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99화 (99/116)

99화. D-2

무경이 백야마을에 내려온 지도 벌써 9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뭘 했기에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흘렀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나, 시간이 언젠 한 번이라도 우리 뜻대로 흘러가준 적이 있나.

그래도 이곳에 내려와 9일이란 시간을 헛되이 보내진 않았다.

요원이 출근하면 무경은 대청마루 위에 팔자 좋게 드러누워 내리쬐는 볕을 쐬었다.

물론, 갑순에게 또 이 집 저 집 만 원 단위에 팔려 끌려다니는 신세긴 했지만.

요원이 퇴근하면 두 사람은 팔각정에서 오붓하게 식사를 하고 별빛다방에서 차도 한잔 마시고 밤의 하천을 거닐고 폭포도 가고 또 바닷가의 모래사장도 거닐고, 그렇게 여느 커플이 데이트를 하듯 꽉 찬 9일을 보냈다.

그리고, 무경은 요원의 집에서 갑순과 시간을 보내는 일도 잦았는데 특히 갑순에게서 요원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듣는 것을 그렇게나 좋아했다.

백야마을의 어르신들은 무경이 마을에 온 목적과 정체를 다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무경을 예전과 똑같이 대했다.

때론, 수상할 정도로 변한 것이 하나 없어 무경을 당혹시킬 정도였으니 말이다.

희한했다. 무경에겐 희한한 일이었다.

가족도 내친 자신을 품어주는 사람이 하필이면, 자신이 뒤통수를 후리려 했던 백야마을의 어르신들이라니.

대청마루 위에 앉아 앨범을 넘겨보는 무경은 사진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이건 언제냐, 이때 요원은 어떤 아이였냐, 질문이 많았다.

갑순은 옘병 성가셔 죽겠네, 하면서도 하나하나 허투루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우리 채 순경이 왜 울고 있죠?”

무경이 가리킨 사진 속엔 멜빵 바지를 입고 있는 작은 요원이 울먹이며 카메라 앞에 서 있었다.

“이잉. 그 사진은 말이다. 우리 요원이가 어렸을 적부터 참 착했다 안 하냐. 그라고 또 용감했제. 여기는 시골이라 개장수가 많았어야. 요원이가 잘 돌보아주던 동네 까만 개를 개장수가 잡아 갈라고 안 했냐잉. 고거슬 보고 요원이가 달려가서 그 개장수 할배랑 한판 붙었던 날이었제.”

참 채요원답다 생각한 무경이 작게 웃었다.

“그래서요. 그 개는 어떻게 됐습니까?”

“머시 어찌케 되야? 그 개는 결국 우덜이 데꾸와서 키웠제.”

“운이 참 좋았네요, 그 개는.”

무경이 요원의 사진 위에서 한참 동안 눈을 거두지 못하다가 대청마루 위를 걸레질하는 갑순에게로 시선을 틀었다.

“이 사진 말이에요. 제가 좀 가질게요.”

“이왕이믄 웃고 있는 사진을 가져가제, 어째 우는 사진을 가질라 하냐잉?”

“기억하고 싶어서요.”

“머를. 우는 모습을?”

“아니요.”

정면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백야마을의 풍경을 시야에 한가득 담으면서 무경은 이런 말을 읊조렸다.

“운이 좋았던 순간을요.”

그의 검은 시선 속엔 특히 담벼락을 종이 삼아 색을 펼치는 붉은 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거시 대체 시방 먼 말이래?

구시렁거리며 대청마루 위를 계속해서 걸레질하던 갑순이 결국엔 걸리적거리는 무경을 참지 못하고 좀 나와보라 빼액 소리쳤다.

오늘 밤도 요원은 팔각정에서 무경을 기다렸다.

평소엔 잘 입지 않는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풀어 히피펌을 조금 더 풍성하게 살리고 블러셔도 하고 립스틱도 짙게 바르고, 요원의 그러한 모습에 팔각정 사장은 한동안 넋을 놓았다가 정신을 다잡으려 제 뺨을 탁탁 내리치기도 했다.

“채 순경, 오늘 시방 겁나게 이뿌네잉. 또 하무경 씨 만나러 온 거여?”

테이블 위에 물병과 컵을 내려둔 팔각정 사장이 물었다.

“네. 자주 오게 되네요.”

요원은 민망한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제 새하얀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딸랑- 팔각정 문에 달린 종이 울리며 누군가가 걸어들어왔다.

요원과 팔각정 사장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으로 향했고 두 사람의 입술은 한 시에 작게 떨어졌다.

몸에 딱 떨어지는 쓰리피스의 검은 슈트를 입고 그 슈트와 대비되는 붉은 꽃다발을 들고 들어온 품격 넘치는 자태의 무경에게 시선을 단숨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오메…….”

