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88화 (88/116)
  • 88화. 내가 현재니까

    꿈인가. 취했나. 나는 이제 환각까지 보나.

    눈을 질끈 한번 감았다가 다시 떠봤다.

    남자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하무경 씨…….”

    요원의 새하얀 손이 단단한 남자의 뺨을 잡았다.

    “이거…… 꿈이에요?”

    남자는 요원의 손에 제 얼굴을 맡긴 채로 빙그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무경 씨…… 맞아요?”

    고개를 끄덕거리는 남자를 마치 환상을 보는 듯이 눈을 깜빡이며 시야에 담았다.

    한번 눈을 깜빡일 때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듯이, 그렇게 말이다.

    “회장님 설득했어. 손 떼셨어. 다 해결하고 왔어. 백야는 이제 동녘으로부터 영원히 안전해.”

    돌봐주지 않으면 며칠 만에 시들어버리는 식물처럼, 요원의 머리가 그 잎이 되어 남자의 가슴에 서서히 기댔다.

    남자가 흠칫거린 것도 잠시, 그가 요원의 뒤통수를 힘있게 품으로 끌어안았다.

    “우리도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서. 0으로 다시 돌아가서.”

    “…….”

    “28일만 연애할까.”

    두 사람이 속해있는 오색찬란한 밤거리는 시끄러웠고 남자의 음성은 지독히도 고요했다.

    “연애하자, 우리. 내가 다 해줄게.”

    “왜 하필…… 28일인데요?”

    “나랑 그 이상 연애하고 싶어? 나 너한테 진짜 나쁜 새끼잖아.”

    “그걸 아는 사람이 나랑 연애하자고 해요?”

    “그래도 연애해. 28일은 해. 네 마을 지켜줬잖아. 그럼 너도 나한테 하나는 줘야지.”

    모순이자 궤변이다.

    누가 누구 마을을 지켰다는 건지. 애초부터 건드려선 안 되는 걸 건드리려 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이런 남자와의 관계는 늘 불편했으나, 남자의 품 안이 어느 곳보다도 편안해서 요원은 조금 더 남자에게 기댔던 것 같다.

    “미련이 남아서.”

    무경은 그런 요원의 이마 위에 입술을 맞댄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너랑 못 해본 게 많아서. 다 하고 싶어.”

    “뭘…… 다 해요.”

    “같이 여행도 가고. 전망 좋은 카페에서 몇 시간 동안 아무런 방해 없이 대화도 나누고. 맛집도 찾아 돌아다니고. 몇 시간 줄도 서고 기다리면서 툴툴거리고. 그러다가 별것 아닌 거로 다투고 화해하고. 뮤지컬도 보러 가고. 연극도 보러 가고. 쇼핑도 하고. 그냥 다.”

    상상만으로도 설레고 행복했다. 남자와는 일절 꿈꿔본 적 없던 평범함이었으니 말이다.

    “다 해줄게. 그러니까 하자. 응? 우리 채 순경 착하잖아.”

    그래. 네가 너무 착해 빠져서.

    나 때문에 너 마음 아파할까 봐.

    내가 떠나는 책임을 모두 다 너에게로 돌리고 자책하고 너 힘들게 살까 봐.

    끝까지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너에게 거짓말하는 나를, 너는 언젠가 이해해줄 수 있을까. 이해를 바라는 것조차 욕심인 걸까.

    상처만 줘서 미안해. 그래도 뭐 어쩌겠어. 내가 원래 이런 후진 새끼인 것을.

    악역은 끝까지 악역으로 남아야 악역인 거지.

    “요원아.”

    무경이 이제 요원의 둥근 어깨 위에 입 맞추며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직도 그의 목소리를 통하여 듣는 제 이름은 남의 것처럼 낯설기만 했다.

    “너를 줘.”

    그럼에도, 남자의 품에 안겨있는 여자의 밤거리는 아름다웠다.

    “잘해줄게.”

    여자를 안은 채 칭얼거리는 남자의 밤거리는 구슬펐으나 여자는 알아차리지 못했고, 대신 머리를 스미는 생각들로 바빴다.

