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95화 (95/116)
  • 95화. 나는 당신이 진심으로

    한 시간 하고도 25분을 걸어 요원이 잡아둔 펜션에 도착했다.

    평탄하지만은 않던 한 시간 하고도 25분이었다.

    무경은 걷다가 힘들다고 툴툴대며 그 자리에 멈춰 서기를 반복했고.

    앞서 걷던 요원은 빨리 오라고 성질내다가 결국은 다시 그가 있는 곳까지 손수 걸어서 그의 옷깃을 붙잡아 질질 끌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사무실에서 체크인을 마치고 주인아주머니께 열쇠를 받아 문을 따고 들어온 두 사람은, 백팩을 바닥 위로 던져두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룻바닥 위에 철퍼덕 널브러졌다.

    와씨, 존나 빡세네. 무경이 이마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걷기는 또 행군 이후로 처음이네.”

    “행군이라면. 군대를 다녀오셨어요?”

    “아닌 것 같아?”

    “보통 재벌들은 이런저런 사유로 면제받지 않나요?”

    “무슨 소리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사회적 체면 때문에 더 가지.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요, 채요원 순경.”

    “대신 편한 곳으로 배치받으셨죠?”

    “편한 곳으로 다녀왔으면 내가 행군을 갔을까?”

    “근데 선임들이 눈치 보느라 되게 편하게 대해줬죠?”

    “나한테서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야? 군대에서 꿀 빨았다고?”

    무경이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요원의 오밀조밀한 옆모습을 기가 막힌 듯 바라보았다.

    천장을 가만 올려다보고 있던 요원도 웃는 얼굴을 비스듬히 돌려 무경과 눈을 맞추며 장난스레 묻는다.

    “네. 꿀 빠셨죠?”

    “이거 왜 이래. 나 군대 생활 정말 빡세게 했는데. 진짜야.”

    군대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재벌도 별반 다르지는 않은 모양이다.

    요원이 쿡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어요. 고생했어요.”

    무경은 어딘지 모르게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이라니까?”

    “알았다니까요?”

    “진짜라니까?”

    “알았다고요.”

    장난 같은 진지한 실랑이가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간다.

    “왜 안 믿어. 진짠데.”

    “알았어요. 믿어요.”

    그러다가 두 사람 다 한순간에 숨을 삼키듯 그렇게 멎었다.

    속였고 속았던 관계라 그런지는 잘 모르겠으나, 믿는다는 말이 아직은 서로에게 좀 불편한 말이었던 것 같다.

    “물 마실래?”

    무경이 먼저 급하게 화제를 돌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작은 냉장고를 향해 걸어가 문을 열고 1L짜리 생수통을 손에 쥐었다.

    컵으로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그 아무리 초호화 호텔의 컵도 사용하지 않는 무경이었기에 이런 펜션의 물건은 더더욱 께름칙했기 때문이다.

    잠시 펜션 내의 청결 상태를 확인하듯 생수의 뚜껑을 돌려 열어 입을 대고 마시면서 내부를 휘- 살폈다.

    주인아주머니가 청소에 진심인지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내부는 깨끗하긴 했고, 평범한 시설이었으나 숙소 주변의 풍경은 가히 예술이었다.

    특히,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저 바다가 그랬다.

    “물 줄까?”

    어느덧 눈을 감고 있는 요원에게 무경이 물었다.

    요원은 대답 대신 작은 고개를 끄덕거렸고, 무경은 호선을 그린 입매로 다시 물을 입에 머금었다.

    성큼성큼.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몸을 제 두 팔 사이에 가두듯이 그렇게 바닥을 손바닥으로 짚은 무경이 허리를 더욱 내렸다.

    고개를 사선으로 비틀며 그녀의 입술을 진득하게 머금었다.

    흡,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요원이 눈을 번쩍 커다랗게 떴다.

    놀라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여전히 차디찬 물을 쪼르르 넘겨주면서 무경은 짓궂은 소년처럼 눈을 휘어 웃었다.

    요원도 곧 빙그레 미소 지으며 무경의 목덜미에 두 팔을 둘러 그를 꽉 껴안았다.

    눈을 감고 입술은 더 벌려 그의 물컹한 살과 달콤한 물을 한꺼번에 받아들였다.

    다 받지 못한 물인지 타액인지 모를 것이 요원의 턱선을 따라 주르르, 흘러내렸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

    무경이 많이 고단했던지 잠이 들었다.

    황태자께서 오죽하실까.

    곤히 잠든 남자의 눈꺼풀 위에 입 맞추며 요원은 작게 웃었다.

    평소에도 낮잠을 잘 자지 않는 요원은 그를 남겨두고 펜션 주변을 한 바퀴 빙 돌았다.

    백야마을도 아름다웠지만, 청산도 또한 아름다웠다.

    대한민국엔 아름다운 곳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요원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주변 풍경의 사진을 찰칵찰칵 찍다가 바위에 대충 걸터앉으며 바닷가를 가만 바라봤다.

