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94화 (94/116)

94화. 느림의 섬, 청산도

배표를 구매하러 간 요원을 기다리면서 무경은 완도항 여객 터미널 앞에서 담배를 태웠다.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낸 그가 오랜만에 핸드폰 전원을 잠시 켰다.

예상대로 수많은 곳에서 연락이 와있었다.

태호의 말대로 사내 발표가 있었기 때문일 테다.

핸드폰이 터질 듯이 들어오는 메시지를 불만스레 바라보며 무경이 혀를 츳 찼다.

그중엔 호들갑 떠는 주연의 메시지도 있었는데, 어떻게 글자로도 이렇게 시끄러울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물론 능력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심각성을 깨달았다.

얘는 어떻게 우리 동녘의 이야기를 이렇게 빨리 접할 수 있었을까? 아직 외부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인데.

아무래도 동녘에 스파이를 심어둔 모양이다. 쥐 잡듯 뒤져봐? 이러다가 기자들 귀에라도 들어가면.

그러다가 이내 또 고개를 젓는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움직여 수많은 메시지의 발신자를 확인하던 무경의 눈에 한 사람의 이름이 유독 커다랗게 들어왔다.

도현이었다.

담배를 뻑뻑 빨면서 그 메시지를 읽을까 말까 고민하던 무경은 곧 울리는 핸드폰을 바라봤다.

액정에 뜨는 태호의 번호에 무경이 핸드폰을 귓가로 밀착시켰다.

“네, 실장님.”

[상무님. 제가 보내드린 인도 숙소 사진은 보셨습니까?]

“숙소. 호텔이 아니라 숙소?”

되묻는 음성이 사포처럼 까칠했다.

[지사 근방엔 호텔이 없습니다. 그래도 시설 괜찮은 곳으로만 추렸으니 한번 시간 나실 때 봐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았기에 무경은 목덜미를 문지르며 건성으로 물었다.

“욕실은요.”

백야마을에 거주한 이후부터 자꾸만 욕실에 집착하는 무경이 태호는 어딘지 모르게 짠했는지 아니면 웃음을 참기 위해서인지, 잠시 말이 없었다.

[당연히 있습니다.]

“그래요. 욕실이라도 있으면 됐지.”

전의를 상실한 목소리가 한땐 검은 재규어라 불리던 남자의 입에서 우습게 흘렀다.

“근데 말이에요. 근처에 한식집은 있나? 차태호 실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나 아무거나 못 먹는데. 향료 질색인데 먹을 거 없어 맨날 카레만 주야장천 먹는 거 아니냐고.”

[아닙니다, 상무님. 지사에 한식 만들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담배를 몇 모금 더 빨아대던 무경이 연기를 한숨처럼 길게 내뱉었다.

“용한 점집이나 알아보세요.”

[예?]

“인도 나가기 전에 굿이나 한판 하고 가야겠어. 언제부턴가 내 인생이 이상하게 꼬이잖아.”

태호는 이번에도 무경이 짠했는지 아니면 웃음을 참는 건지 또 말이 없었다.

“이만 끊죠.”

발끝에 가 있던 시선을 느리게 들어 올린 무경이 한 사람을 아득하게 바라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배에 올라야 합니다.”

저 멀리서 배표를 흔드는 요원이 보였기 때문이다.

[배요? 배를 타십니까?]

“내가 여행 중이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요.”

[아…… 예.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무경이 다 태운 담배꽁초를 툭툭 털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욱여넣으며 찬란하게 웃고 있는 그녀에게로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선다.

그렇게 나는 너에게 다가선다.

***

완도에서 청산도까지 배로 넘어가는 시간은 총 50분.

꽤 커다란 배의 실내는 의자에 앉아서 갈 수도 있고 방에 앉거나 누워서 갈 수도 있는 편리한 시설로 구성되어 있었다.

실내에 마련된 방 안엔 커다란 유리창도 있어 끼룩끼룩 갈매기가 날아가는 바깥 바다의 풍경도 볼 수가 있고, TV도 있어 지루하지 않게 갈 수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 짧은 50분이 누군가에겐 50시간인 듯 보인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요원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무경은 뱃멀미에 고통을 호소하듯 중간중간 눈썹 앞머리를 격하게 찡그리곤 했으니.