팔각정 사장의 잇새에서 절로 그런 감탄사가 흘렀고, 요원과 팔각정 사장은 한눈에도 다 들어오지 않는 장신의 남자를 무의식중에 시선으로 훑어내렸다.

“울 하 상무님 오셨소? 짜장면 먹으러 옴시로 머 그라고 차려입고 왔어라?”

“제가 차려입고 오는데 사장님께서 뭐 보태준 거 있으십니까.”

까칠한 되받아침에도 팔각정 사장은 웃는 얼굴을 지우지 않고, 제게로 다가오는 무경의 어깨를 애교스럽게 툭 한 번 때렸다.

“질투낭께 그라제요.”

무경은 슈트 재킷을 벗어 빈 의자에 걸면서 화제를 돌렸다.

“서울에 오픈 준비는요. 잘 되고 계세요?”

“이잉. 고람요. 고람요. 동녘 직원헌티 도움도 많이 받고 있고요잉. 나가 하 상무님 빽이 있어서인지 겁나게 신경 써줘라. 여러 가지로 참 고맙소잉.”

“다행이네요. 메뉴판 주세요.”

의자를 빼서 요원의 앞에 자리 잡고 앉은 무경은 팔각정 사장의 말을 끊듯 테이블 위를 검지로 두 번 툭툭 무신경하게 두드렸다.

아따 시방 개 버릇 남 못 주네잉, 생각하면서도 팔각정 사장은 무경을 보았던 첫날처럼 기분 상해하지 않고 선뜻 자리를 비켜주었다.

“꽃이 너한텐 안 되네.”

팔각정 사장이 떠나고 빙그레 미소 지은 무경이 요원의 앞에 꽃다발을 내밀었다.

“내가 직접 산에 올라가서 땄어.”

“뭘요. 장미를요?”

“응. 산삼을 캐서 주고 싶었는데 미안해.”

그의 실없는 농담에 웃음을 터트리면서 요원은 그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하무경 씨에겐 또 처음 받아보는 꽃이네요.”

그 말에 무경은 혀를 깨문 사람처럼 흠칫거리며 과장되게 이마를 탁 쳤다.

“이런. 내가 여태 이 흔한 꽃다발 하나를 안 줬단 말이야?”

“안 줬을걸요?”

“꽃도 꽃을 좋아하는지 몰랐지, 나는.”

다른 남자에게 들었더라면 정색했을지도 모를 저 낯간지러운 말이, 왜 이 남자에게 들으면 담백한지 모를 일이었다.

“예뻐.”

“진짜 예쁘네요.”

무경은 요원을, 요원은 꽃을 바라보며 그렇게 동시에 읊조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9일간, 시도 때도 없이 서로의 몸을 탐했는데.

팔각정에서 식사하는 도중, 신혼처럼 눈이 맞은 두 사람은 곧장 무경의 폐가 수준의 시골집으로 건너왔다.

서로의 옷을 다급하게 벗기고 서로의 몸에 쪽쪽 입을 맞추다가 씻고 하자는 요원의 말에 또 3분 컷으로 샤워를 마치고 나와 엉겨 붙었다.

참고로, 무경의 시골집에도 욕실이 생겨 더는 씻으러 어디론가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아. 아.”

두 사람의 몸이 얇은 이불 하나만을 깔아둔 마룻바닥 위에서 정신없이 흔들렸다.

마음이 흔들리고 집이 흔들리고 세상이 다 흔들렸다.

요원은 무경의 아래에서 목이 타도록 신음했고, 무경은 그런 요원의 안에 끊임없이 자신을 밀어 넣었다.

이미 들어가 있음에도 더 애가 타는 사람처럼 최대한 깊숙이, 더 깊숙이.

두 사람은 서로를 물고 빨고 핥고 가져도 계속해서 부족하단 듯이 서로를 더 갈구했다.

짙은 열기를 품은 뜨거운 공기 속에 두 사람의 같은 바디워시 향이 사방을 둥둥 날았다.

“올라와.”

자리에 앉은 무경이 두 팔을 뒤로하여 지탱하고 그녀에게 제 위로 올라오라 고개를 까딱했다.

요원이 몸을 움직여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았고, 그녀를 보며 아랫입술을 혀로 한 번 훑은 무경이 명령하듯 말했다.

“네가 움직여 봐.”

요원이 무경의 탄탄한 어깨를 꽉 잡은 채로 조금씩 느리게 움직였다.

“하.”

눈썹 앞머리를 찡그린 무경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낮게 신음했다.

요원이 리듬에 맞춰 춤을 추듯이 혹은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살랑살랑 몸을 움직일 때마다, 여자의 풍성한 머리칼에서 흩어지는 샴푸 향은 이 폐가 같은 집 안을 금세 꽃밭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래서 복상사를 하는구나, 그녀를 알고 또 하나를 배운 무경은 큼직한 손을 그대로 뻗어 요원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씨발, 요원아.

“이리 와.”