    그래. 우리는 첫 만남부터 잘못된 관계이니. 대단히 꼬여버린 관계이니. 나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위치의 남자이니.

    단 28일이라도 당신과 내가 0으로 돌아가, 원점으로 돌아가, 아무 생각 없이 서로를 가져볼 수만 있다면. 평범하게 연애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움직여 우리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순 없으니, 이렇게라도…….

    그래. 이렇게라도.

    요원 또한 무경의 어깨 위에 넌지시 턱을 기대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용한 곳으로 가요. 여긴 너무 시끄러워요.”

    수락의 한마디에 남자의 한 부분이 금방 욱신거렸고, 무경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발기할 수 있는 저 자신에게 브라보를 외치고 싶어서 자조적으로 웃었다.

    “오늘은 줄 거야? 아니. 줘. 첫날의 기념으로.”

    “언젠 안 준 것처럼 말하네요. 나는 매번 당신이 원할 땐 줬는데.”

    “요원아. 이거 봐.”

    요원의 손목을 덥석 붙잡은 무경이 그녀의 손을 어디론가 가져간다. 목적지는 팽팽하게 부푼 제 앞섶이었다.

    “네가 받아주니까 바로 섰어.”

    “하. 뭐 진짜 이런 미친놈이?”

    무경의 어깨를 세게 밀쳐내며 떨어져 나간 요원이 그를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그리고 답지 않게 앙탈을 부린다.

    “진짜 미워. 너무 미워. 세상에서 제일 미워!”

    바람에 요원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리며 꽃향기 같은 향수 냄새가 먼지처럼 일었다.

    “알아.”

    무경이 그렇게 말하며 아스라이 웃는다.

    “그래도 좋잖아.”

    반박하며 짓는 그 선선한 웃음이 봄날에 흐드러진 벚꽃 같다고 요원은 잠시 생각했다.

    ***

    요원을 자신이 몰고 온 1억이 훌쩍 넘는 세단에 태우고 무경은 다시 빈대떡집 안으로 들어갔다.

    빈대떡집에 도착하기까지 무경은 떡집과 두 번 정도 더 통화했다.

    생각보다 떡집 새끼는 친절하고 괜찮은 놈이었다.

    채요원 순경 근처엔 왜 다 괜찮은 놈들뿐일까?

    운전하는 내내 고찰했다.

    채요원 순경이 너무 괜찮은 여자니까, 탐스러운 꽃이니까, 파리가 아닌 꿀벌이 꼬이는구나.

    그런 결론에 당도한 때에야 사람들로 북적이는 빈대떡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람들의 이목이 자연스레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하무경을 알아보는 이는 많지 않다. 그가 매스컴을 전혀 타지 않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숨 쉬는 것처럼 저절로 풍기는 고고한 자태에서 사람들은 그가 일반인은 아닐 것이라고 인식할 뿐이었다.

    무경은 떡집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이 홀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 문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남자.

    모자를 푹 눌러쓰고 편안한 후드 차림에 청바지를 입고 있는 남자의 이미지는 반듯하고 단정하며 깨끗했다.

    요원과 묘하게 어딘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저 새끼가 과거였다는 거 아니야, 지금.

    묘하게 배알이 뒤틀린다. 아니. 대놓고 꼬였다.

    맘 같아선 저 떡집의 가게를 알아내서 내일에라도 당장 셔터를 내리게 하고 싶지만, 그런 치졸한 방법은 하무경이 아니다.

    저 떡집 새끼는 내 상대가 안 되는데 내가 뭐하러 그런 하찮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생각했다.

    그래. 나는 동녘의 하무경이고 채요원은 네까짓 게 탐낼 여자가 아니라는 것만 깔끔하게 일러주면 되는 거였다.

    물론, 내 방식대로.

    “주소 알려주신 분이죠? 우리 요원이 친구.”

    문밖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서태하가 제게로 다가온 무경을 보고 잠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새로운 종족을 마주한 것처럼, 서태하는 무경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입술도 작게 떨어트린 채였다.

