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96화 (96/116)
  • 96화. 우리가 어떠한 식으로 만났든 나는,

    어딘지 모르게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저를 아련하게 응시하는 여자의 얼굴을 보자, 아래에 금방 피가 쏠렸다.

    이 상황에서도 그러고 싶니 너는, 제 아래를 탓하던 것도 잠시.

    봉지라면을 냄비에 대충 던져넣은 무경이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요원에게로 다가갔다.

    요원의 턱을 잡음과 동시에 허리를 낮춰 여자에게 입 맞췄다.

    평소처럼 요원의 입안을 혀로 쑤시는 난폭하고 무자비한 키스가 아닌, 때 묻지 않은 소녀와 소년이 하는 순수한 입맞춤이었으나, 어느 때보다도 두 사람의 가슴은 뜨거웠다.

    “요원아.”

    맞물려있던 입술을 갑자기 떨어트린 무경이 요원의 턱을 한 방향으로 홱 다급하게 돌렸다.

    “저기 봐.”

    물기를 머금고 있던 요원의 적갈색 눈동자가, 붉은 입술이, 처음 놀이동산에 가서 환상의 세계를 경험하는 아이처럼 그렇게 벌어졌다.

    “은하수야.”

    날씨도 좋고 대기도 좋은 밤이라 컴컴하고 한적한 마을을 감싸고 있는 하늘 위로 은하수 띠가 비현실적으로 드러났다.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초록빛으로 스스로 발광하는 반딧불도 어디선가 갑자기 하나, 둘 나타났다.

    6월엔 청산도에 반딧불이 떠오른다더니, 정말이었다.

    “와…….”

    요원은 우주의 신비를 경험하고 있는 아이처럼 말을 잇지 못하였고, 그런 요원의 모습을 무경은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경은 그 밤, 꿈을 하나 꾸었다.

    배경은 동녘 그룹이었고 무경은 차태호 실장과 서이준 비서를 양옆에 끼고 로비를 가로질렀다.

    커피를 손에 그러쥐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제 앞을 웃으며 지나치는 동녘 그룹 사원 무리를 보았다.

    그중, 누군가가 사원증을 떨어트렸다.

    태호가 주우려 하기 전에 무경이 먼저 허리를 굽혀 그것을 쥐었다. 시선을 슬쩍 내려 이름을 확인한다.

    ‘저기.’

    무경의 묵직한 목소리가 로비에 깔리자 그들이 자신을 돌아본다.

    뒤늦게 그를 알아보았는지 흠칫거리며 속히 허리를 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거 떨어트렸는데.’

    무경이 그 사원증을 내미니 저의 붉은 원피스를 더듬거리던 한 여자가 얼른 제 앞으로 다가와 그것을 받아든다.

    ‘감사합니다.’

    ‘신입?’

    ‘맞습니다, 상무님.’

    ‘신입 환영회 땐 본 기억이 없는데.’

    ‘제가 원래 눈에 튀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저를 못 보셨겠지만 저는 분명 그 무리 틈에 잘 끼어 있었습니다.’

    빙그레 웃는 여자의 얼굴에선 빛이 났다.

    ‘이름이?’

    분명 이름을 확인했었지만, 다시금 물었다.

    ‘네, 상무님. 저는 채요원이라고 합니다.’

    여자의 이름 석 자에선 더한 빛이 났다.

    ‘식사는 하셨어요?’

    ‘네?’

    ‘식사요.’

    무경이 요원을 바라보며 허공에서 숟가락 뜨는 시늉을 한다.

    ‘아…… 예. 먹었습니다.’

    ‘에이. 안 드셔놓고.’

    ‘아뇨. 저 진짜 먹었는데요? 먹고 이렇게 커피까지…….’

    ‘저녁은요.’

    ‘저녁이요? 지금 점심인데요?’

    ‘그러니까. 저녁은 드셨냐고.’

    ‘아, 아니요. 저녁은 아직.’

    ‘그럼 저녁은 아직 안 드신 거네?’

    ‘그, 그렇죠. 아직 점심이니까요.’

