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90화 (90/116)

90화. 동녘의 민낯

하 회장이 백운으로 호출한 사람은 비단 무경만이 아니었다.

무경이 싫어하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동녘의 삼 남매와 정연이, 말이 없는 하 회장을 가만 응시했다.

“나가 태경이하고 가경이한티 고백할 것이 있드라고.”

무덤 속처럼 고요하던 실내에서 한참 말이 없던 하 회장이 침묵을 깨고 드디어 운을 떼었다.

“이 아부지가 사실은 말이다. 하무경 상무한티 이 동녘을 앵겨줄라고 했었다.”

“네?”

동녘 삼 남매의 얼굴이 비슷한 듯 다르게 일그러졌다.

“대한민국엔 백야마을이란 째깐한 마을이 있다.”

저 능구렁이 같은 새끼, 하태경과 하가경의 실낱같은 눈매가 무경을 그렇게 쳐다보았으나 무경의 굳어진 시선은 하 회장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부지 어릴 적 고향이었는디. 아부지는 고향서 좋은 기억이 한나도 없다. 죽을 때가 된께 이 맺힌 한이 다시 들끓었다 안 하냐. 글서 무갱이한티 그 마을 밀어불자 했제. 우리 동녘의 아웃렛을 냅다 깔아부러 가꼬 우덜을 백야에 새겨 불자고.”

하 회장은 그러쥐고 있는 찻잔을 더 거세게 움켜쥐었다.

“나는 땅바닥에 처백힌 고놈들한테 보여주고 싶었다. 니들이 병신 아들이라고 기만하고 멸시하던 그 놈이 이라고 성공해서 니들 자식을 어찌케 고향서 몰아냈는지 봐봐라.”

하 회장이 분을 집어삼키듯이 샹들리에를 잠시 쏘아보았다.

“그래도 고향이라고 좋게좋게 가고 싶었다.”

그 시선을 다시 내려 동녘 삼 남매를 바라보며 말을 마저 잇는다.

“그래서 하무경 상무를 보냈제. 그게 내 최대의 실수였제. 우리 태경이나 가경이를 보냈어야 한디.”

아까부터 삼 남매는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우리 무갱이’에서 하무경 상무로 호칭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무경이 제 눈썹 앞머리를 문지르며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버지를 모르지 않는다.

보듬을 땐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게 철저하게 보호하고, 내칠 땐 칼 같은 분임을.

그래서 하태경과 하가경도 내쳐지지 않기 위해 저렇게 발악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나도 한땐 그랬으니.

“글씨, 저 하무경 상무가 거기 가시나한테 흠뻑 빠져가꼬 이 애비고 그룹이고 다 내처부러써야?”

하 회장의 평소와는 다른 눈빛이 무경을 가만 바라본다.

“백야마을 건들지 말라고 죽어가는 이 애빌 협박하드랑께?”

저의 서늘한 몸통으로 먹이를 칭칭 감아서 그 먹이의 숨통을 금방이라도 끊어버릴 듯한 뱀 같은 눈이었다.

“그깟 촌 가시나 한나 땜시 이 애비 등에 칼을 꽂아야.”

“어머. 웬일이니.”

하가경이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가 하 회장 앞인 것을 자각하곤 얼른 제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감췄다.

“알것냐, 태경아 그리고 가경아.”

무경에게 머물러 있던 하 회장의 시선이 하태경과 하가경을 바라보며 먹이를 던져주듯 그렇게 본론을 던진다.

“이게 바로 니들이 인제껏 경계하고 무서하던 하무경 상무의 약점이다.”

생각보담 별거 없제?

하 회장이 그 말을 덧붙이며 웃었다.

“그랑께 내가 혹시라도 하무경 상무보다 먼저 가게 되믄 말이다. 저 시끼가 갑자기 인도로 못 나가거따 깽판을 치면 말이여? 이 백야마을 갖고 협박을 해서라도 꼭 인도로 보내야 쓴다. 하무경 상무는 무조건 인도로 나가야 써. 알아 듣것냐잉?”

하 회장은 진지했지만, 무경의 잇새에선 웃음이 비집고 흘렀다.

엄지로 입술을 누른 채 쿡쿡 어깨까지 떨어가며 웃었다.

“하.”

