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87화 (87/116)
  • 87화. 28일

    [ ※ 87-89 추천곡 : 에일리 – 저녁 하늘 ]

    한바탕의 진흙탕 싸움 후, 제 집무실로 돌아온 무경이 잠시 흠칫거렸다.

    집무실 내를 꽉 채우고 있는 제 사람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뭡니까?”

    무경이 들어오자마자 모두가 상무님, 하며 무경의 앞에 일렬로 섰다.

    장례식에 온 사람들인 양 슬픈 얼굴로 고개를 일제히 떨어트리고 있었는데, 그 무리엔 태호도 있고 이준도 있었다.

    “뭐야. 누구 죽었어요? 가서 일들이나 해요.”

    그들을 지나친 무경이 제 데스크로 뚜벅뚜벅 걸어가 앉았다.

    자신을 바라보며 여전히 서있는 그 수많은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무경은 데스크 한편에 쌓인 서류들을 넘겨보고 사인도 휘갈겼다.

    투명인간 취급하며 할 일만 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제 앞에서 물러날 줄을 몰랐다.

    찡그린 눈매를 풀지 않으면서 무경은 고집스레 서류만 봤다.

    가슴 중앙에 커다란 복숭아씨가 박힌 듯이 갑갑한 순간이었다.

    20분, 30분, 시간은 째깍째깍 잘도 흘렀다.

    여전히 그들은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어지럽게 펼쳐진 문서들을 사무적인 자세로 바라보는 무경도, 제 사람이었던 그들도, 심란한 마음은 매한가지였다.

    무경이 펜을 내려놓은 건, 그로부터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뒤였다.

    “여러분들에게 피해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내가 보장해요.”

    느슨했던 넥타이를 다시 정갈하게 갖춰 매면서 무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이라도 다른 라인으로 갈아타세요. 괜히 곧 끊어질 줄 붙잡고 계시지 마시고.”

    제 사람들에게 한 발 두 발 다가선 무경이 가장 먼저 태호에게 악수를 청했다.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부족함이 많았는데.”

    “제가 더 감사했습니다.”

    태호가 무경의 손을 두 손으로 맞잡으며 허리를 굽혔다.

    “미안합니다. 끝까지 책임지고 끌어주지 못해서.”

    그렇게 한 명 한 명과 담백한 악수를 나눈 무경이 다시 뒤돌아 데스크로 향했다.

    오래 기다린 거에 비해 싱거운 인사였지만 모두는 안다.

    이 정도가 하무경의 최선임을.

    모두가 그런 남자의 넓은 등에다 대고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동녘 그룹의 최종 실세였으나 이제는 아니고, 차기 수장이 될 줄로 믿고 있었으나, 그 또한 아니었던.

    그럼에도 자신들에겐 영원한 실세이자 유일한 수장인, 하무경 상무를 향하여.

    ***

    집무실에 어둠이 찾아왔다.

    몇 시인지 가늠할 수 없다. 시계를 보지 않았다. 사실 봐도 몇 시인지 체감되지 않는다.

    가죽 의자를 통창 쪽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어 차창 너머의 야경을 바라보는 무경의 눈동자는 고요하면서도 소란스러웠다.

    ‘내가 너무 쉬운 년이라 그래! 그러한 상황에서도 나는! 당신이 불행해지는 게 싫어서 나는! 당신이 아파하는 게 싫어서 나는!’

    널 어쩌면 좋을까. 내가 좌천되어 해외로 쫓겨나는 상황을 절대로 네가 알게 해선 안 되는데.

    너는 너무 착하니까, 괜히 또 네 책임이라고 자책할까 봐. 죄책감 느낄까 봐. 너는 그러고도 남을 여자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는 잘못이 없다, 요원아.

    이 모든 건 멀쩡한 마을을 빼앗으려 했던 우리 동녘의 책임인 것이다.

    네 말이 맞고, 어르신들 말씀이 다 맞아.

    세상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분명 존재하는 법인데.

    손을 뻗어 탁상용 캘린더를 쥔 무경이 날짜를 확인했다.

