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86화 (86/116)
  • 86화. 진짜 XX 좌천

    “이잉. 니가 나 갈 때가 된께 요로코롬 실망시켜 불구만.”

    쯧쯧쯧. 하 회장이 혀를 내두르며 지팡이와 함께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단 말이 왜 있는지 인자 알거따.”

    느린 걸음으로 서재의 발코니 앞에 멈춰 선 하 회장이 뒷짐 졌다.

    “어느 때보다도 더 아프구마잉.”

    하 회장은 어둠 속에서도 굳건하게 버티고 서있는 황금소나무를 가만 응시했다.

    “너는 늘 그거시 문제다, 무갱아.”

    주름진 눈가엔 고단함이 짙게 배어있었다.

    “쳐야제. 암만 니 혈연이어도 쳐야제!”

    그의 지팡이가 잠시 뒤를 돌아 무경을 무섭게 가리킨다.

    “야생에 핏줄이 먼 소용이대? 지 애미 애비랑도 서열 1위 놓고 쌈하는 거시 바로 이 야생인디!”

    하 회장은 이해할 수 없는 숨을 내쉬었다.

    “니 미래가 어짤지 내 말해주까. 나 죽고 나믄 너는 수렁에 처박힐 것이다. 니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니가 시방 니 입으로 말한 것처럼 그놈의 인정에 약해 빠져가꼬 가족끼리는 쌈을 안 할라 할 텐께. 니 형 누나는 니를 지금 단단히 벼르고 있는디 니는 그깟!”

    하 회장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목소리를 깊게 한번 숨을 들이마시는 것으로 금방 잠재웠다.

    “그래서 내가 너한테 기회를 주지 않았냐. 그깟 인정에 휘둘리지 말고 회사만 생각하라고. 그란데 시방 니 꼴을 봐봐. 알지도 못하는 그 사람들 위한다고 니가 멀 포기해분 건지 보란 말이다.”

    “정확히는 여자 때문입니다, 회장님.”

    이잉, 쯧쯧쯧.

    하 회장이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로 혀를 내둘렀다.

    “고라믄 내가 더 실망이제. 고작 그깟 시골 순경 한나 땜시 이 애비 한도, 니 미래도, 회사도 다 내던져분 거라는 뜻이 될 텐께.”

    하 회장이 지팡이를 두 손으로 짚었다.

    “뭐 저런 덜떨어진 놈이 다 있나.”

    여전히 무릎 꿇고 있는 제 아들을 이루 말할 수 없이 낙담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

    무경은 제 아버지의 눈을 차마 마주 볼 수 없었다.

    다 죽어가는 아버지의 가슴에 더 빨리 죽으라고 불을 지피는 이 심정은, 저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는 것보다도 더 아팠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

    하 회장이 다시 느린 걸음으로 무경의 앞으로 다가왔다.

    “나도 오늘부텀 확실하게 결론이 나부러써.”

    “…….”

    “너는 동녘 그룹을 이끌 자격이 없다.”

    겨우겨우 소파에 몸을 앉힌 하 회장이 그가 가져왔던 서류 뭉텅이를 쾅, 무경의 앞으로 던지면서 말했다.

    “내가 어렵게 키운 내 회사여. 첨부터 내가 다 일궜다. 이 회사를 이끌 능력이 너도 아적 없어도 나는 니가 참 좋았다, 무갱아. 그란께 너한테 기회를 줬자네. 공팽하진 않았어도 줬자네. 그거슬 니가 발로 이따구로 차부럿네잉.”

    하 회장이 차가운 가죽 시트 위에 머리를 기댔다.

    “고작, 그깟 시골 가시나 한나 땜시.”

    입가에 주름을 감추지 않으며 말한다.

    “나는 싫네. 그냥 쥐여주긴 싫네. 언젠가 니 힘으로 가져가라잉.”

    무경의 거처에 대해 생각하는 하 회장의 한숨 소리가 더욱 짙어졌다.

    지금 마음 같아선 하무경 상무를 당장 동녘 그룹에서 제명해야 맞다.

    제명한다 해도 그의 괘씸함과 이 배신감과 실망과 치미는 분노는 쉬이 가시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믿었던 자식이었으니.

    그럼에도, 하 회장은 그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

    가장 아픈 손가락이 아닌가.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형과 누나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노력으로 살아왔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제 아들의 고단함을 모르지 않으므로.

    내 저 녀석을 정말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생각을 끝낸 하 회장이 한숨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인도로 발령내줄 텐께 고만 나가라. 서열 정리가 끝날 때까정 피해 있어라. 그거시 너한테도 더 좋을 것이다.”

    해외 지사 중에서도 가장 희망이 없고 빡세고 개고생하는 곳.

    동녘 그룹은 조용히 쫓아내고 싶은 사람은 모두 인도로 내보내고 있었다.

