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97화 (97/116)

97화. 화양연화[花樣年華]

[ ※ 97-98 추천곡 : 케이윌 – 시간을 거슬러 ]

시간은 째깍째깍, 무정히 흘러 두 사람의 여행지는 또 달라졌다.

“더 빨리 움직여봐. 할 수 있잖아.”

무경의 나직한 명령조에 요원의 거칠어진 숨소리가 더운 열기를 가르며 공중에서 흩어진다.

“좋아. 더.”

이를 꽉 깨물면서 요원은 더 빨리 움직이려 노력했고 무경은 더, 더, 더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아아. 아. 하아.”

요원의 신음이 그러데이션을 쌓듯 점차 더 높아지고 땀이 흘렀다.

무경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호선을 그린 입매로 말했다.

“좋은데?”

“난 하나도 안 좋아!”

요원의 몸이 축 늘어져 소리친 건 그즈음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이마 위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문질러 닦으며 무경을 찌릿 노려봤다.

“그 발 하나를 꿈쩍을 안 해요?!”

오리배를 타서도 발 하나 꿈쩍 않는 남자를 말이다.

“움직이고 있는데요. 그것도 아주 열심히.”

무경이 페달에 올린 발을 까딱거렸다. 필수로 입어야 하는 구명조끼를 입은 채로 씨익 근사하게 미소 짓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이 남자는 거적때기를 입혀놔도 분명 화려할 것 같단 생각을 잠시 하다가 요원이 엉뚱한 생각을 떨쳐내듯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웃기고 있네. 움직이긴 뭘 움직여? 지금 땀이 나만 나는데!”

“웃기고 있긴 뭘 웃기고 있어. 가만 앉아있는데. 그리고 자기 그거 알아?”

“뭐요!”

“자기, 땀 흘리니까 되게 섹시해.”

미친놈, 하마터면 육성으로 욕을 뇌까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대부분 데이트를 나온 커플이었는데 남자 쪽이 페달을 밟아 움직이고 여자 쪽은 여유롭게 셀카를 찍거나 주변 풍경을 담느라 바빴다.

그런데 자신들은 그 반대인 게 너무 열 받는 거다. 다 해주기는 개뿔.

누가 고귀하신 황태자 아니랄까 봐서, 개 버릇 남 못 주는 거지.

“하무경 씨. 제가 진지하게 충고 하나 해드릴 테니 잘 들으세요.”

요원이 다시 열심히 발을 구르며 말했다.

“이딴 식으로 연애하면 평생 차이기만 할걸요?”

“이딴 식이 뭔데. 오리배 타서 발 안 구르는 거?”

무경은 여전히 여유롭게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대꾸했다.

“미안한데 나는 앞으로 오리배 탈 이유가 전혀 없는데? 나는 애초에 요트를 타지 않을까요?”

듣고 보니 또 맞는 말이었고, 갑자기 그 맞는 말이 슬픔으로 다가왔다.

하긴. 하무경 씨가 앞으로 만나게 될 여자는 이런 오리배 따위는 전혀 알지 못할 그런 부류의 사람일 테니까.

초호화 요트 위에서 샴페인을 마시는 것이 더 익숙한 그런 여자.

남자는 누구와 결혼하게 될까. 남자의 곁을 차지하는 여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고,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하고, 다정한 신혼을 보내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고.

그런 생각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다 욱신거렸다. 심장에 비수가 박힌다면 아마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었다.

요원이 애써 그런 갑갑한 생각들을 떨쳐내려는 듯 다시 열심히 페달을 굴리는 데에 집중했다.

그런 요원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무경은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오는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피식 막을 수 없는 웃음이 결국 터져 나왔고, 손바닥으로 요원의 허벅지를 꾹 눌러 그녀의 행동을 중단시켰다.

“서운했어? 미안. 너 놀리는 게 너무 재밌어서.”