평소라면 누운 자세도 아주 쩍벌이었을 것 같은데, 지금 남자는 속이 많이 불편한지 긴 다리를 구부리고 제 몸을 방어하듯 팔짱을 낀 채로 한껏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요원은 남자가 꼭 새우 같다고 잠시 우스운 생각을 했다.

이럴 줄 알고 그에게 씹어먹는 멀미약도 먹였건만 약 효력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요원이 생수통을 그러쥐며 물었다.

“물 좀 드실래요?”

생수통에 친절하게 빨대까지 꽂아서 입 앞으로 넘겨주었건만 그는 입을 꽉 다문 채로 고개만 젓는다.

“빨대까지 꽂았는데요? 한 모금만 쭈욱 시원하게 들이켜면 될 것 같은데요?”

아이를 대하듯 어르고 달래보아도 무경은 귀찮게 하지 말라는 듯이 더더욱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단호하게 저을 뿐이다.

그래, 뭐. 멀미할 땐 물도 메슥거릴 테니까.

요원이 다시 생수 뚜껑을 돌려 닫으며 유리창 너머의 갈매기를 바라보았다.

“하무경 씨가 아니라 오빠.”

이래서 습관이란 것이 무서운 모양이다. 도무지 ‘하무경 씨’란 호칭이 입에서 씻기질 않으니.

“밖에 쉼터에 나가서 바닷바람이라도 쐴까요? 그러면 속이 덜 메슥거릴 수도 있을 텐데요.”

무경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한쪽 손을 성의 없이 까딱 흔든다.

너나 가라는 손짓임을 모르지 않는다.

“남자가 뭐가 이렇게 약해 빠졌어. 툭 하면 위경련에 뱃멀미에 비위도 약하고 아주.”

자신도 모르게 읊조린 말을 무경이 들었는지 눈을 감은 채 차게 코웃음 친다.

“남자가 침대에서만 강하면 되지…….”

“뭐라고요?”

“남자가…….”

“안 들려요.”

“남자…….”

무경이 뭐라뭐라 중얼거리는데 그 목소리가 소음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바다가 참 예뻐요.”

네가 더, 라고 웅얼거리는 무경의 그 말을 요원은 또 듣지 못했고 그저 벽에 머리를 툭 기댄 채 유리창 너머로 펼쳐지는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무경의 어깨 위를 토닥토닥하는 요원의 손짓은 너무도 다정했다.

커다란 백팩을 메고 배에서 내린 두 사람을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은 「느림의 섬 청산도」라고 적혀있는 달팽이 조형물이었다.

원래 계획은 완도에서 차를 렌트해서 그 차를 끌고 배에 올라타 청산도에 오는 것이었으나, 시간이 많이 촉박했던 관계로 차 없는 여행을 택했다.

청산도가 큰 섬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차가 있어야 다니기 편리한데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

그럼에도 청산도는 슬로길이 있는 곳으로, 걸어서 여행하기에 적합한 곳이기도 했으니 이 또한 추억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이것은 요원만의 생각일 수도 있고 무경에겐 힘든 여정이 될 수도 있었기에 원망을 듣진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요원은 배에서 그에게 여러 번 반복하여 말했다.

‘황태자님이 언제 이런 다이나믹한 여행을 또 해보겠어요?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생각하시고 즐기세요. 원래 몸이 고된 여행일수록 머릿속에 더 오래 남는 추억이 되는 거거든요.’

눈물겨운 노력으로 무경을 세뇌시켰다.

“음.”

배에서 내리자마자 요원은 핸드폰을 꺼내 자신들이 예약해둔 펜션까지의 거리를 계산했고.

무경은 쭈그리고 앉아 여전히 울렁이는 가슴을 오만상을 찡그린 채로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핸드폰을 보며 어떻게 가야 할지 방향을 잡고 있던 요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경을 힐끗 한번 바라봤다가 나직한 한숨과 함께 다시 길을 확인했다.