    굳이 쫓아내지 않아도 얼마 못 가 알아서 제 발로 나가게 되니 이 얼마나 편리한가.

    그래서, 동녘 그룹에서 인도로 내보낸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암묵적인 좌천인 셈이었다.

    “한 달 줄랑께, 정리할 것 있으믄 죄다 정리해라잉.”

    무경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릎을 오래 꿇고 앉아있어 피가 통하지 않은 다리가 저렸으나, 그의 곧은 자세엔 변함이 없었다.

    좌천은 좌천이었어도 막내아들에게 베푸는 마지막 호의임을 모르지 않는 무경이 제 아버지를 향해 다시 한번 깍듯하게 인사를 올리고는 허리를 세웠다.

    그 매끄럽고도 단정한 움직임을 굳은 얼굴로 지켜보던 하 회장이 다시 입을 달싹인다.

    “각오해라, 무갱아. 처음 떨어져 보는 것인께 많이 아플 거시다.”

    “각오는 34년간 하고 있었습니다.”

    하 회장은 그 대답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손을 휘저으며 고개를 틀었다.

    대화를 끝내려는 하 회장과는 달리 회장님, 하고 무경이 또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었다.

    “머시여.”

    살짝이 미간을 좁힌 하 회장이 반듯한 제 막내아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평소와는 다른 눈초리임은 확실했다.

    “제 사람들에겐 이번 일로 피해 가는 일은 없게끔 해주십시오. 능력 있는 사람들입니다. 동녘에 꼭 필요한 인재임을 회장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무경 상무 라인이야 워낙 출중한 인재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하 회장도 모르진 않았으나, 제 목숨 줄이 끊긴 이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제 사람을 챙기는 무경의 태도에 진절머리가 났다.

    니나 걱정해라, 니나. 라는 소리를 간신히 집어삼키면서 하 회장은 짜증이 서린 얼굴로 다시금 손을 저었다.

    긍정의 뜻을 알아차린 무경이 하 회장을 향하여 다시 정중하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한동안 하 회장의 앞에서 허리를 세우지 못하는 무경에게서 먼저 고개를 돌린 사람은, 하 회장이었다.

    ***

    인사명령에 동녘 그룹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하태경 부사장의 사장 승진 발표날, 하무경 상무 인도 발령 건에 대한 명령도 함께 내려왔기 때문이다.

    사장 취임식은 생략한다는 공지사항도 있었고, 동녘 그룹 직원 모두가 충격을 금치 못했다.

    발표가 나자마자 사장 집무실로 자리를 옮긴 하태경은 무경을 호출했고, 그 자리엔 하가경도 함께였다.

    하태경은 소파의 상석에 앉아, 하가경은 무경의 맞은편에 앉아, 무경을 같은 시선으로 건너다보고 있었다.

    무경은 소파 헤드 위에 목을 편안하게 기대고 다리를 옆으로 넓게 벌리고 앉아, 멘톨 캔디를 와드득 씹으며 천장만 가만 응시할 뿐이었다.

    “내가 분명 경고하지 않았냐.”

    하태경이 향이 좋은 동백 티를 음미하며 웃었다.

    “젊은 패기로 일 벌이는 건 좋은데 까딱하다간 꼬꾸라져 나락이니 조심하라고. 그때 하 상무 내게 뭐라 했었더라. 우리 같은 사람들은 꼬꾸라져도 백운 위라 했었던가?”

    “…….”

    “그래서. 지금 네가 백운 위더냐.”

    하태경은 점잖은 어조로 말했으나 조롱임을 안다.

    “어머, 나 너무 웃겨.”

    하가경은 계속해서 피식거리며 웃었는데, 그 웃음소리가 점차 커짐과 비례하게 무경의 심기도 상당히 불편해져 갔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아버지께서 너를 인도로 다 내보내신다니? 그렇게 좋아서 물고 빨고 하던 자식을?”

    하가경이 껌을 시끄럽게 씹으며 매끈한 각선미를 자랑하듯 한쪽 다리를 꼬았다.

    “진짜 죽을 때가 되어 노망이 나신 건지, 아니면 이제야 정신을 제대로 차리신 건지.”

    무경은 상큼한 레몬 향이 나는 캔디를 와드득 계속 씹으면서 그런 하가경을 비스듬히 깔아봤다.

    “아무튼, 보기는 좋다, 얘. 내가 살다 살다 하무경 상무 좌천되는 꼴을 다 본다? 나 소원 성취했네?”

    무경이 후, 짜증스러운 손길로 목덜미를 문지르며 갑갑한 슈트 베스트 단추를 툭툭 빠르게 풀어 내렸다.

    “하가경 전무님.”

    “응?”

    “우리 전무님은.”

    소파에 늘어져 있던 몸을 느릿하게 세운 무경이 손깍지를 끼며 제 앞의 하가경을 정시한 채 씨익 웃었다.