무경이 쿡쿡 웃으면서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도 다른 여자들처럼 구경해. 사진도 찍고. 페달은 내가 밟을게.”

삐걱삐걱, 그가 여유롭게 발을 굴릴 때마다 페달은 기름칠이 필요하다고 아우성쳤다.

불시에 기분이 가라앉은 요원은 작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았다.

작은 산에 둘러싸인 잔잔하면서도 평화로운 호숫가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호수처럼 고여있었으면 하는 시간은 바다처럼 어디론가 계속해서 흘러가기에 바쁘고,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지금 더 빛나는 모양이다.

남는 건 사진이고, 이 순간을 잡을 수 있고, 담을 수 있는 것도 오직 사진뿐이란 생각에 요원이 구명조끼를 다급히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사진 찍어요, 우리.”

“난 사진 같은 거 안 찍는데.”

“찍어요. 다 해준다면서.”

요원이 핸드폰 카메라 방향을 셀카로 맞추고 그 핸드폰을 높이 들어 올려 두 사람을 초점에 맞췄다.

“정말 찍어야 해?”

무경이 귀찮은 얼굴을 했다.

“찍어요. 추억이잖아요.”

무경은 이상하게도 카메라가 질색이다. 예전부터 그랬다. 누군가가 자신의 사진을 찍는 것이 그렇게도 싫었다. 그래서 더 매스컴을 타지 않는 것도 있었다. 꼭 나가야 한다면 인터뷰에만 응하고 사진 촬영은 거부했다.

출입용 사원증 및 사내 조직도에 사진을 반영하기 위해 사진사가 동녘 그룹을 가끔 찾고는 하는데, 카메라 앞에 앉자마자 “됐죠.” 하며 사진사가 셔터를 누르기도 전에 일어나 당혹감을 안겨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 정도로 무경은 카메라가 싫다.

무경이 시원하게 찍자고 대답하지 않자 요원은 또 서운해지는 거다.

애인들 하는 거 다 하자고 할 땐 언제고, 이거 하나 못 해주나 하는 생각에.

“싫어요?”

묻는 그 음성이 낮게 착 가라앉아있음을 느꼈다.

그래. 애인이 원한다는데 뭐 별수 있나.

목덜미를 조금 거칠게 문지른 무경이 후, 시니컬한 한숨을 한 번 터트리며 요원의 어깨 위에 팔을 둘렀다.

요원의 몸이 순간 움찔 떨리고 그의 손이 닿아있는 어깨는 불에 덴 듯 뜨겁기만 했다.

작열하는 태양보다도 더 뜨거운 손길이라 생각했다.

핸드폰 카메라 속에 두 사람이 있다.

요원은 버튼을 누르기 전에 카메라 속의 무경을 바라보았다.

우아하고, 화려하고, 고귀한 남자.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할 남자. 영원히 잊지 못할 남자. 내 인생 최고의 남자이자 최악의 남자. 내게 가장 설렘을 안겨주었고 동시에 가장 아픔을 안겨주었던 남자. 미워하려 하였으나 미워하지 못하였고 불행하길 바랐으나 행복하기만을 바라게 되는 남자를.

찰칵.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사이 그런 소리가 들렸다.

무경이 기다리지 못하고 버튼을 누른 것이다.

“됐지.”

“어? 나 아직…… 나 아직 표정도 못 지었는데…… 준비도 못 했는데…… 다시 찍어요!”

요원이 멀어지려는 무경의 뒷덜미를 덥석 붙잡아 다시 카메라 앞으로 무력으로 끌고 왔다.

어어, 하면서 무경은 그 힘에 그대로 다시 끌려와선 황당하단 듯 헛웃음 쳤다.

“웃어주세요.”

“싫은데요.”

“그러지 말고 카메라 보고 한 번만 웃어주세요. 우리 웃으면서 찍어요.”

“어색한데.”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돈 드는 건 괜찮아. 어려운 건 싫고.”

