나 아직도 속이 울렁거리고 아무래도 트라우마 생긴 것 같아. 이거 어떻게 책임질래?”

무경이 요원의 파티션 앞에 몸을 기대고 서서 요원을 비스듬히 내려다봤다.

“출산을 도우신 거라면서요.”

요원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다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소에게도 부임 어르신에게도 아주 큰 도움 주셨어요.”

“지금 이 말의 핵심은 그게 아니잖아, 자기야.”

무경이 답답하다는 듯 파티션 위를 노크하듯 쿵쿵 두 번 두드렸고 요원은 순경 모자를 챙겨 들며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하무경 씨. 지금 어디에 있는지 똑똑히 보시고 그것에 맞게 행동해 주시죠?”

“뭐?”

“동녘 그룹의 자제님께서 순경에게 자기야 자기야 반말 찍찍 해대고 하는 모습, 보기 별로 안 좋네요. 모범을 좀 보여주시죠?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모르십니까.”

하. 무경의 잇새에서 냉소적인 탄식이 비집고 흘렀다.

이건 상대가 공과 사를 구별해도 너무 구별하니 또 되게 서운해지는 거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새벽까지만 해도 공과 사가 뭐야? 순경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응?

“단물만 빨린 기분이네.”

미간을 찡그린 무경이 커피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작게 중얼거렸다.

“맛있었어요.”

순경 모자를 푹 눌러쓴 요원 또한 작게 중얼거리며 눈썹을 가볍게 들었다 내렸다.

요원의 공격에 무경은 치명타를 입은 사람처럼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가 킥, 웃음을 터트리며 찡그려진 눈썹을 문지른다.

“아무튼, 요는 말이에요, 채 순경님. 내가 마을 어르신들 때문에 제 명에 못 살 것 같다고요, 채 순경님.”

일부러 ‘님’ 자에 힘을 주어 말했고 순찰 돌 채비를 마친 요원은 제 책상에서 벗어나 무경의 앞에 우뚝 멈춰 선 채 답했다.

“마을에 계시면서 어르신 좀 도와드리면 좋지 뭘 그러세요? 어차피 낮에 할 일도 없으시잖아요.”

“지금 채 순경네 가족이라고 그쪽 편 드는 거지?”

“전 누구의 편도 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채 순경은 내 편이어야지. 채 순경만은 내 편 들어줘야지. 아니야?”

“그만 댁으로 돌아가 주실래요?”

“생각해봐, 채 순경. 내가 이 비싼 손을 소 새끼 질 안에 넣었다니까? 내가 이 손으로 얼마짜리 프로젝트를 결재하는지 채 순경이 뭘 알아? 물론, 내가 네 안에 손을 넣는 건 백번 천번 만 번,”

“하무경 씨!”

읍.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무경의 입술을 요원의 손이 그대로 틀어막았다.

다행히 성준과 소장은 다른 마을의 어르신이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 상태여서 이쪽에 더는 신경을 쏟지 않고 있었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무경을 올려다보는 요원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딱 그렇게 말하고 있었기에 무경은 저의 방정맞은 입을 얌전히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무경 씨. 제가 지금 순찰을 돌아야 해서요. 나중에 다시 얘기할까요, 우리?”

요원의 목소리가 범상치 않아서 무경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진정이 된 것 같아서 손을 치우자 몇 초간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입을 꾹 다물고만 있던 무경이 허리를 슬그머니 굽혀 요원의 귓가로 다가오더니 이런 말을 작게 속닥거렸다.

“손만 넣을까. 온종일 빨아줄 수도 있는데.”

어제처럼.

“이 사람이 정말!”

곤혹스러움에 깜빡거리는 요원의 시야 속, 무경은 농염하게 웃었고 그의 입버릇 같은 음담패설에 요원의 얼굴엔 화르륵 불이 났다.

“저녁 먹자, 우리 집에서.”

허리를 세운 그가 요원이 쓰고 있는 모자의 챙을 툭툭 가볍게 두드렸다.

“오늘은 진짜 대화만 할게.”

눈을 한 번 깜빡이면 휙휙 변하는 카멜레온처럼, 그는 지금 또 소년처럼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화도 못 내게.

현재 시각 오후 2시 38분.

내가 너와 이별하기까지 남은 시간 단, D-1.

