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85화 (85/116)
  • 85화. 원래가 빌런의 엔딩은 비극

    [ ※ 추천곡 : (여자)아이들 – VILLAIN DIES ]

    태호가 룸미러를 통하여 무경을 살폈다.

    세단 안에 킵 되어있는 양주병을 꺼낸 그는 잔에 술을 콸콸 따라 마시고 있었다.

    잔을 채우고 비우고. 채우고 비우고. 채우고 비우고.

    패턴은 똑같이 여러 번 반복되고 있었다.

    술잔을 손에 그러쥐고 갈색의 액체를 한 모금 삼키면서 무경은, 마을회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각 가구당 12억씩 드리겠습니다.’

    무경은, 어르신들 앞에 명함과 합의서를 내밀면서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 마을 저희에게 넘기시고 어르신들은 그만 떠나시죠.’

    ‘…….’

    ‘저희가 마음만 먹으면 이깟 촌마을 강제 철거 하는 건 일도 아닙니다.’

    ‘…….’

    ‘서로 더러운 꼴 볼 필요 없이, 일 키우지 마시고, 조용히 이 돈 받고 나가시죠, 어르신들.’

    마을회관 내의 어르신들에게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실망으로 굳어 가라앉은 얼굴들이 눈에 선했다.

    특히, 갑순의 얼굴이 그랬다.

    침묵 속의 눈빛들이 그렇게 숨이 막혔다.

    ‘아야.’

    무응답으로 고인 침묵을 깨고 갑순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젊은이들은 그 돈에 혹할지 몰라도 우덜 나이가 되믄 돈보담 더 소중한 것이 있는 거시다.’

    ‘…….’

    ‘우덜은 그저 우덜 고향서, 우덜 터전서, 우덜 집에서, 서로의 마지막을 함께해주고, 보내주고, 나 또한 여그서 조용히 눈 감고 잡은 것이다. 그거시 우덜의 마지막 소원이자 바람이여. 그랑께 너…….’

    무경의 손을 따뜻하게 잡은 갑순이 말했다.

    ‘우덜한티 이라지 말어라.’

    무경을 어르고 타이르듯 한참 동안을, 그의 손등을 두드려주었다.

    어르신들의 확고한 생각을 전해 들은 그제야 완전한 결론을 내렸다.

    동녘은 백야를 빼앗을 권리가 없다.

    확신이 선 뒤에 무경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고, 어르신들에게 절을 올렸다.

    백야마을을 빼앗을 생각이 없었음에도 불구.

    어르신들을 찾아가 그들의 가슴에 진한 상처를 남기면서까지 이 결론을 확실하게 내려야만 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가 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마지막 확인이 필요했을 뿐이다. 내게 남은 총알은 단 한 발이었으니.

    “회장님께 갑시다.”

    술에 밴 음성을 나직이 읊조린 무경이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툭 기대며 차창 밖을 바라봤다.

    조금 전, 주저앉은 너를 난 보았다. 네 모습이 점이 되어 그렇게 사라질 때까지 난 바라만 보았다.

    미안해.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당장 뛰어내려 널 안아주고 싶었어.

    상처만 주어서 미안해. 너를 아프게 한 벌은 내가 죄다 챙겨 받을게.

    그래도, 너는 너무 착하니까. 혹시라도 네가 그런 날 위해 슬퍼한다면 그럴 것 없다고 언젠가 네 눈을 보고 말해주려 한다.

    원래가 빌런의 엔딩은 비극이고, 그것이 영화의 마무리이자 완성이었으니.

    나는 백야마을을 먹으러 간 악당이었고, 악당을 몰아낸 영웅들은 그저 환호하면 되는 것이니.

    그러니, 그 악당이 사라진 마을에서 영웅인 너와 어르신들은 그저, 평생을 웃으며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면 될 일이었다.

    무경이 고단한 눈을 감으니 잇새를 비집고 실없는 웃음이 흘렀다.

    여전히 입안은 썼고 남아있는 술은 달았다.

    맞다. 그가 겨누고 있는 총구는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

    백운에 도착하니 시간은 거의 자정이었고, 잠에서 깬 하 회장은 정연의 도움을 받으며 서재로 비적비적 들어왔다.

    이미 이것부터가 불효라고 무경은 치부했다.

    “아따 무갱아, 이 시간에 으짠 일이대?”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회장님.”

    정연의 도움을 받으며 소파에 몸을 앉히는 하 회장을 향해 무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허리를 다시 세운 그가 곁에 서있는 정연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부탁했다.

    “어머니는 자리 좀 비켜주세요.”

    “뭐 마실래?”

    사약이나 한 사발 가져다 달라는 말을 하려다가 관뒀다.

    “괜찮습니다.”

    무경은 웃었지만 심상찮은 분위기를 인지한 정연이 로브를 여미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재의 문이 닫혔을 땐, 침묵이 시간을 갉아먹었다.

    “…….”

    무경은 자리에 앉지 않고 오랜 시간 서서 제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삶의 고난이 멍울져 있었다.

    “무갱아. 어째 그라고 서있냐. 와서 앉아야.”

    제 몸을 감싸고 있는 블랙 슈트를 정갈하게 매만진 무경이 가지고 온 브리프케이스를 열었다.

    꽉 들어찬 각 봉투 여러 개를 소파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그 각 봉투를 비스듬히 바라보던 하 회장의 얼굴에 곧 미소가 피어났다.

    “이거시 머시여? 벌써 다 취합했다고야? 생각보담 겁나 빨리 해부러따잉?”

    팔을 뻗은 하 회장이 묵직한 봉투를 저의 마른 허벅지 위에 척 올렸다.

    “왐마. 머시 이라고 많대? 기껏해야 야닯 가구 아니었냐?”