“마지막 사진일 수도 있잖아요.”

여자의 그 덤덤한 목소리에 무경의 억장은 낡은 구조물처럼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무경이 그런 요원을 비스듬히 바라봤다.

사랑받고 싶고 사랑해주고 싶은 여자.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내가 지금 너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해 버린다면 그건 너에게 형벌일 것이다. 세상엔 전해지지 않는 것도 있고, 전해선 안 되는 것도 때론 존재한다는 것을 너를 만나고 너를 통하여 배웠다. 나 때문에 사랑도 뭣도 아닌 죄책감 같은 감정에 시달리며 살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오늘도 너에게 사랑한다 목에 걸리는 그 말을 간신히 삼킬 뿐이었다.

“싫어요?”

다시금 묻는 요원의 둥근 어깨 위에 팔을 두른 무경이 그녀를 제 쪽으로 강하게 확 끌어당겼다.

“아.”

그 힘에 중심을 잃고 무너져버린 요원의 얼굴은 어느덧 무경의 어깨에 뺨을 기대는 듯한 자세가 되었다.

“찍어.”

무경이 카메라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무경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일이었다.

요원도 두 눈을 예쁘게 휘어 미소 지었다.

어딘지 모르게 웃는 모습이 닮은 두 사람이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카메라 속에 담겼다.

반짝거리는 수면 위에 반짝이는 우리 두 사람이 담겼다.

***

오리배를 타고 나서 두 사람은 근방의 작은 시네마로 이동했다.

홍콩 영화인 화양연화[花樣年華] 간판이 걸려 있어 요원이 무경을 무작정 끌고 들어간 것이다.

요원은 이 영화의 팬이었고 문화생활을 즐기지 않는 무경은 이 영화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건물도 낡고 시설도 허름하고 비록 스크린은 작았지만, 때 묻은 빨간 의자는 앉을 만했고 에어컨 또한 성능이 좋아 두 사람의 더위를 씻겨주기엔 충분했다.

팝콘과 음료 하나씩을 들고 들어온 두 사람은 각자의 번호를 찾아 나란히 앉았다.

놀라우리만큼 사람이 없는 공간인지라, 마치 이 공간을 통째로 빌린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게 조명은 꺼지고 영화는 시작되었다.

영화가 시작된 지 15분 정도가 흐르고 화양연화의 명장면이 작은 시네마를 단숨에 장악했다.

Yumeji’s Theme이란 곡과 함께 양조위는 골목에서 담배를 물고 있고 장만옥은 국수 통을 들고 그 골목을 지나간다.

위태로운,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울적한 남녀의 분위기가 화면에 가득 찼다.

처음엔 염불에는 뜻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을 보이던 무경이 그 장면에서만큼은 요원의 몸을 더듬던 행위를 멈추고 스크린을 집중하듯 가만 응시했다.

“…….”

이제는 요원이 잿밥에 관심을 보이듯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어 남자의 날렵한 옆모습을 눈에 가득 담았다.

엄지는 턱 밑에 검지는 관자놀이에 기댄 자세로 스크린을 관조하는 듯한 얼굴이 껄렁함을 순식간에 걷어내고 오페라를 보는 VIP처럼 지독히도 고귀해졌다.

심장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날뛰었다.

저 분위기에 또 홀려서 요원은 무경에게로 제 몸을 기울였고, 남자를 대놓고 유혹하듯 그의 귓가에 이런 말을 속삭였다.

“지금 당장 안아달라고 하고 싶지만, 순경으로서 공공질서를 해쳐선 안 되니까요…….”

스크린으로 향해있던 무경의 고개가 요원에게로 엇비슷이 각도를 틀었다.

“영화 끝나면 안아주세요.”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무경의 짙고도 검은 눈동자가 요원을 금방이라도 씹어먹을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옆에…… 모텔이 있어요.”

맹렬한 빛을 열렬히 드러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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