    ‘그럼 같이 저녁이나 먹죠.’

    ‘예? 누구랑요?’

    ‘누구겠어요. 나랑이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여자의 적갈색 눈동자는 단풍처럼 아름다웠고, 그녀의 복숭앗빛 뺨과, 붉은 원피스와 색깔을 맞춘 듯 붉게 빛나는 그녀의 귀걸이는 햇살에 반사되어 눈이 다 부실 정도였다.

    검은 재규어 하무경 상무의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장면이 바뀐다. 이번엔 백야마을이다.

    ‘저, 그런데 선생님. 식사는 정말 괜찮습니다. 물 한 잔만 주시면 되는데요.’

    ‘식사하셨어요?’

    ‘네.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시원한 물 한 잔만 주시면 돼요.’

    ‘에이. 안 드셔놓고.’

    ‘아뇨. 저 진짜 먹었는데요.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요.’

    ‘드셨어도 또 드세요. 많이 좀 드셔야겠는데.’

    ‘예?’

    ‘오늘 못 먹으면 어차피 다 버려질 거라. 아깝잖아요?’

    그랬구나. 백야마을에서 내가 너에게 반했던 건 바로 그 순간이었구나.

    순경복 차림의 너에게 식사를 권했던 그때, 내 가슴은 이미 뛰고 있었구나.

    “…….”

    잠에서 깬 무경이 눈꺼풀을 더디게 밀어 올렸다.

    잠에서 깨니 꿈도 함께 깨어져 있었다.

    꿈의 조각을 머릿속에서 퍼즐처럼 맞춰보던 무경은, 어둠 속의 천장만을 가만히 응시하며 지금이 현실인지 아니면 지금이 꿈인지를 되뇌어보다가 고개를 서서히 옆으로 틀어 곁의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

    자신을 바라본 채 옆으로 누워 곤히 잠들어있는 요원의 얼굴을 확인한 무경은, 지금이 현실임을 의식했으며 일시에 또 깨달은 것이 있었다.

    우리가 어떠한 식으로 만났든 나는, 너를 반드시 사랑하게 됐을 것이라고.

    무경이 요원의 품을 강아지처럼 파고드니 자연스레 올라온 요원의 손이 무경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잠결에 헤집었다.

    무경은 그 따스한 품속에서 다시 눈을 감으며 고요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느림의 섬 청산도에서의 우리의 시간은 야속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

    “뱀 나오는 거 아니야?”

    무경이 비딱하게 던진 질문에 요원은 텐트를 설치하며 웃었다.

    우리 자기는 지치지도 않나, 생각하며 무경이 데크 위에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여기는 울산의 영남알프스 간월산.

    해발 1,069M의 정상을 찍고 텐트를 칠 수 있다는 데크로 내려와 있는 두 사람이다.

    갑자기 짜인 일정에 전날 구매한 등산복을 입고 등산 장비를 이고 지고 폴대를 사용하여 암벽을 타고 헉헉거리며 정상을 찍고 내려온 게 불과 십 분 전.

    요원은 어찌나 부지런하고 체력이 좋은지, 무경은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가 죽을 것만 같은데 얼른 텐트를 칠 테니 그 안에서 쉬라며 저러고 있는 거다.

    이야. 대단하다, 대단해. 여러모로 대단한 여자야.

    맑은 여름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무경은, 습관처럼 멘톨 사탕을 와드득 씹었다.

    아니 근데 이게 대체가 데이트인지 아니면 존나 빡센 배낭객의 다큐인지 이젠 존나 다 헷갈릴 지경이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무경이 혹여 지난번 청산도에서처럼 또 요원에게 가만 있는다고 욕을 먹을까 봐.

    스펀지처럼 축축 늘어지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워 열심히 조립식 돔 텐트를 설치하는 요원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할게.”

    “하실 수 있겠어요?”

    “내가 이거 하나 못 할까요.”

    무경의 빈정거림에 요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아. 어디 보자.”

    무경이 보고서를 읽는 진지한 눈빛으로 조립도를 바라보았다.