    내게 남은 28일.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앞뒤 재지 않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우. 뚜우. 뚜우.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달칵 소리와 함께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웅성거리는 소음도 꽤나 시끄러웠다.

    무경이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위로 치켜들었다.

    “채 순경?”

    상대에게서 말소리가 들려온 건 그즈음이었다.

    [요원이 대신 전화 받았습니다. 지금 요원이가 전화 받을 상황이 아니라서요.]

    남자였다. 무경은 그 목소리를 정확히 기억한다. 떡집 새끼였다.

    요원이?

    무경이 날카롭게 웃으며 손에서 캘린더를 놓았다. 거의 던진 거나 진배없다.

    “실례지만 요원이 전화를 받는 그쪽은 누구신지.”

    [요원이 친구입니다.]

    상대는 무경의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 친구요.”

    무경이 고저 없는 음성을 뽐내며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났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애써 침착하게 숨기면서 물었다.

    “거기가 어딥니까? 백야마을 근방의 시내입니까?”

    욕부터 하게 된다면, 이상한 새끼인 줄 알고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니요. 서울인데요. 그러는 그쪽은 누구시죠?]

    제정신이 아닐 지경으로 분노가 솟구쳤다. 갑자기 모든 것들이 밉고 원망스러웠다.

    너는 왜, 내가 아닌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가.

    “서울이면 잘됐네요. 제가 갈 테니 장소 좀 알려주시죠. 요원이랑 오늘 꼭 끝내야 할 말이 있어서.”

    [요원이는 지금 취했습니다. 내일 하시죠.]

    “취했으니 내게 더 알려줘야지. 위험한 세상 아닙니까. 잘 아시면서 그래.”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집어 던져 부숴버리고 싶었으나, 무경은 그러는 대신 슈트 재킷과 차 키를 침착하게 챙겨 집무실 밖을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알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떡집 새끼에게서 장소를 전해 듣기 전까지 무경은 끝까지 점잖음을 유지했다.

    지금 또 욕부터 하게 된다면 요원을 데리고 어디로 도망칠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종로 1번가입니다. 빈대떡집인데 종각역과 가깝습니다. 근처에서 전화 주시면 다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금방 도착하겠습니다. 조금만 더 그 자리에 계셔주시면 고맙겠네요.”

    통화를 깔끔하게 종료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욱여넣으면서 무경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렸다.

    조금만 더 이기적으로 굴어볼까. 나 너에게 한 번의 상처를 더 주고 내 욕심을 채워봐도 되나. 끝까지 나, 너에게 악당으로 남을까.

    조금만 더 사랑해 볼까. 나를 조금만 더 사랑해달라고 네 사랑을 갈구해볼까.

    남은 시간 동안 내가 부족함 없이 다 해주겠노라고.

    내가 네 거 지켜주었으니, 너도 내 소원 하나 정도는 들어주는 게 공평한 거 아닌가?

    역시. 악역다운 이기적인 생각이 머리끝까지 지배한다.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만 다시 되어볼까.

    28일간의 찌질한 놈이.

    ***

    빈대떡집은 취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요원은 근 20분가량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빈대떡집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네온사인에 뒤섞인 사람들을 바라봤다.

    바라보고는 있었으나 보는 것은 아니었고, 소리는 들려오나 들리는 소리는 하나 없었다.

    무경이 백야마을을 한바탕 뒤집어 놓고 떠난 뒤의 일을 회상했다.

    ‘합의서 내밀믄서 딱히 강요는 없었다. 우리 말만 듣고 조용히 일어나서 절 한번 올리고 갔다 안 하냐.’

    어두운 얼굴의 갑순과 일섭을 바라보던 요원이, 마치 자신이 죄인이 된 양 고개를 떨구며 물었다.

    ‘할머니는…… 아버지는…… 괜찮으세요?’

    일섭은 암묵했고 갑순은 격양된 어조로 외쳤다.

