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82화 (82/116)

82화. 러시안룰렛

두 사람도 함께 있다 들은 바가 없었기에 당혹스러운 건 맞았지만, 그 감정도 어차피 잠시였을 뿐이다.

항상 하태경은 이런 식으로 제게 난처함을 안겨주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하무경 상무. 우리 초면이지요? 나 정상철이오.”

양반다리 하고 앉아있던 정상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경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하무경 상무 인물 좋기로 유명한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물로 보니 우리 딸이 왜 그렇게 하무경 상무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을 붉혔는지 내 이제야 알 것 같네요.”

감흥 없는 무경의 눈빛이 정나경에게로 슬쩍 내려갔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정나경은 흘러내려 온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스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픽, 조소했던 무경이 내밀어진 정상철의 손을 맞잡으며 사업가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상철 국무총리님.”

보이지 않는 칼날이,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서로를 찌를 수 있게 겨누면서 불편한 네 사람의 식사는 시작되었다.

주로 대화는 하태경과 정상철이 나눴고 무경은 입을 다문 채였다.

그렇다고 또 음식을 먹는 것도 아니었고 감잎차만 조용히 마실 뿐이었다.

제 앞에 고귀한 자태로 앉아있는 무경을 힐끗거리던 정나경이 조심스럽게 젓가락질하여 무경의 접시 위에 새송이 전복구이를 하나 올렸다.

“되게 맛있더라고요. 드셔보세요.”

무경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정나경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지.

제게서 무경의 검은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모르자 정나경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저 미소를 보고 있자니 무경의 뇌리로 불시에 한 사람이 스쳤다.

웃을 때마다 복숭앗빛으로 물드는 한 여자의 말간 두 뺨이.

복숭아나 사과나 딸기나 토마토나, 세상의 온갖 상큼한 과일을 죄다 때려 박은 듯한 그 얼굴을 가만 바라보고 있노라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채요원이라는 여자는 고단수인가 아니면 타고난 건가. 뭐가 됐든 대단한 건 인정하는 바다.

붉어진 얼굴 하나로 자신을 꼴리게 하는 여자는 난생처음이었으니.

“무경 씨. 왜 안 드세요? 전복 싫어하세요? 음식이 입에 안 맞으세요?”

무경 씨, 그 말을 입가에서 나직이 읊조려보던 무경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의미심장한 답변을 내놓았다.

“아무거나 안 먹습니다.”

“아…… 네…….”

“싸구려는 더더욱. 비위가 많이 약합니다. 입맛도 까다롭고.”

정상철의 분주하던 젓가락질이 허공에서 멈칫한 건 찰나였고, 하태경의 뱀처럼 가느다래진 시선이 무경의 세련된 옆태에 비딱하게 닿았다.

“하 상무.”

“정나경 씨.”

하태경과 무경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와 허공에서 교차했다.

“안 그래도 내가 정나경 씨를 다시 만나게 되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었는데 말이에요.”

제 옆에 무릎 꿇고 앉아 감잎차를 채우려는 직원에게 하지 말라 손을 들어 저지한 무경이 찻잔을 테이블 위에 달칵 내려두며 손깍지를 꼈다.

“네. 편하게 물어보세요.”

머리칼을 다시 한번 쓸어올린 정나경이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깔면서 미소 지었고, 깍지 낀 손 위에 턱을 괸 무경은 입매를 비스듬하게 끌어올리며 물었다.

“약. 어떻게 참아요?”

“네?”

비스듬히 깔려있던 정나경의 눈동자가 혼비백산하듯 급하게 올라와 무경을 쳐다본다.

“펜타닐. 어떻게 참느냐고.”

가지런하던 정나경의 눈썹 앞머리가 불시에 찡그려졌고 그 표정이 꽤 볼만하다고 생각하면서 무경은 웃었다.

그래. 그거거든. 당신 같은 여자와 어울리는 표정은. 어디 감히 되지도 않는 흉내를 내고 있어.

“아. 이런 질문 숙녀분에겐 실례인가? 실례예요?”

손깍지를 푼 무경이 우아한 자태로 젓가락을 손에 그러쥐었다.