    요원은 왠지 무경을 못 미더운 눈으로 옆에서 턱을 괸 채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가 또 이런 거 뚝딱뚝딱 설치하면 여자는 새삼 반하는 거거든.

    무경이 여름용 초경량 재킷을 벗어 던지자, 쿨기능이 있는 검은색 반팔티 사이로 요원이 처음부터 환장했던 남자의 전완근이 여자의 시선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남자들이 왜 조립을 좋아하는지 알아?”

    조립도까지 휙 던진 그가 준비운동을 하듯 고개를 좌우로 우두둑 한 번 비틀어 꺾었다.

    “정복욕.”

    그가 큰 폴대 두 개를 교차하여 세워주고 그라운드시트에 결합하며 이너텐트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런 거 하나하나 맞춰가면서 정복욕을 느끼는 거거든. 연애도 같아요.”

    금세 설치한 이너텐트 위에 플라이를 쳐주기 위해 플라이의 방향을 살핀다.

    “내가 호감 있는 여자와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내 밑에 여자를 눕히기까지. 그 과정이 남자에겐 아주 즐거운 여정인 거거든.”

    잘 나가다가 또 이야기가 저쪽으로 빠지는구나, 요원은 한숨을 삼켰다.

    방향이 어디야?

    플라이를 이리 돌렸다가 저리 돌렸다가 혼자 난리부르스를 치던 무경이 에이 씨발, 욕을 짓씹으며 플라이를 집어던지려다가 요원이 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곤 다시 한번 머리를 쓸어올리며 태연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남자는 조립에 환장하는 거예요. 잘하는 거고.”

    “그럼 조립을 못 하는 남자는 연애도 못 해요?”

    “아마 섹스도 못 할걸?”

    무경이 짓궂게 웃었다. 요원은 무경을 만나고 재벌을 향한 편견이 점차 깨지는 중이었다. 무경만 돌연변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무경 씨의 형이랑 누나는 어떤 사람이에요?”

    그래서 남자와 같은 피가 도는 그들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요원은 무경을 오빠라고 부르는 것을 관두었다.

    어찌 보면 요원에게 ‘하무경 씨’라는 호칭은 아주 특별한 것이었으니.

    “글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요원의 돌발 질문에 플라이를 올바른 방향으로 잡아 폴대에 끼우면서 무경은 안연하게 대답했다.

    “지옥의 사자들이 그것들을 잡으러 와서 지옥으로 간신히 끌고 내려갔는데 도저히 감당이 안 되니 저 하늘 위로 올려보내는 거야.”

    “하늘이요?”

    “니들 엿 한번 먹어보라고.”

    요원은 뭐라 할 말이 없어 두 눈만 깜빡거렸고, 플라이가 잘 고정되었는지 확인을 하던 무경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발상인지 픽, 웃으며 요원을 쳐다보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런. 벌써 다 해버렸네?”

    무경은 정말 한 번에 돔 텐트를 설치했다.

    놀란 요원의 앞으로 성큼 다가온 무경이 요원의 앞에 제 잘나 빠진 얼굴을 불쑥 들이밀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조립을 잘해서 섹스도 잘하나 봐.”

    “왜 또 말이 그쪽으로 새요?”

    “잘하잖아. 나 잘하지?”

    확인받고 싶어 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아이 같아서 요원은 그만 웃고야 말았다.

    “네. 잘해요.”

    “말로만? 몸으로도 칭찬해줘야지.”

    “몸으로 어떻게 칭찬을 해드릴까요? 이렇게 해드릴까요?”

    요원이 무경의 머리 위를 대형견 쓰다듬듯 부드럽게 쓰다듬었으나.

    “음. 이렇게는 어때?”

    요원의 목덜미를 단숨에 붙잡아 제 쪽으로 홱 끌어당긴 무경은 고개를 사선으로 비틀며 그녀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순식간에 맞물렸다.

    섞이는 타액에선 상큼하고 달콤한 레몬 맛이 느껴졌다.

    대청마루 위에서 나누었던, 우리의 첫 키스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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