새벽부터 움직인 고된 일정에 역시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터라, 갑자기 울컥 치미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무경을 찌릿 다시 쏘아보며 소리쳤다.

“아 진짜 생각할수록 빡치네?”

“뭐?”

“빡친다고요!”

“빡이 쳐?”

그녀의 입을 통하여 처음 듣는 비속어에 무경의 한쪽 눈썹이 의문을 담아 비딱하게 치솟았다.

“네! 너무 빡쳐요!”

요원이 성큼성큼 걸어 일정 거리 벌리고 앉아있는 무경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어쩜 그렇게 손 하나 까딱 안 하세요?”

가시 돋친 음성엔 무경이 주춤거렸다.

“하는 게 대체 뭔데요?”

앉아있는 무경의 위로 요원의 어두운 그림자가 무서운 기세로 덮쳐들었기 때문이다.

“예약도 내가 해, 거리도 내가 계산해, 음식 주문도 내가 해, 길도 내가 다 찾아. 하무경 씨는 나한테 카드만 슥 건네주면 내가 쪼르르 달려가서 결제까지 다 하고. 하무경 씨가 돈 낸다고 너는 몸으로 때워라 그거예요, 지금? 아니 돈도 많은 사람이 돈 좀 더 내는 게 그렇게도 아니꼬웠어요? 아이씨, 이럴 거면 여행비 그냥 반반 내! 저도 돈 있거든요? 하무경 씨가 돈 다 낸다면서요! 다 해준다면서!”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혼쭐이 난 이 상황에 무경은 넋이 나간 채로 두 눈만 느리게 감았다 뜰 뿐이었다.

속이 여전히 메슥거려 받아칠 기력도 없었지만, 무경은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난 원래 아무것도 안 해.”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나았겠다.

안 그래도 들끓는 요원의 가슴에 더 들끓어라, 기름을 퍼부은 격이었으니.

“내가 모시는 상사도 아닌데 아주 1부터 100까지 챙겨주지를 않으면! 하무경 씨가 아니라 오빠는 태생이 재벌이신 건 제가 아주 잘 알겠는데요! 지금 나랑 있는 이 순간은 재벌도 뭣도 아니거든요? 우리는 평등하고 동등한 관계로 이 여행길에 오른 거거든요? 갑을 관계가 아니라고요!”

요원이 빼액 소리 질렀고 무경의 잇새에선 결국 웃음이 흘렀다.

하하, 실소는 곧 호탕함으로 변하였다.

“어이없네.”

읊조리던 그가 구부정하게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착해 빠졌단 말 취소.”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장신의 남자가 눈앞에 높이 치솟으니 요원의 시선도 자연스레 함께 따라 올라섰다.

“성질머리하고는.”

“뭐라고요? 성질머리?”

“그것 좀 해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온갖 생색은.”

“생색?”

“가져와. 내가 할게.”

미간을 찡그린 무경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요원의 핸드폰을 가리킨다.

요원은 제 핸드폰을 숨기듯 몸을 비틀었다.

“그쪽 핸드폰은 아껴뒀다가 국 끓여 먹을 건가? 그쪽 핸드폰 쓰지?”

“그쪽? 자기랑 나랑 지금 배에서 만났어? 우리 지금 연애하는 거라니까?”

“허이구, 연애요? 제가 지금 귀하신 재벌 나으리 모시고 전국팔도 관광시켜드리는 게 아니라요?”

하, 차디찬 웃음을 터트린 무경이 제 양 허리춤에 손을 비스듬하게 얹으며 후, 바람을 불어 앞머리를 대충 흩날렸다.

“말 다 했지.”

요원도 지지 않고 제 허리춤에 손을 얹으며 무경을 정시한 채 답했다.

“네. 지금은 다 했는데요.”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대치 상태를 이루고 있는 두 사람을 힐끗거리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미숙한 연인들의 사랑싸움이라고 하나?

우리는 그런 걸 처음으로 ‘느림의 섬’ 청산도에서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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