요원의 얼굴을 제게로 훅 끌어당긴 무경이 여자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맞물리며 마치 사탕처럼 쪽쪽 빨아댔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모든 것을 다 와그작 씹어먹고 싶은 얼굴이었다.

“하아…….”

요원은 오랜 시간 이어지는 관계에 지쳤는지 무경의 치골 위에서 힘겨워했다.

그 몸짓이 점차 느려지고 힘이 빠지니 무경이 피식 웃으며 요원의 얇은 허리를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

“나 싸라고 아님 말라고.”

그러고는 조금 더 박자감 있게 세게 흔들었다.

“아, 으응.”

요원이 쾌감을 견뎌내지 못하고 무경의 어깨 위로 무너져내렸다.

“하아…… 끝내줄까.”

고저 없는 물음에 요원은 대답 대신 품에서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또 무경을 애태우듯 그의 귓불을 잘근 깨물며 속삭였다.

“더 세게요…… 더 세게…….”

나 얘 때문에 진짜 복상사하겠네.

무경은 사랑스러워 죽겠는 요원의 작은 머리통을 더 꽉 붙잡아 품에 끌어안으면서 제 골반을 강하게 퍽퍽 쳐올렸다.

“아. 으응. 응.”

살끼리 마찰하는 시뻘건 음란한 소리 속에서도, 여자의 신음은 여전히 핑크빛처럼 곱기만 했다.

현재 시각 밤 11시 57분.

내가 너와 이별하기까지 남은 시간, D-2.

***

또 하루의 태양이 작열하는 백야마을의 아침이 밝았다.

요원은 어김없이 출근했으며 무경은 늘 그래왔듯 대청마루 위에 한량처럼 누워 청명한 하늘을 가만 올려다봤다.

담배를 뻑뻑 빨아대는 무경은 폐부 깊숙이 매캐한 연기를 들이켰다가 내뱉음을 반복했다.

처음 백야마을에 왔던 때가 불현듯 떠올랐다.

이 대청마루 위에 그냥은 앉지를 못해서 서 비서가 손수건을 깔아준 뒤에야 몸을 앉히기도 했던 그때가.

깔끔도 존나 오지게도 떨었던 때가 있었지.

요즘은 좀 웃긴 게, 밤새 자신을 괴롭히는 톰과 제리의 우당탕하는 소리가 없으면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적막보단 소음이 익숙해진 자신이 우스웠다.

나 진짜 씨발 미쳤나 봐. 인도에도 고양이와 쥐 새끼가 있어야 할 텐데. 하긴. 거긴 뭐 그것들만 있겠냐고.

픽, 낮게 비소하자 연기가 허공에서 흩어졌고 그 연기가 사라지기 무섭게 무경의 얼굴에 남아있던 미소마저 자취를 감췄다.

사실, 요즘은 누군가의 체온이 없으면 잠에 쉬이 들지를 못한다.

그 누군가는 특정 인물이었기에 대체할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고요하게 눈꺼풀을 들었다 내리며 하늘에 시선을 두고 있던 무경이 지잉 하는 소리에 대청마루 위를 더듬거려 핸드폰을 얼굴 앞으로 끌고 왔다.

-상무님. 말씀하신 시간까지 모시러 가겠습니다.

볼이 움푹 팰 정도로 담배를 진하게 빨고 연기를 뱉으면서 태호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무경의 표정이 심란함을 더했다.

이제 이곳을 다 정리하고 서울로 갈 시간이다.

남은 이틀간, 서울에서의 마지막 정리만 마치면 이제 이 기나긴 여정도 종지부를 찍는다.

곧 너와 헤어져야 할 시간은 다가오는데, 아직 어떻게 헤어져야 네 마음이 편할지 오랜 시간 고민해 보아도 나 여전히 답을 모르겠다.

“후우-.”

길게 연기를 뱉으며 핸드폰을 다시 대청마루 위로 던진 무경이 다시 하늘 위를 가만 응시하며 매캐한 연기를 빨아들일 때였다.

“머 하고 자빠졌냐, 이 오사랄 놈아.”

대문이 뻥 걷어차이며 뒷짐 진 갑순이 마당 안으로 들어왔고 무경의 잇새에선 젠장, 하는 탄식이 흘렀다.

“니 백수처럼 그라고 있지 말고 나랑 일 한나 하러 가자?”

“아니, 어르신. 뭐 저랑 팀이세요? 오늘은 혼자 좀 가시죠?”

“싸게 싸게 못 오냐, 이 썩을 놈아? 니가 우덜 마을에 진 마음의 빚을!”

“얼른 가시죠.”

대청마루 위에서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난 무경은 어느덧 갑순을 지나쳐 본인이 먼저 앞장서서 걸어 나아갔고.

갑순은,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인자하게 눈을 휘어 웃었다.

그 눈빛에선, 남자를 향한 그 어떠한 안 좋은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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