잠시 고개를 뒤로 젖혀 눈이 부신 샹들리에를 찡그린 채로 바라보던 무경이 나직한 음성을 꺼냈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

여전히 웃음기 남은 목소리였지만 한껏 비틀렸다.

“제 사람들과 백야마을의 안전만 보장해주시면 제가 반드시 나가겠다고 회장님 앞에서 약조를 드렸는데, 왜.”

그 웃음기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무경의 얼굴에서 빛의 속도로 사라지며 하태경과 하가경을 잠시 차갑게 쳐다본다.

“대체 왜.”

후. 피로한 얼굴로 머리를 한번 쓸어올린 무경이 제 주머니를 뒤적여 멘톨 사탕이 든 틴케이스를 꺼냈다.

그래, 씨발. 다 죽자, 오늘.

“하태경 사장님.”

그렇게 마음먹은 무경의 눈빛이 돌연 사냥개처럼 변한 건 순간이었다.

“신수민 씨 잘 있어요?”

약을 털어 넣듯 입안에 사탕을 몇 개나 털어 넣은 무경이 다 비어버린 틴케이스를 테이블 상판 위로 챙 던지며 느른하게 팔짱을 끼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내가 쓰리썸까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포썸은 좀…….”

눈매를 한번 찌푸렸던 무경의 입가가 호선으로 휘어져 묻는다.

“그렇지 않나? 나는 좀 그렇던데.”

웬만해선 표정 변화가 없는 하태경의 동공이 크게 뜨여 하 회장을 곧장 바라봤다.

“남자 둘에 여자 둘. 이건 뭐 짐승 새끼들도 아니고 서로 파트너 바꿔가면서 넷이 한 침대에서 엉겨 붙고 노는데, 이야.”

무경이 비아냥 서린 감탄성을 터트리며 박수를 짝짝짝 절도있게 쳤다.

“그 남자 새끼 말이에요. 정나경 양 아버지던데? 국무총리 정상철. 맞죠?”

“하무경 상무. 우린 나중에 얘기하자.”

하태경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묻어나왔다.

“나중은 무슨.”

꽤 오랜만에 접하는 하태경의 인간적인 모습이라 생각하며 무경은 웃었다.

“오늘 다 끝내.”

조금 사납게 목덜미를 문지르던 무경이 그 목을 우두둑 좌우로 한 번씩 꺾었다.

마치, 준비운동을 하듯이 말이다.

“아랫도리로 의형제를 맺으신 아주 특별한 관계라 그런가? 그 마약쟁이 딸을 이 동생하고 맺어주려고 해요? 내가 생각하면 할수록 아주 꼴 받아 미치겠어.”

정연은 아주 끔찍한 광경을 목도하는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았고 하 회장은 놀라우리만큼 표정이 없었다.

그저, 함묵한 채 세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기만 할 뿐.

“언론에 뿌리려다가 내가 참았어요. 쓰리썸까진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거든요. 근데 이게 포썸은 진짜. 너 같은 개새끼가 내 형이라는 게 존나 쪽팔려가지고 말이에요, 이 더러운 걸레 새끼야.”

“그만하라고, 이 새끼야!”

하태경의 성난 외침 뒤로 푸흐흡, 하가경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가경은 고개를 떨어트리고 어깨까지 떨어가며 웃어댔는데, 그녀에게로 시선을 비스듬히 떨어트린 무경은 비소하며 또 폭탄을 투하한다.

“누님은 뭐 좋다고 또 실실 쪼개고 있어요. 배우 스폰해주고 뒤로 성상납이나 받고 있는 주제에.”

헉.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려 하 회장을 급하게 바라보는 하가경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찰나에 사라졌다.

“아주 서로 69자세로 물고 빨고, 씨발. 누님이 왜 여태 결혼을 못 했는지 내가 이제야 알 거 같아.”

“야…… 야 이 새끼야. 너 이 새끼야. 너 진짜 조용히 안 해?”

하가경의 눈동자에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식탁 밑의 발이 무경을 툭툭 다급하게 친다.

“그 배우 새끼 말이에요.”

무경은 그런 발재간 따위는 개의치 않으며, 하가경에게로 제 잘난 얼굴을 불쑥 들이밀듯 그렇게 상체를 가까이 기울이며 피식 웃었다.

