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84화 (84/116)

84화. 기폭제(起爆劑)

“이리 주세요!”

요원이 제 팔을 다급하게 뻗어 핸드폰을 가져오려 하였으나, 무경은 그녀에게서 몸을 완전히 틀면서 서태하의 전화를 아예 끊어버렸다.

“하무경 씨!”

요원이 그의 이름을 날카롭게 불렀고 무경은 그녀의 손에 핸드폰을 잘 쥐여주며 빙그레 웃었다.

“헤어졌다면서 왜 이렇게 연락을 하고 지내? 취미가 어장관리야?”

“친구일 뿐이에요.”

“내가 진짜 내 입으로 이런 구닥다리 말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어?”

“하무경 씨도 곁에 있잖아요? 아주 아리따운 친구분. 하무경 씨 집 앞에 왔던 그분이요. 별빛다방에서 봤던 그분.”

“걘 내 친구 아니라니까. 그리고 지금 질투해?”

“질투가 아니라!”

“어…… 채 순경?”

두 사람의 다정한 듯 다정하지 않은 시간을 방해한 건 성준이었다.

“우리 그…….”

성준은,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자태와 눈빛을 뽐내고 앉아있는 무경에게로 차마 다가오지를 못하고 근처에서 쭈뼛댄 채 말을 이었다.

“출동해야 할 것 같은데? 소하마을에서 싸움 났대.”

“아…… 지금요?”

요원의 잇새로 흐른 탄식에선 묘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네, 경장님.”

한 박자 느리게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요원이 여전히 벤치에 앉아있는 무경을 바라보다가 어렵사리 물었다.

“언제 또…… 오세요?”

매력적인 미소를 입가에 지닌 무경이 요원을 꼿꼿하게 올려다보며 능청스레 대꾸했다.

“내가 또 오길 바라나 봐. 아깐 안 반갑다더니.”

요원이 흠칫거렸다. 제 속마음을 들켜버려 얼굴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흠. 헛기침을 한번 터트린 요원이 제 손목을 허공에 들어 보이며 작게 종알거린다.

“이건…… 감사해요.”

결국은 이 팔찌를 받기로 했다.

대단하지 않은가. 동녘 그룹의 하무경 상무가 준 팔찌인데. 그런 식으로 대충 결론을 내리니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난 쉬우니까.

“채 순경! 빨리 와! 가자!”

어느덧 경찰차 앞에 선 성준이 소리쳤다.

“네! 경장님!”

요원이 헐레벌떡 무경을 등지던 순간이었다.

“채 순경, 잠시만.”

요원의 손목을 붙잡음과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무경이 그녀를 제게로 확 당겼다.

“아!”

요원의 몸이 순식간에 반 바퀴 되돌려지며 남자의 품으로 끌려간 건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

남자의 탄탄한 품에 안긴 요원의 눈동자가, 빙산에 부딪힌 배처럼 그렇게 요동쳤다.

“채 순경.”

무경의 큼직한 손이 요원의 허리를 잡아 제게로 더 바짝 끌어당겨 밀착시키고 그의 다른 손은 요원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여전히 요원의 눈동자는 격동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채요원.”

요원의 정수리 위에 날렵한 턱을 기댄 그가 자신을 나직이 불렀다.

“요원아.”

그의 목소리로 듣는 제 이름은 매번 남의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쿵쿵. 쿵쿵쿵. 쿵쿵쿵쿵.

단 한 번의 부름이 기폭제가 된 듯이, 요동치는 심장 소리는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또 보자, 우리.”

한 명은 한 명을 품에 끌어안고, 한 명은 한 명의 품에 안겨있고, 그런 두 사람에게선 꽤 오랜 시간 말이 없었다.

왠지 슬픈 무게의 침묵이었다.

***

무경이 타고 있는 고급 세단이 백야마을로 들어서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린다.

한참을 더 들어가던 세단이 목적지에서 매끄럽게 멈춰 섰다.

“상무님. 도착했습니다.”

습관처럼 느른하게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고 있던 무경이 제 눈꺼풀을 서서히 밀어 올렸다.

넥타이 매듭을 잡아 좌우로 비틀어 중심을 맞추는 사이, 운전석에서 달려 나온 방 기사가 뒷좌석 문을 벌컥 열었다.

무경은 방 기사에게 수고했단 말을 하면서 제 고귀한 몸을 세단에서 내렸다.

무경을 따라서 태호가 내렸고, 무경의 세단 옆에 또 한 대의 검은 차량이 멈춰 서며 동녘 그룹의 고문 변호사 두 명이 내려 무경에게 허리를 굽혔다.

검은 슈트 차림의 무경을 주축으로 그의 뒤를 따르는 세 명의 슈트 차림의 남성들이 뚜벅뚜벅 곧은 걸음으로 일제히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백야 마을회관이었다.

“실례합니다.”

무경이 안으로 들어서자 한자리에 모여 시끌벅적하게 부침개를 구워 먹던 백야마을 어르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무리 안엔 발목에 깁스한 갑순과 부임도 함께였고, 오랜만에 만난 무경을 보면서 그들은 만개한 꽃처럼 활짝 웃었다.