    ‘우덜이 괜찮겄냐? 당연히 화딱지가 나제! 고거시 우리를 시골 사람이라고 아주 우습게 보고 고따구로 농락을 해버렸는데 화딱지가 안 나게 생겼냐? 자다가도 내가 열불이 터져서 벌떡벌떡 일어난다 안 하냐! 나뿐이냐? 우리 백야 사람덜이 다 그랴! 그 오사랄 놈 하나 땜시 우리 속이 말이 아니여! 사람이 우째 그럴 수가 있냐? 사람이 어찌케 사람을 고따구로 속일 수가 있어!’

    일섭이 진정하시라 내민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던 갑순이 노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란데 말이다, 요원아.’

    요원을 불렀던 갑순의 눈동자가 백야마을의 풍경을 시야에 담으며 고단한 음성을 중얼거린다.

    ‘그 총각도 솔찬히 힘들어 뵈더라.’

    ‘그랑께 너무 미워하지 말어라. 그 총각도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겠제.’

    세워진 무릎 위에 제 이마를 파묻으면서 요원은 눈을 감았다.

    ‘채 순경님. 모두에겐 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예요.’

    김 작가라고 자신을 속였던 도현의 목소리도 돌연 스치고 지나간다.

    모두가 말한다. 남자에겐 사정이 있을 거라고.

    계획에도 없이 서울에 올라왔다.

    요원 또한 그 남자처럼 사정이 있었다.

    어머니의 추억에 이어 그의 추억까지 더해진 백야마을은 자신을 너무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온갖 곳엔 남자가 존재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진정해. 너희 망할 백야가 이겼으니까.’

    ‘고리타분하고 말 안 통하는 이 마을 사람들. 그리고 너. 나도 이제 정말 진절머리가 나.’

    자신을 그렇게 매정하게 두고 떠나간 남자였지만, 그래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연락 한 통 주지 않는 남자였지만, 그래도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울을 돌아다니다 보면 아주 우연히라도 마주치진 않을까. 그가 나를 보고 다가와 주진 않을까. 그때, 화장품을 보고 있었던 그때처럼.

    아니지. 생각해보니 그땐 우연도 아니었고 그의 계략 아래에서 놀아났을 뿐이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내 머리는, 자존심도 없이 그를 보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전화를 걸어볼까. 기어이 어르신들 가슴에 대못을 박고 당신은 마음 편히 잘살고 있느냐고 따져 물어볼까.

    전화를 걸어볼까. 지금 내게 와달라고. 그렇게 애원해볼까.

    처음부터 만나지 말걸.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호수같이 잔잔하던 내 인생에 남자라는 해일이 들어와 온갖 것을 휩쓸고 지나가 버렸다.

    시간을 돌려서 다시 그날로라도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가 하천에서 처음 만났던 그 날로.

    ‘혹시 길을 잃으셨나요?’라고 물어선 안 됐다. 나는 곧장 남자를 지나쳤어야 했다.

    백야마을에 새로 이사 왔다는 아홉 번째 가구 주민에게 인사를 갔던 그 날에도 마찬가지다.

    ‘식사는 하셨어요?’ 남자의 말에 반응해줘선 안 됐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곧바로 뒤돌아 집으로 갔어야 했다.

    이제 와 이런 후회가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피식, 웃음을 흘린 요원이 무릎 위에 묻고 있던 고개를 겨우겨우 들어 올렸다.

    바람이 훅 몰아친 건 그즈음이었다.

    요원만이 느낄 수 있고, 요원만이 알 수 있는 그 바람 말이다.

    “…….”

    텅 빈 눈동자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요원은 한동안 멎어있었다.

    심장이 잠시 정지한 것처럼, 그녀의 행동도 생각도 감각도 모두 다 멎었다.

    어떤 단어를 입에 올려야 할지.

    갓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모든 단어가 낯선 사람처럼, 아무런 말 하지 못하고 있었다.

    “…….”

    제 앞에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흐트러짐 하나 없는 남다른 자태의 남자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같은 자세로 눈을 맞추고, 그의 뒤를 밝히는 네온사인보다 더 화려하게 웃고 있는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