    봉투를 벌리고 그 안에서 잘 묶여있는 서류 뭉치를 꺼내든 하 회장의 손짓이 일순 멎었다.

    “…….”

    보고 있는 새하얀 종이는, 합의서가 아닌 돈으로 얽히고설킨 동녘 그룹의 비리 자료였으니 당연했다.

    사람도 작정하고 털면 먼지 하나씩은 다 나오는데, 이 거대한 동녘 그룹을 마음먹고 털면 그 먼지 하나가 안 나오겠는가.

    “회장님께서 이미 보셨던 백야마을 합의서는 사실, 이면 합의서입니다.”

    일시에, 하 회장의 앞에서 무경의 두 무릎이 꺾였다.

    “백야마을에서 거주했던 시간.”

    쿵 하는 소리가 적막을 찢는다.

    “짧았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뜻은 제게 이미 충분히 전달되었고 오늘에서야 결론을 내려 회장님을 찾아뵙습니다. 부디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종이를 한 장, 두 장, 조용히 넘겨보는 하 회장의 눈빛이 변했다.

    “그분들은 저희의 돈을 원치 않고, 고향을 떠날 마음 또한 없으며, 동녘에겐 백야를 빼앗을 권한도, 권리도, 그 무엇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장, 그리고 또 넷째 장,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유리 깨지는 소리처럼 귓속을 날카롭게 찔렀다.

    “못 하겠습니다, 아버지.”

    무경이 고개를 올렸고, 가죽 소파 위에 몸을 기대고 있던 하 회장은 허공 속에서 싸늘한 눈동자를 빛냈다.

    아픈 사람이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독사 같은 눈이었다.

    “백야는 저대로 놔두시죠.”

    무서울 정도의 고요함과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이곳은, 황폐한 사막 위 같다.

    “하태경 부사장도, 하가경 전무도, 백야마을을 건드려선 절대로 안 됩니다. 약속해 주십시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막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을수록, 발이 모래에 푹푹 파묻히는 기분이 들었다.

    “저희 셋 모두 정직하게만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회장님께서도 마찬가지리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목소리가 가루처럼 머릿속에 퍼졌다.

    “대표적인 예로 저희가 소유한 골프장 이야기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리도록 이를 악물었다가 다시 입술을 떼었다.

    “저희 거래처 사장님들, 억 단위로 회원권 끊으시죠. 그분들이 언제 한 번이라도 골프 치러 오신 적 있습니까. 공식적으론 합법적인 골프장 회원권. 뒤로는 비자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죠.”

    쿵. 하 회장이 보고 있던 서류 뭉텅이를 테이블 상판 위에 세게 던졌다.

    “그런 자료만 수두룩합니다. 그 자료 세상에 공개되면 언론에선 한동안 시끄럽게 떠들어 대겠지만 저희가 무너지기야 하겠습니까. 아니요. 정·재계 인간 그 누구 하나 깨끗한 이는 없고 제가 가지고 있는 USB 몇 개만 뿌려도 국회의원, 장관, 수십 명 논란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니, 서로 살기 위해선 서로를 지켜주는 일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 회장에게선 어떠한 말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께서 수십 년 동안 힘겹게 노력하여 지켜오신 깨끗한 동녘 그룹 이미지에 큰 타격은 입힐 수 있을 겁니다. 아주 더러워질 겁니다.”

    그저 무경을 바라볼 뿐이었는데, 그 냉혹한 시선이 꼭 사람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지금껏 지켜오셨던 동녘 그룹의 이미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잘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백야마을에서 그만 손 떼시지요. 대의를 위해 소의를 버리시란 말씀입니다.”

    “니 지금 내 협박하냐.”

    “거래를 제안하는 겁니다.”

    “무엇으로.”

    “제가 동녘 그룹을 포기하겠습니다.”

    총알이 머리를 관통하고 지나간다. 숨이 끊기던 순간이었다.

    “제가 깔끔하게 물러서면 저희 남매 더럽게 싸울 일도 없을뿐더러 시끄러워질 일 또한 없지 않겠습니까. 동녘 그룹 이미지는 지금처럼 깨끗하게 잘 유지될 겁니다.”

    하 회장은 무경을 못마땅한 빛으로 줄곧 내려다보고 있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회장님께서 제게 동녘 그룹 안 쥐여주셔도, 저보다 더 깨끗하지 않은 것들이 바로 하태경, 하가경이니 그들보다 더 빨리 물밑 작업 들어가고 공사 쳐서 그것들 죄다 골로 보내버릴까. 그리고 내가 그냥 동녘 먹어버릴까. 그런데…….”

    잠시 말을 멈추고 회상에 잠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던 무경이 갑자기 피식 소리 내어 작게 웃었다.

    “제가 일곱 살 때, 우는 저를 업어주었던 태경이 형의 그 체온이 따뜻했고.”

    그래.

    “제가 아홉 살 때, 악몽을 꾸고 울던 제게 가경이 누나가 쥐여주었던 그 꿀에 탄 우유가 너무도 달아서.”

    우리들에게도 그런 시절은 있었다.

    “그 빌어먹을 기억 때문에…….”

    “…….”

    “전 못 하겠습니다.”

    검은 눈을 서서히 들어 올린 무경이 하 회장을 암연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 말씀이 다 맞았습니다. 제가 인정에 약한 등신입니다.”

    무경은 다시 고개를 45도 각도로 숙였다.

    “제 앞날은 아버지께서 정해주십시오.”

    칼처럼 정확한 각도였다.

    “따르겠습니다.”

    침묵은 금이라지만 지금의 침묵은 독이었고.

    하 회장이 들릴 듯 말 듯 한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달싹인 건,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더 지난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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