“옴마? 이거시 누구여?”

“취직했다 하드마 쫘악 빼입어 부렀네? 아주 좋은 거로 사 입었네잉! 참말로 잘했다!”

“너 양배추즙은 다 먹었냐잉? 니 몸은 잔 으짜디? 양배추즙 말이여? 더 줄라고 내가 맹글어 놨는디 니 얼굴을 통 못 본께 못 줘써야?”

제게로 쏟아지는 수많은 질문에도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던 무경은, 모두가 뻑이 갈 정도의 슈트를 차려입고 그들의 앞에 우뚝 섰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어르신들은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뒤로 젖혀 장신의 남자를 올려다보았고, 무경은 그들을 향해 각 잡힌 자세로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자신을 다시 소개했다.

“동녘 그룹에서 나온.”

한순간 술렁였던 웅성거림이 차츰 잦아들고.

“하무경 상무라고 합니다.”

이내, 완연한 침묵이다.

***

무경이 마을회관에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을회관에서 나온 무경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빼 물면서 고문 변호사들에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상무님.”

“그래요. 서울에서 봅시다.”

그들이 무경에게 묵례한 뒤, 타고 왔던 고급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

태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담배를 빨고 있는 무경의 옆태를 꽤 어두운 낯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모를 리 없는 무경이 태호를 향해 대충 손을 휘휘 저었다.

먼저 차에 타 있으란 신호였다.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던 태호는 아무런 사족을 붙이지 않고 그대로 묵례한 뒤, 방 기사가 기다리고 있는 세단으로 향했다.

“…….”

이제 무경은 혼자가 되었다.

여름으로 뒤덮인 백야마을의 풍경을 시야에 담고 공기를 느끼면서, 무경은 몇 번이고 담배를 더 빨고 연기를 길게 뱉었다.

짧아진 꽁초를 허공에서 튕긴 그가 다시 새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며 세단으로 발길을 돌리는 때였다.

콰당!

무언가 엄청난 소리가 나서 자연스레 시선을 측면으로 트니, 그곳엔 자전거에서 숨 가쁘게 뛰어내린 요원이 보였고 옆으로 쓰러진 그녀의 자전거도 보였다.

여기까지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으면 자전거의 바퀴는 넘어진 지금도 여전히 회전하고 있었다.

“하무경 씨…….”

무경을 바라보는 요원의 눈동자에 낙망이 비친다.

새하얗게 탈색된 낯빛과 파르르 떨리는 아래턱, 꽉 틀어쥐고 있는 주먹.

상심, 좌절, 절망, 낙심, 비관.

그 어떠한 단어를 모두 다 갖다 붙여도, 자신에게 더 다가오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서있는 저 여자와 참 잘 어울렸다.

그녀를 더 짙어진 눈동자로 바라보며 라이터를 탕, 위로 튕겨 불을 붙인 무경이 그녀에게 질기게도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겨우겨우 앗아와 정방을 응시했다.

“잠시만요.”

쓰디쓴 담배를 빨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세단으로 한 걸음 두 걸음 향하는데,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녀가 다가온다.

“잠시만요!”

아니. 달려온다.

무경은 걸음을 멈추어 서서 요원을 응시했고 요원은 제 앞에 멈춰 서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저 작은 머리를 굴리고 굴리고 또 굴려 가며 현 상황을 파악해보려 애쓰는 여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하나만 여쭤볼게요. 마을엔 왜 오신 거예요? 오늘도 목적이 있어 오신 거예요?”

착해 빠져선, 생각하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르신들의 의중도 물어보려고. 채요원 순경 하나가 저분들을 다 대표할 순 없다고 판단했으니까.”

“그래서. 원하는 답은 들으셨나요?”

“아니.”

무경이 담뱃재를 바닥에 툭툭 털며 무던하게 대꾸했다.

“못 들었어. 채 순경이 다 맞던데?”

지금껏 침착함을 유지하던 여자의 잇새에서 피식, 허탈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나 어떡해…….”

“…….”

“……또 속았어, 씨.”

주먹을 틀어쥐고 있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 손톱이 찌르는 손바닥엔 얼얼한 통증이 일었다.

“수법이 똑같아…… 나는 그 수법에 계속 속아 넘어가.”

그러나, 그 어떠한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얼굴로 요원은 중얼거렸다.

“내가 등신이라서. 당신은 진짜 못돼 처먹어서.”

분명 백야마을을 빼앗을 생각이 없다고 남자는 제게 말했었다.

자신을 안심시키고 웃어주고 다정하게 대해주며 사람 마음을 설레게 하고 그러다가 또, 내 몸을 가져가고.

당신은 내게 고백하고, 내 뒤통수를 후려치고, 나는 또 당신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당신에게 인정 따윈 없는데.

자꾸만 나는, 백야마을의 하무경 씨를 잊지 못해서. 그래서 나는…….

요원이 숨을 가다듬으며 겨우겨우 말을 뱉었다.

“어르신들이 많이 놀라셨겠네요.”

숨 쉬는 게 슬프고.

“기어이 와서…… 어르신들 가슴에 대못을 박으셨네요.”

