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93화 (93/116)

93화. 장남이 권력을 쥐었다

샤워를 하고 나온 두 사람에게선 어김없이 같은 샴푸 냄새와 같은 바디 워시 향이 났다.

투베드였지만 침대가 나란히 붙어 있었기에 두 사람도 그 넓은 매트리스 위에 함께 붙어 있었다.

선선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아래에서 노곤한 몸을 뉜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요원은 엎드린 채로 챙겨온 노트 위에 무언가를 적어나갔고, 무경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로 방금 막 핸드폰으로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발신자는 태호였고 들어온 건 비행 스케줄이었다.

그것도 왕복이 아닌 편도.

-인도 지사는 지금 축제 분위기입니다. 하무경 상무님이 가신다고 하니 무언가 달라질 거라 잔뜩 기대하는 눈치입니다.

기대는 씨발. 회장님한테 버림받고 쫓겨나는 거 모르지 않을 텐데. 속으로 존나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무경이 작게 코웃음 치는데 태호에게서 메시지 하나가 더 들어왔다.

-여행은 어떠십니까? 채 순경님께도 안부 전해주십시오.

또 선 넘네? 뭐라 하려다가 말았다.

태호가 제게 이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얼마나 고민했을지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무경이 핸드폰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올렸다.

저와는 반대 방향에서 등을 보인 채로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이는 여자의 모습을 관망하다가 핸드폰을 엎어두곤 몸을 움직였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해요. 고3 수험생처럼.”

요원과 같은 방향으로 엎드린 무경이 한 손으론 턱을 괴고 다른 큼직한 손은 그녀의 정수리 위에 얹으며 설핏 미소 지었다.

요원은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했다가 그것을 노트에 옮겨 적으면서 대답했다.

“음. 일단 서부 버스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 종합 버스 터미널로 갔다가 거기에서 또 시외버스를 타고 완도 터미널로 넘어가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배를 타고 청산도로 들어가면 돼요. 13시 배가 있으니까 우리는 부산에서 새벽 첫차를 타고 움직이면 될 것 같아요.”

이야기만 들어도 존나 빡세네.

무경이 시간을 계산하는 요원의 어깨 위에 턱을 넌지시 기대며 칭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냥 차 렌트해서 운전해서 가면 안 돼?”

“그게 더 힘들어요. 버스에선 잠이라도 잘 수 있죠.”

무경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술을 들썩였는데 요원이 조금 더 빨랐다.

“그리고 저 운전 안 할 거예요. 저한테 운전시킬 생각은 꿈도 꾸지 마세요.”

“알았어.”

속마음을 들킨 사람처럼 곧장 대답하면서 무경은 요원의 갸름한 턱선을 혀로 한번 장난스레 핥았다.

“왜 이래요.”

요원이 움찔대는 것을 바라보면서 무경은, 그녀가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노트를 빼앗아 덮고 볼펜도 저 멀리로 던져버렸다.

“아 정말!”

“우리 청산도에 은하수 보러 가는 거잖아.”

무경이 요원의 몸을 돌려 눕히면서 자신이 그 위로 자연스레 올라탔다.

“그렇죠.”

자신을 올려다보며 대답하는 요원의 적갈색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면서 무경은 말을 덧붙였다.

“나는 사실 그깟 은하수에 관심이 하나 없거든.”

한 손으로 요원의 양 손목을 붙잡아 매트리스 위로 꾹 누르면서 무경은 그녀의 몸을 가뿐하게 결박시켰다.

“나는 채요원한테 관심이 더 많아서.”

무경이 상체를 서서히 내려 요원의 새하얀 목선을 훑어내리듯이 입을 맞췄다.

아래에서부터 느껴지는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남성의 욕정에, 요원은 그에게 제 목을 얌전히 내준 채로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다.

“발정이라도 났어요? 뭐가 이렇게 금방…….”

“응. 나는 발정 난 개새끼야.”

짓궂게 웃으며 왈왈 짖는 시늉을 하던 무경이 요원이 입고 있는 파자마 바지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발정 난 건 이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팬티 아래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면서 무경은 요원의 귓불을 살짝 깨물면서 농염하게 웃었다.

요원의 두 뺨이 벌게진 것도 잠시.

“오빠.”

그의 손에 붙잡혀있던 제 손을 가뿐하게 빼낸 요원이 무경의 목덜미가 동아줄이라도 된 듯이 그렇게 두 팔을 둘러 남자를 힘껏 끌어안았다.

요원은 아까 무경이 예시를 들었던 그 표정을 그대로 짓고 있었다.

고양이처럼 새침하게 쳐다보며 오빠- 라고 부르는 것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채요원은 선수가 맞는 것 같아.

무경이 눈매를 가늘게 찡그린 사이, 요원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무경의 손을 끌어올려 중지와 검지를 제 입안에 넣고 쪽쪽 사탕처럼 빨아대는데, 그 혼몽하게 풀어진 여자의 얼굴에 무경의 어딘가에 더욱 혈액이 몰리며 단단해졌음을 느꼈다.

“넣어줄까.”

고저 없이 묻는 무경의 짙고도 검은 눈빛에 아찔한 섬광이 스친 건 찰나였다.

요원은 계속 그의 손가락을 빨며 고개를 주억거렸고 무경은 그녀의 입안에서 빨리던 제 손가락을 아래로 내려 그녀의 팬티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여자의 안쪽에 젖은 두 손가락을 매끄럽게 집어넣었다.

하아, 요원의 잇새에서 색정적인 신음이 터지면서 그녀의 작은 고개가 절로 뒤로 젖혀진다.