“오해는 말아요. 순수한 궁금증일 뿐이니. 난 담배 하나도 잘 못 끊어서 말이에요.”

무경은 조금 전, 정나경이 자신의 접시 위에 내려줬던 새송이 전복구이를 다시 쥐고 테이블 위로 버리듯 매정하게 떨어트렸다.

“끊고 싶어서 나름 노력을 하는데도 잘 안 되네.”

행동과는 다른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그래서 묻는 겁니다. 팁 좀 얻으려고. 그 약을 대체 어떻게 참지? 어떻게 참아요?”

“하무경 상무. 그만해라.”

하태경의 냉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무경은 왼손을 들어 올리며 그에게 입을 다물란 제스처를 간단히 취했다.

“펜타닐이 금단현상이 그렇게 대단하다면서. 정나경 씨 이제 보니 보기보다 이게 아주 세신 모양이다.”

무경이 검지로 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리던 그 순간에 챙그랑! 정상철은 젓가락을 세게 집어 던졌다.

“하태경 부사장. 동생분이 상당히 버릇이 없으시네요.”

정상철이 경고하듯 마디마디에 힘을 주었다.

“죄송합니다, 총리님.”

정상철 앞에서 고개 숙였던 하태경이 다시 무경의 옆태를 노려보았다.

“하무경 상무.”

하태경의 견고했던 표정 역시 파열 직전으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가 떼어내면서 특유의 근엄한 어조를 뽐냈다.

“총리님께서 기분이 상당히 언짢으신 것 같다. 당장 사과드려라.”

“뭘 그렇게까지 기어요, 형님.”

무경 혼자서만 온갖 여유를 온몸에 칭칭 감고서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려 다시 제 빈 잔에 감잎차를 채우란 신호를 보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봤자 공무원이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직원은 무릎을 꿇고 앉아 무경의 빈 잔에 향긋한 향이 감도는 감잎차를 채웠고, 무경은 그 찻잔을 그러쥐어 조용히 입가로 가져갔다.

“허허!”

한 방 먹었다는 듯이 정상철이 애써 웃으며 무경을 정시했다.

“우리 하무경 상무가 내게 뭐 불만이 있으신가? 아니면 우리 딸내미가 영 맘에 안 드시나?”

“어디서 반말이야. 곧 끈 떨어지면 아무것도 아닐 양반이.”

“무…… 뭐야?!”

“야, 하 상무!”

삽시간에 엄청난 분위기가 형성됐다.

“…….”

잠시 침묵을 유지한 채, 감잎차가 담긴 찻잔을 입가로 조용히 가져가던 무경이 근처에 대기하고 있는 직원들에게 그만 나가보라 손짓했다.

그들이 곧은 인사와 함께 문을 닫고 나갔고, 그제야 무경은 찻잔을 달칵 내려두며 정상철을 똑바로 쳐다봤다.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정권은 반드시 교체될 테고 정치 보복은 꼬리표처럼 따라올 테고 파란 지붕 아래의 저분 말이에요.”

무경의 검지가 하늘 위를 두 번 콕콕 찌른다.

“지금 말 많지 않습니까.”

대통령을 말하는 것이었다.

“현재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와 사이 안 좋은 것으로도 유명하시죠? 언론에서 뭐라고 떠들어대는지 잘 아실 텐데요. 아주 좆됐다고들 하잖아요?”

“…….”

“잘하면 잡혀 들어갈 것 같던데. 저분 잡혀 들어가면 총리님은 안전할 것 같으십니까? 저분이 임명하셨죠? 인사청문회에서 반발이 빗발쳤음에도 불구, 반강제적으로 밀어붙였잖습니까. 저분이.”

평소 고혈압이 있는 정상철이 억 소리도 못 내고 제 뒷목을 급하게 부여잡았다.

“아, 아빠!”

정나경이 정상철의 팔뚝에 매달리듯 붙잡았다가 무경을 쏘아보듯 쳐다봤다.

“끈 떨어지면 오갈 데 없어지니 하루라도 빨리 따님 이용해서 재벌 끈이라도 붙잡아보고 싶으신 모양인데.”