“스탠포드 출신의 온갖 지적인 이미지로 메이킹 잘해놔서 난 진짜 그런 줄 알았거든? 근데 누님한테 아주 별의별 서비스를 다 해주는 스킬이 보통이 아니기에 좀 알아봤는데요. 그 새끼 그거 호빠 출신이데? 나 아주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감쪽같이 속여? 누가 연기파 배우 아니랄까 봐.”

“안 닥쳐, 이 개 같은 새끼야?!!”

“내가 그 새끼한테 가서 한 수 배워야겠더라, 이 썅년아.”

정연은 이 추잡한 소란 속에서 어수선한 얼굴로 이마를 괴었고, 삼 남매를 가늠하는 것 같은 하 회장의 표정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이 말의 결론은 말이에요.”

무경이 깍지 낀 손 위에 턱을 괴며 생글 또 웃는다.

“백야 건드리지 마. 니들 약점? 내가 더 많이 쥐고 있어.”

언젠가 있을 진흙탕 싸움에 대비해서 모아둔 자료만 수두룩.

언론에 이 자료들이 뿌려지면 치명타를 입는 사람은 하무경이 아닌 하태경과 하가경이다.

하태경은 무려 국무총리와 포썸 스캔들에 연루가 되어있고, 하가경은 지적인 이미지로 먹고사는 잘나가는 A급 배우와 섹스 스캔들 및 스폰 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니.

미혼인 하가경은 그렇다 쳐도 하태경은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고귀한 이미지를 중시하는 홍서현이 제 남편이 그런 더러운 스캔들에 휘말리는 꼴은 또 죽어도 못 볼 테니까.

어디 그뿐인가.

홍서현도 하태경의 내연녀를 물론 알고 있을 테지만, 하태경이 자신을 두고 세컨을 만들었단 사실을 온 국민이 알게 되는 날이 오면, 그 박살 나버린 대단하신 자존심을 누가 다시 붙여줄 것인지.

하태경 쪽으로 향해있는 일부 이사진들의 지지는 홍서현이 모두 다 만들어둔 것이었으니, 이 포썸 스캔들이 터지고 나면 하태경에겐 득 될 것이 하나 없었다.

반면, 무경은 어떠한가.

사생활 하나만큼은 깨끗한 사람이 아니던가.

제 형 누나를 보며 배운 것이 있어, 자기관리를 정말 병적으로 철저하게 했었지.

하태경과 하가경이 그 철저함을 깨부수려 유혹의 덫을 지뢰밭처럼 여기저기 설치해 두었어도 무경은 잘만 피해 갔었다.

서울에서도 고난도의 온갖 유혹을 다 견뎌냈던 무경이 그깟 작은 시골 마을에서 순경한테 꼴려서 한 번만 달라고 사정을 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지만.

그러니 이쯤 되면 하태경과 하가경은 알아야 했다.

무경이 자신들을 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치지 않는 것임을.

“이게 저희의 민낯입니다, 회장님.”

무경이 제 손목시계로 시선을 떨어트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예고편만 잠시 보여드렸는데. 어떻게.”

장기 여행에 준비할 것이 많았으니 이제 다 털고 일어날 시간이다.

“좋은 감상 하셨습니까?”

와드득, 멘톨 사탕을 모두 다 씹어 넘기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무경이 하 회장을 차게 깔아보았다.

“이 추잡하고 난잡한 민낯들, 동녘 이름 걸고 본편으로 한번 넘어가 볼까요? 대한민국에 죄다 까발려 봐요?”

무경의 비딱한 음성에도 하 회장은 정말 좋은 감상을 한 사람처럼 입술을 끌어올리며 화제를 돌렸다.

“본사는 다 정리했다고 들었네잉. 휴가도 냈다고 하던데. 그 가시나랑 어디 여행이라도 갈라고?”

“채요원입니다. 가시나가 아니라.”

“그 가시나도 니가 누군지 아냐잉?”

“채요원입니다. 제가 누군지도 알고요.”

“니가 멋하러 그 백야에 갔는지도 다 알고잉?”

“알기만 하겠습니까.”

“근데도 너 따라 여행을 간다 허냐.”

하 회장이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잘 아는 무경도 보란 듯 웃으며 답했다.

“그래서 저희는 만나는 기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회장님. 그 기간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은데요.”

“무갱아.”

하 회장이 무경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묻는다.

“이제 날 원망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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