    “…….”

    그렇게 바다를 바라보았다.

    얼마 동안 바라보았는지는 가늠되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았을 뿐이다.

    “!”

    그저 바라보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데 갑자기 요원의 눈동자가 풍랑에 조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혀를 깨문 사람의 얼굴을 해선 주머니를 뒤적인 그녀가 갑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잉. 요원아. 재미나게 놀구 있냐잉? 너 시방 으디냐잉?]

    “청산도예요.”

    [이잉. 청산도를 가부러써? 거그는 좋냐?]

    “너무 좋아요. 너무 예쁘고. 할머니는 뭐 하세요?”

    [함마니가 멋하거써. 우덜끼리 노가리나 까는 거제.]

    “우리 그냥, 할머니.”

    [이잉.]

    “우리 그냥, 동녘에서 그 돈 받고 백야마을 나올까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갑순에게서 답이 들려온 건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뒤였다.

    [아야. 너 갑자기 시방 그게 먼 소리대?]

    “백야마을 아니더라도 아름다운 곳은 많으니까요. 청산도도 너무 예뻐요. 백야마을 사람들 다 같이 나와서 새로운 터전 꾸리면 어때요?”

    이제 와 이런 마음이 생긴 게 우스웠다.

    “사실 그게 우리한테 더 이득 아니에요? 가구당 12억씩 준다잖아요.”

    너무 우스워서 자신이 다 한심할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악착같이 버틸 땐 언제고.

    [이 육시랄 것이 시방 머라는 것이여? 니가 어찌 우덜한테 그란 소리를 할 수가 있냐잉?]

    기계 너머로 갑순이 경기하는 것이 생생히 전달되었다.

    [이 마을이 우덜한티 머선 의미인지 니가 참말로 몰라가꼬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시여? 딴 사람도 아니고 요원이 니가?!]

    핸드폰을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눈가를 가리니 요원의 작은 얼굴이 반쯤 가려졌다.

    “그럼 어떡해요, 할머니.”

    한숨 같은 목소리로 요원은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이 진심으로…….”

    나는 당신이 진심으로.

    요원의 뒷말은, 갑자기 그녀의 뒤로 지나가는 트럭에 의하여 완전히 묻히고 말았다.

    시간은 잡을 수가 없고 청산도에도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았다.

    펜션 앞에 마련된 나무 테이블에서 무경이 저녁으로 라면을 끓였다.

    일반 방식이 아니라 봉지라면이었는데, 군대에선 이것을 뽀글이라 부른다고 한다.

    턱을 괸 채로 그런 남자를 조금 한심한 듯 바라보던 요원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왜 굳이 이렇게 먹어야 해요? 군대 다녀오신 거 믿는다니까요?”

    “아까 군대 얘기 하니까 갑자기 이게 생각나서.”

    “건강에 너무 안 좋을 것 같은데요? 특히 그 비닐이…….”

    “아 진짜 빡빡하네.”

    무경이 라면 봉지 안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서 반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따지면 채 순경이 며칠 전에 먹은 탕후루인지 탕탕이인지는 뭐 건강에 좋은지 알아? 너 그때 마시멜로도 먹었지? 마시멜로가 설탕 덩어리인 건 알고 그런 소리 하는 거지? 지금.”

    그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어서 요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먹어봐. 진짜 맛있어.”

    뜨거운 라면 봉지의 윗부분을 잘 접어 공기가 들어가지 않게 젓가락으로 그럴싸하게 고정한 무경이 그것을 요원의 앞에 내밀며 다정한 미소를 짓는다.

    “뜨거워. 조심하고.”

    요원이 그 라면 봉지를 받아들며 물었다.

    “그 아버지란 분이요. 동녘 그룹 회장님. 어떻게 설득하셨어요?”

    “응?”

    “우리 마을에서 완전히 손 떼셨다면서요. 다 해결하고 왔다면서요. 어떻게 하셨는데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라면 봉지 안을 젓가락으로 휘젓던 무경의 행동은 아주 천천히 멎어가고 있었다.

    “한 명은 더러운 꼴 봐야 끝난다고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

    “혹시, 하무경 씨가 앞으로 더러운 꼴을 보게 되나요?”

    “…….”

    “우리 마을 가져가면 하무경 씨는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면서요. 우리 마을 못 가졌으니 하무경 씨는 그토록 원하던 자리에 못 앉게 된 거고.”

    “…….”

    “그럼 결론은, 하무경 씨가 불행해진 거네요?”

    요원은 작정한 듯이 무경이 대답할 새도 안 주고 연이은 질문을 쏟아냈다.

    “나 때문에.”

    그리고 여자가…….

    “우리 때문에요.”

    자책을 한다.

    “…….”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 미안한 표정까지 지으면서.

    어쩜 너는 이렇게 내 예측을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 건지.