말하는 게 슬프고.

“내가 분명 말했었죠? 내가 부탁했었죠? 어르신들은 억만금을 준다 해도 백야마을을 떠날 마음이 없으시다고.”

바라보는 게 모두 다 슬펐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당신을 진심으로 대해주셨던 어르신들 가슴에 적어도 상처는 남기지 말아 달라고. 이런 식으로 대못 박지 말아 달라고. 배신감 느끼게 하지 말라고. 내가. 당신에게, 내가!”

요원의 성마른 외침이 여름이 짙어진 백야마을에 열대야처럼 넓게 퍼졌다.

“부탁했었잖아…….”

요원이 그의 팔뚝을 덥석 붙잡았다.

“뭐라고 했어요.”

무경은 시선을 내려 그 처연한 손짓을 바라만 봤다.

“어르신들에게 뭐라고 했냐고!”

여전히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는데, 그의 턱 근육이 어느 때보다도 성난 모양으로 솟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당신들은 내게 진심이었겠지만 나는 진심이 아닌 다 연기였다. 이 마을 빼앗기 위해 당신들 마음 살살 구슬리려 그간 다 연기한 거였다. 내가 엄청난 돈을 줄 테니 이 돈 받고 그 입 다물고 조용히 고향 버리고 꺼져라. 뭐 이랬나?!”

그의 팔뚝을 붙잡고 강하게 흔들다가, 제 손목에 채워져 있는 팔찌를 발견하곤 싸늘한 얼굴로 웃었다.

“고작 이따위 팔찌 하나 주면서.”

씹어뱉으며 그 팔찌를 빼낸 요원이 그것을 무경의 잘나 빠진 얼굴을 향해 세게 집어던졌다.

“…….”

툭. 제 발밑에 떨어진 팔찌를 무경은 표정 없는 얼굴로 바라봤다.

“이거 뭐. 내 몸값이야? 얼마 전에 카섹 해준 대가야?”

적어도 요원의 눈엔 표정이 없어 보였다.

“이거 얼만데. 더 내놔. 이깟 팔찌로 안 되니까, 더 내놔!”

무경이 허리를 굽혀 그녀가 던진 팔찌를 주워들었다.

“얼마. 20억이면 돼?”

그녀의 파르르르 떨리는 손목을 무경이 한 손에 그러쥔다.

그리고, 체온이 맞닿은 그 순간. 그 찰나.

“너 같은 거 진작에 찔러버릴 걸 그랬어.”

“…….”

“그 기자한테 찔렀어야 했는데. 내가. 내가 또 너 같은 새끼한테 홀라당 속아 넘어가서!”

그 손을 사납게 뿌리치면서 요원은 그의 가슴팍을 아프게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쉬운 년이라 그래!”

그녀의 거센 주먹에 무경의 상체가 흔들렸다. 가만 흔들려주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나는! 당신이 불행해지는 게 싫어서 나는! 당신이 아파하는 게 싫어서 나는!”

퍽퍽! 퍽퍽!

그녀의 손에 얌전히 맞아주던 무경이 그 행동을 제지하듯 요원의 손목을 단숨에 꽉 틀어쥐었다.

“놔, 새끼야. 안 놔?”

요원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하였으나 무리였다.

“놓으라고, 이 개자식아!”

발광하는 요원을 가만 바라보던 무경이 앞니로 물고 있는 담배 필터를 더 꽉 씹었다가 퉤 뱉어냈다.

“진정해.”

벗어나려고 용을 쓰는 요원의 손목을 더욱 거세게 그러쥐고서 무력으로 팔찌를 다시 채웠다.

“너희 망할 백야가 이겼으니까.”

자신을 노려보는 여자의 붉어진 눈동자를 피하지 않으면서 무경은.

“이깟 촌마을, 이제 줘도 안 가져.”

평소와는 다른 냉한 어조를 씹어뱉었다.

“고리타분하고 말 안 통하는 이 마을 사람들. 그리고 너. 나도 이제 정말 진절머리가 나.”

일부러 꺼낸 모진 말과 함께 무경이 요원을 등지고 그대로 세단에 올랐다.

“…….”

멍하니 서있는 요원의 옆으로 고급 세단이 매끄럽게 지나쳐 간다.

그 차량 뒤꽁무니를 황망하게 쳐다보던 요원의 다리에 갑자기 힘이 풀렸다. 쓰러지듯 풀썩 무릎을 세우고 주저앉았다.

세워진 무릎 위에 이마를 기대며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피해자인지 아니면 가해자인지. 우리가 미련한 건지, 그간 너무 억지를 부린 건지.

그 돈 받고 그냥 깔끔하게 마을에서 나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깟 터전이야 다른 곳에 잡으면 그만 아니냐고, 그깟 시골 마을 하나 지켜 뭐 할 거냐고, 사람들이 우리에게 미련하다 손가락질하는 게 맞는 건지.

우리의 터전을 지키려는 우리가 정말 틀린 건지, 어리석은 건지.

이젠 다 헷갈릴 지경이었고 다시 도돌이표를 따라 빌어먹을 원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