    “내가 전무님 동생임을 감사히 여기세요. 전무님이 내 동생이었으면 전무님은 아버지보다 먼저 장례 치렀을 테니.”

    “이 개새끼가!”

    하가경이 발끈했다.

    “너 내가 분명 내 앞에서 시건방 떨지 말라고 경고했지? 여러 번 얘기했지? 나이도 어린 새끼가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고 지 형 누나를 아주 길가에 놓인 돌부리인 양 개무시하더니만 아주 꼴좋다, 이 새끼야!”

    “새끼 새끼 하지 말라니까요, 누님.”

    “이 새끼가 뭘 잘했다고 아직도 내 앞에서 시건방을 떨어? 넌 좆된 거야, 이 새끼야. 아직도 모르겠냐, 이 새끼야?”

    “그러니까, 내가 지금 말하잖아. 새끼 새끼 하지 말라고 이 썅년아.”

    “뭐? 썅년?! 너 말 다 했냐, 이 씹새끼야?!”

    하가경이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기 무섭게.

    “얼씨구 씨발 아주 지화자 좋지?”

    무경도 지지 않고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동생이 진창에 처박히는 꼴이 아주 니들은 좋아죽겠지?”

    장신의 무경을 하가경은 노려보았고, 무경은 그런 그녀를 서늘하게 깔아보며 제 양 허리춤에 손을 척 얹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냐? 왜? 아주 씨발, 오케스트라도 불러서 로비에서 공연이라도 하시지?”

    “아, 이 새끼가 왜 애먼 데다가 화풀이야!”

    “애먼 데는, 씨발. 매일같이 내 등 뒤에 칼 꽂을 날만 존나게 기다린 게 어디서 피해자 코스프레야, 짜증 나게.”

    “이 또라이 새끼는 진짜 위아래도 없나?!”

    “목소리들 낮춰라.”

    “너도 마찬가지야, 이 씨발놈아. 뭘 혼자서만 고고한 척 입 꾹 다물고 있어, 우리 중에서 제일 더러운 새끼가.”

    무경이 저와 무려 19살 차이가 나는 하태경을 가리켰다.

    “야, 하무경 상무!”

    고함치는 하태경의 팔에 착 달라붙은 하가경이 고자질하듯 무경을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어머, 어머. 저 새끼 돌았어. 오빠! 저 새끼 저거 완전히 처돌았어!”

    “그래! 처돌았다! 내가 지금 씨발 인도로 쫓겨나게 생겼는데 안 돌게 생겼어?!”

    1분 전까지만 해도 태평스럽고 오연하기까지 한 얼굴로 앉아있던 무경은, 여기 더는 없었다.

    “야. 니들 다 가져. 이까짓 동녘! 씨발, 니들 다 가져!”

    무경이 구둣발로 애꿎은 소파 테이블 다리를 발로 부숴버릴 듯이 쾅쾅 걷어차다가 마지막 말과 함께 그들을 홱 등지고 돌아섰다.

    “난 줘도 안 가져.”

    아수라장, 난장판, 개판 오 분 전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너 인도에서 얌전히 살아라? 거기는 18달러만 쥐여주어도 사람 쉽게 해한다더라.”

    하가경이 또 무경의 성질을 긁어대기 시작했고 무경은 뒤를 돌아 그들을 가만 바라봤다.

    평소에도 싫었지만, 오늘따라 저 얼굴들이 더 견딜 수가 없이 싫은 거다.

    그래서 그냥 똑같이 유치하게 받아쳤다.

    “그래? 그럼 난 36달러 줘서 한국으로 보내야겠다.”

    그 전에……, 뒷말을 흐린 무경이 갑자기 양 중지를 꼿꼿하게 세워 뒤로 걸으며 두 사람을 한껏 조롱했다.

    “니들은 이거나 존나게 빨아.”

    형이고 누나고 뭐고 더는 상관없이.

    “저 새끼 저게 진짜 처돌았!”

    집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힌 무경이 하가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을 쾅! 세게 닫아버렸다.

    저런 것들도 씨발, 가족이라고, 내가.

    무경이 사납게 고개를 뒤로 젖히며 코웃음 쳤다.

    “사, 상무님.”

    자신의 등장에 놀란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하태경의 비서들을 알아차린 무경이 후우, 심호흡 비슷한 긴 한숨을 내쉬며 헝클어진 제 머리를 한번 쓸어올렸다.

    풀어헤친 베스트 단추를 다시 정갈하게 걸어 잠그며 그들에게 나긋한 미소를 보인 무경이 고상하게 말했다.

    “수고들이 많아요.”

    동녘 그룹. 사실 갖고 싶다. 그냥 갖고 싶은 것도 아니고 사실은 존나게 갖고 싶지. 34년을 갈망했어. 그래.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 동녘 그룹을 원했던 것 같아.

    그런데 참 이상하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해방감과 찰나적인 흥분에 휩싸인 내 발걸음은 경쾌하기만 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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