무경은 그런 정나경을 똑같이 직시하면서 제 소매의 커프스링크를 여유롭게 다시 채웠다.

“정권 교체되어 힘 떨어지면 정치 보복당하는 건 당연지사. 따님 마약쟁이인 거 까발려지는 건 어차피 시간문제에다가 나랑 이런 식으로 엮인 거 상대측이 알아내면 나도 같이 조사 들어올 테고.”

“…….”

“언론은 내게 마약쟁이 프레임 및 저렴한 사생활 등 온갖 것들 다 씌워 깎아내리기 바쁠 테고 이사진들에게 내 입지는 좁아질 테고!”

퍼렇게 치솟은 목소리가 순식간에 공기까지 잠재우는 듯했다.

“어디 씨발, 갖다 붙일 게 없어서 나한테 저따위 싸구려 약쟁이를 갖다 붙여.”

정상철을 주시하던 검은 눈동자가 이제 하태경에게 직선적으로 꽂혀 묻는다.

“내가 그렇게도 우스워요?”

무경의 서슬 퍼런 눈길에 하태경의 온몸은 순간 죄이는 기분을 받았다.

“형님은 내가 존나 같잖은 겁니까, 아니면 존나 무서운 겁니까?”

상대의 사지를 단숨에 옥죄었던 그 냉철한 시선이 이제,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정나경을 응시한 채 경고성 짙은 발언을 던졌다.

“한 번만 내 눈에 또 띄어. 한 번만 더 나랑 이런 식으로 엮여. 그땐 너 진짜 나한테 죽는다.”

탄탄한 허벅지 위에 놓여있던 리넨 냅킨을 신경질적으로 잡아채 테이블 위로 집어 던진 무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익한 대화, 마저 나누시죠.”

인사는 각 잡힌 자세로 극진하게 올린 그가 슈트 재킷을 허리춤에 대강 끼운 채로 문을 열고 그곳을 나갔다.

편백 바닥을 밟아 긴 복도를 걸어 나가면서 무경은 웃었다.

선선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

존나 속이 다 시원해서.

이 속 시원한 값은 언젠가 다시 돌려받게 될 테다. 이미지를 중시하는 하태경을 저런 식으로 국무총리 앞에서 쪽을 주었으니 말이다.

누구에게나 ‘오버 버닝 시기’라는 것은 한 번쯤 찾아온다. 번아웃 증후군이랄까?

정신없이 살아오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나사가 한꺼번에 탁 풀리며 의욕이 하나 없는 나날의 반복. 밀려드는 허무함. 자기혐오. 무력감 등.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무경이 그 시기와 직면한 순간이었다.

싸우기도 싫고. 이기기도 싫고.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내가 향하는 곳이 나락이라면, 조금 더 있어 보이는 나락 길은 어떠할까 생각했다.

“벌써 가시게요?”

“이 정도면 오래 버텼죠.”

시은재 사장이 다시 무경을 맞았고, 무경은 직원이 가지런히 정리해둔 구두에 발을 끼워 넣으면서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수표 한 장을 직원에게 건넸다.

“늘 감사합니다, 상무님.”

“별말씀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팁을 받아드는 직원에게 대충 대꾸해주면서, 무경은 다른 손에 쥐어져 있는 핸드폰을 귓가에 여유롭게 갖다 댔다.

뚜우. 뚜우.

“차태호 실장님. 퇴근길에 말이에요.”

태호가 전화에 응답하자마자 무경의 활기를 띤 음성이 고풍스러운 공간을 나직이 울린다.

“합의서랑 모두가 뻑갈 정도의 멋들어진 슈트 하나만 챙겨다 주시죠?”

[예?]

때마침, 막 식사를 마치고 나온 방 기사가 무경을 발견했다.

저 멀리서 잔디를 밟으며 헐레벌떡 달려오는 그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이면서 무경은 환히 웃었다.

“우린.”

내가 지금까지 하던 게임은 결국 러시안룰렛이었고, 나는 지금 막 방아쇠를 당겼다.

“아침이 밝는 대로 백야마을로 내려갑니다.”

네가 못 하면 내가 해야지.

마지막 한 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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