    “우리 마을 가져가면.”

    착해 빠졌단 말 취소했던 거 다시 취소.

    “하무경 씨는 다시 행복해지나요?”

    어휴. 착해 빠져선.

    “…….”

    요원의 눈동자를 보자마자 무경은 알 수 있었다.

    이다음 상황 또한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다.

    채 순경은 지금 흔들리고 있는 거다.

    그 순간에, 갑자기 모든 것들이 짜증이 났던 것 같다.

    뿌리처럼 단단하고, 곧고 굳은 심지의 여자가 흔들리는 모습에 짜증이 난 건지.

    똥개 훈련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짜증이 난 건지.

    어르신들의 터전과 마지막 꿈을 지켜주겠다고 감히 우리 동녘에게 홀로 맞서는 대한민국의 채요원 순경을 진심으로 존중했던 자신의 실망감 때문에 짜증이 난 건지.

    정말이다. 나는 그간 늘 돈에 환장하고 권력에 휘둘리는 경찰 같지도 않은 짭새들만 봐와서 그런지, 채요원 너를 보면서 이야, 대한민국 순경 아직 살아있구나, 멋있구나, 아직은 살 만한 세상이구나.

    나 너 보면서 그런 걸 느꼈었다고.

    그런 네가 이제 와 흔들리면 안 되지. 내가 뭘 포기했는데.

    끝까지 굳건한 모습 보여줘야지. 그래야 내게도 후회가 없지.

    줄 거였으면 진작 줬어야지. 일이 이 지경이 되기 전에.

    다양한 생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요원을 바라보는 무경의 눈매는 점차 색이 바래듯 그렇게 차츰차츰, 날카로워져 갔던 것 같다.

    “지금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나 잘 모르겠는데.”

    적나라한 한숨을 내쉬며 피로한 눈꺼풀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던 무경이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뭐가 됐든 내 말 먼저 듣고 해요.”

    눈꺼풀을 문지르던 손을 치워낸 무경은 이제, 요원을 조금 서늘하게 쳐다보았다.

    “좀 세게 말할 거니까 기분 나쁘게 듣진 않았으면 합니다.”

    요원을 바라보는 무경은 감정이 폭발하다 못해 해탈한 사람처럼 무표정하기만 했다.

    “우린 불행의 기준이 완벽하게 달라요.”

    차가운 피가 도는 인간처럼, 마치 죽은 사람처럼, 감정의 돌기가 다 닳아버린 것처럼.

    “채 순경이 느끼는 불행이 뭔진 나 잘 모르겠는데요. 내 불행의 기준은 기껏해야 회장님이 나에게 조금 실망하신 정도? 그게 전부입니다. 그 외로는 변하는 거 없어요.”

    “…….”

    “난 늘 잘삽니다. 그리고 지금 내 기분이 좀 별로예요. 감히 시골 순경이 나를 걱정해요? 재벌가 막내아들을?”

    “그건…….”

    “내가 왜 너랑 28일만 연애하자고 했을까? 잘 한번 생각해봐요.”

    나는 너에게 또 거짓말한다.

    “백야를 완전히 잊고 내가 있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그런 겁니다.”

    끝까지 너 모르게 떠나야만 하는 나를, 너도 끝까지 모르기를 바란다.

    “내 원래의 자리라 함은, 장애물 하나 없는 탄탄대로. 손가락 하나로 모든 걸 다 누리는 삶.”

    난 끝까지 네가 모르게 떠날 것이다.

    “그러니 채 순경도 여행이 끝나는 즉시, 동녘을 잊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세요.”

    나는 너에게 끝까지 이기적인 새끼로 남는다.

    “채 순경의 자리라 함은, 그깟 시골 마을 지키는 거.”

    마지막까지 아주 쓰레기 새끼로 남는다.

    “자칭 백야마을 지킴이.”

    네 마음 조금 더 편해질 수 있게.

    “지킴이면 지킴이답게 그 마을 지키라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지금처럼.”

    그 말엔 요원의 표정이 조금 변했던 것 같다.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말고.”

    균열이 가려던 요원의 얼굴이 다시 단단해짐을 느낀 무경은 더 힘을 실어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중에 혹시라도 다른 데 빼앗기면, 우리 동녘이 아주 자존심이 상하다 못해 빡이 돌 것 같거든? 그러니 꼴 받게 하지 마요. 우리 아주 무서운 사람들이야.”

    무경은 마치 카메라 앞에 선 배우처럼, 냉했던 표정을 아주 순식간에 바꿔 다시 좋은 사람처럼 미소 지었다.

    “그래서. 채 순경이 하려던 말은?”

    요원은 단정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하려던 말은…….”

    나는 하무경 씨, 당신이 진심으로.

    “행복만 하세요.”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단순한 말에 무경의 잇새에서 아, 침음과도 같은 낮은 탄식이 흘렀던 것 같다.

    잠시 현기증을 느꼈던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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