***

성준과 급하게 들어온 민원 건을 처리하다 보니 무경의 집 앞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가 되기 10분 전이었다.

굳게 닫혀있는 무경의 대문을 쿵쿵 두드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안에서 누군가가 빠르게 나와 문을 열었다.

“늦었네?”

“죄송해요. 일이 많았어요.”

“들어와.”

무경이 철문을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어 당기자 끼이이이이익- 녹슨 문이 조금 더 뒤로 젖혀졌다가 두 사람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듯 그렇게 문은 또 쿵, 완전히 열렸다.

“근데 왜 이렇게 차려입고 계세요?”

요원이 자전거를 끌고 마당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이 늦은 시간임에도 남자는, 구김 하나 보이지 않는 정갈한 흰색 셔츠에 검은 슬랙스를 받쳐입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럼 데이트에 츄리닝을 입고 있을까요?”

무경이 제 손목시계를 힐끔 내려보며 무던하게 답했다.

“우리 이거 데이트예요?”

요원이 자전거를 세워두며 생글 웃었다.

“그럼 이게 면접일까요?”

무경이 그녀의 장난에 장단 맞춰주며 대청마루 위에 양반다리 하고 앉았다.

“음식이 좀 식었는데. 괜찮아?”

“괜찮아요. 뭐든 다 좋아요.”

자전거가 잘 세워졌는지 마지막으로 확인을 한 요원이 아 배고프다, 라는 말과 함께 대청마루 위 남자의 맞은편에 몸을 앉혔다.

자정까지 얼마 남지 않은 고요한 밤.

찌르르르. 찌르르르. 찌르르르.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한 이 시골의 밤.

양은 밥상 하나만을 가운데에 두고 이러고 앉아있으니, 처음 함께 식사했던 그 날이 자연스레 뇌리를 스쳤다.

첫 식사에도 거리낌 하나 없이 랍스터 살을 발라주고 성게 알을 올려주고 하면서 취조하듯 이런저런 정보를 캐내던 남자를 말이다.

요원은 그가 저에게 그랬듯이, 함께 하는 내내 무경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많았다.

어떤 유년 생활을 보냈는지. 학창 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는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 있고 싫어하는 건 또 무엇이 있는지. 당신이 속해 있는 그 세계는, 내가 모르는 당신의 삶은 어떤 삶인지. 서울에 완전히 돌아가게 되면 앞으로 무엇을 할 건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 연애 결혼을 추구하는지, 정략 결혼을 추구하는지. 앞으로 어떤 여자를 만날 것인지.

그러나, 한편으론 묻고 싶지 않기도 했다.

사람이 원래가 그렇다. 그 사람에 대해 더 자세히 깊게 알게 되면 그 사람을 더는 미워할 수 없게 되는 법이다.

악당에게 서사를 주어선 안 되는 이유다.

이제 무경을 미워하진 않지만, 이제 남자를 자신들의 소중한 터전을 망치러 온 악당으로 생각하지도 않지만.

요원은 묻는 것 말고 입을 다무는 일을 택했다.

요원은 그가 대체 언제 만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불어터진 파스타 면을 젓가락으로 휘적거리며,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건 그녀의 앞에 있는 무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분명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녀가 말해왔던 이상형의 남자를 만나 행복하길 바란다.

그녀만 행복하다면 나는 조금 불행해도 괜찮지 않나, 뭐 나름 그런 답지 않은 비련의 주인공 같은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이게 씨발, 그녀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고 다른 남자의 품에서 웃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가만 그려보고 있자니 배알이 꼬이다 못해 몸속 내의 모든 장기가 죄다 뒤틀리는 기분이다.

그녀가 다른 새끼와 있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우연이라도, 어느 날에라도 보게 된다면, 나는.

당장에 그 남자 새끼를 찾아가 죽여버릴지도 모를 만큼.

그러다가 궁극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나는 왜 너를 포기해야 하는가. 나는 왜 너를 놓아야 하나. 네 곁에 왜 나는 안 되나.

“요원아.”

“네?”

무경의 부름에 다 불어터진 면만 뒤적거리던 요원이 작은 얼굴을 들어 올려 무경과 시선을 맞췄다.

“사랑해.”

장난처럼 풀벌레가 갑자기 울음을 멈췄다.

풀벌레가 울지 않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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