오늘은 얌전히 잡아먹혀 주려고 했더니, 음탕하게 잡아먹게 생겼네?

자신을 미치게 하는 요원의 하얗고도 새하얀 목덜미에 더운 입술을 문지르면서, 무경은 손가락만으론 만족이 되지 않아 바지를 끌어 내렸다.

새벽이 짙어졌다.

무경은 제 품에서 곤히 잠든 요원을 바라만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새하얗게 발광하는 요원의 얼굴을 신기한 것을 구경하듯이 그렇게 한참을 바라만 보았다.

이마 위로 흩어진 저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고 싶은데, 그러면 혹여 깰까 봐 차마 건드리지를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나저나 팔이 존나게 저린데.

요원이 팔베개 하고 있는 제 한쪽 팔에 감각이 없는 것 같다.

갑자기 지이잉 하고 울리는 핸드폰에 흠칫 놀란 무경이 그 팔을 조심스레 빼내니 으으응, 요원이 찰나에 눈매를 찡그리며 앓는 소리를 낸다.

안 돼. 깨지 마. 제발 깨지 마.

무경은 마치, 잠에서 깨려는 아이를 보듯이 경직된 낯빛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그녀의 얼굴이 평온함을 되찾고 곤히 잠에 빠지자 그제야 안도의 숨을 삼켰다.

지이잉. 지이잉.

그녀의 이마 위에 제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가 떼어낸 무경은 액정에서 사라지지 않는 태호의 이름에 얼핏 미간을 좁혔다가, 침대 맡에서 몸을 일으켜 세워 독채 밖으로 잠잠히 나갔다.

“우리 차태호 실장님은 잠도 없으신가?”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 대자마자 시니컬한 음성이 리듬을 탔다.

[죄송합니다.]

사과부터 한 태호에게선 제법 오랜 시간 들려오는 말이 없었고, 무경은 요원이 있는 독채와 더 멀어졌다.

태호에게서 잠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무경이 벤치에 몸을 앉힌 뒤다.

[저도 지금 막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너무 놀라고 갑작스러워서…….]

태호가 말을 하다 말고 침묵했고 무경은 제 머리칼 안쪽에 대충 손을 찔러넣으며 차가운 음성으로 서늘한 말을 뇌까렸다.

“뭐. 회장님이 운명이라도 하셨어요?”

표정이나 말투는 태연자약하였으나 제 몸을 수색하듯 더듬거려 담배를 찾는 몸짓은 아니었다.

[내일 위에서 공지가 내려온답니다.]

“뭐죠.”

주머니에 습관처럼 지니고 다니는 담뱃갑을 찾아낸 무경이 기다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면서 나직이 되물었다.

“차태호 실장님. 뭔데요.”

[회장님의 시한부 발표와 함께 비상 경영 체제 돌입으로 하태경 사장이 당분간 회장직을 수임한단 내용이랍니다.]

눈매를 가늘게 찡그리며 라이터를 위로 올려 탕, 튕긴 무경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 매캐한 연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래요?”

물으며 길게 연기를 뱉었다.

장남이 권력을 쥐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버지의 촉망과 예쁨을 한몸에 받는 막내가 형을 제치고 회사를 먹으려고 했던 상황 자체가 형으로선 존나 어이없고 개빡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내가 더 뛰어났음에도.

장남으로서 누구보다 빡센 후계자 수업을 받았던 것을 모르는 이가 없으니.

결국, 우리의 인생은 관점 차이다. 누구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상황은 완벽히 달라진다.

그래서 내가 니들을 끝까지 독하게 미워할 수가 없어.

담배를 뻑뻑 빨아대던 무경은 언젠가 그 상황을 알아차릴 요원이 신경 쓰였다.

“기사도 납니까.”

저의 그녀만이 신경 쓰였다.

“차태호 실장. 내일 기사가 나가느냐고 묻잖아.”

전에는 없던 반말이 흘렀다. 그만큼 마음이 소란했기 때문이다.

[기사는 당분간 나가지 않을 겁니다. 회장님 시한부 소식이 아무래도 주가 등에 영향을 미칠 테니까요. 내부부터 단단히 잡고 외부에 알리기로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그 심정을 태호는 다 아는 사람처럼 침착한 말씨로 무경을 진정시켰다.

후우- 검은 하늘을 향해 회색빛 연기를 길게 내뱉던 무경이 피식 실소하며 중얼거렸다.

“우리 형님, 오랜 숙원사업 하나 해내셨네.”

나는 다 잃었는데.

킥, 웃음을 터트린 무경이 담배를 걸고 있는 손으로 눈썹 앞머리를 문질렀다.

세상은 따뜻하였으나 이상하게 혼자서만 차가운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날씨 속에 갇혀있는 듯했다.

그러다가, 문득.

아니지, 아직은 아니잖아, 라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끊습니다. 주무세요.”

담배꽁초를 집어던진 무경이 벤치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욱여넣으며 걷던 그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져 독채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타탁. 탁. 탁.

그의 발걸음 소리가 물웅덩이에 파문을 일으킨 것처럼 고요한 주변을 울렸다.

독채로 들어선 무경은 숨을 조금 가쁘게 내쉬면서 침대 위에 곤히 잠들어있는 여자를 보았다.

머리보다 먼저 앞선 몸이 요원의 뒤에 누워 그녀의 허리를 제 품으로 꽉 당겨 힘껏 끌어안았다.

“으응…… 담배 냄새…….”

“미안. 씻을게.”

요원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고, 무경은 그런 요원의 새하얀 어깨 위에 입술을 묻으며 고단한 두 눈을 감았다.

세상이 다시 따뜻해졌다.

나의 곁엔 아직 그대가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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