    “혹시…… 하무경 씨?”

    “네. 떡집. 맞죠?”

    “네?”

    “죄송합니다. 제가 성함을 몰라서요.”

    “아. 저는…… 서태하입니다.”

    “반가워요.”

    무경이 친절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예. 예. 반갑습니다.”

    무경의 범상스러운 분위기에 이미 눌려버린 태하가 버벅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 손을 맞잡았다.

    “앉으세요.”

    무경이 손가락 몇 개를 까딱거려 그에게 앉으란 손짓을 취했다.

    서태하는 자신도 모르게 말 잘 듣는 강아지인 양 자리에 앉았다. 대단한 카리스마라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주소 알려주셔서.”

    “예? 아닙니다.”

    “한잔 드려도 될까요?”

    무경이 술병을 그러쥐며 물었다.

    “아. 네.”

    서태하가 두 손으로 잡은 잔을 허공에 속히 올렸다. 꼭 무슨 상사 모시는 기분이네, 라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도 같다.

    “우리 요원이의 과거시라고.”

    “예?”

    쪼르르르. 서태하의 잔에 점차 술이 채워진다.

    “과거 애인 사이셨다고.”

    서태하가 그를 잠시 올려다봤고 무경은 편안하게 말해보란 듯 상냥하게 웃었다. 서태하가 시선을 다시 떨어트리며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과거예요.”

    “친구만 하세요.”

    쿵. 술을 채우고 병을 내려둔 무경이 지갑을 꺼냈다.

    “내가 현재니까.”

    지갑에서 명함을 꺼낸 그가 그것을 서태하의 앞에 단정히 내려두었다.

    “서태하 씨 아버지네 떡집 말이에요. 아이디어 좋던데요? 퓨전 떡은 다 서태하 씨 아이디어?”

    뜻밖의 언급에 서태하가 눈썹을 치떴다. 뒷조사라도 한 듯한 발언이었으니 말이다.

    “단기간 홍보로는 팝업스토어만 한 게 없죠. 우리 백화점 들어와서 한번 팔아보든가.”

    서태하가 명함으로 곧장 시선을 내렸다.

    동녘 그룹이란 회사 이름에 다시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요원이 친구라고 하시니까 원하는 지역만 말씀하시면 가장 좋은 자리로, 원하는 날짜에 배치해 드리겠습니다. 전화 한 통이면 돼요.”

    무경이 이번엔 지갑에서 백만 원짜리 수표 석 장을 꺼내 빌지 위에 내려두었다.

    “요원이는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우리 요원이와 술친구 해줘서 또 나를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진심입니다. 음식값은 제가 계산하는 것으로 하죠.”

    무경은 큰 액수에 당황한 서태하를 보며 수표 위를 검지로 툭툭 느리게 두드렸다.

    “팝업스토어 건은 고민 한번 해보세요.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자신을 얼빠진 시선으로 바라보는 서태하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인 무경이 그대로 뒤돌았다.

    아마 서태하의 반쯤 넋이 나간 시선은 자신의 뒤꽁무니를 계속해서 따를 것이다.

    방금, 무경이 서태하 앞에서 보였던 모든 행동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거였다.

    내가 아무리 인도로 좌천을 나간다 해도 넌 내게 비빌 깜냥조차 안 돼, 새끼야.

    나는 뭐든 애매한 건 싫다. 모 아니면 도. 1등 할 거 아니면 아예 꼴등이 좋고. 회사를 먹든지 수렁에 처박히든지.

    나는 뭐든 극단적이고 확실한 게 좋거든.

    그러면 나는, 남은 28일간은 그 방면에선 세계에서 제일가는 놈이 될 거다.

    24시간 너의 사랑에 목말라하는, 24시간 너의 사랑을 갈구하는, 그 누구도 네 곁에 머무르지 못하게, 스치지도 못하게, 온갖 질투와 소유욕으로 똘똘 뭉친 집합체.

    세상에서 제일가는, 찌질한 새끼가.

    뚜벅뚜벅, 빈대떡집을 나가는 무경은 장난기 다분한 소년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