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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과백야-81화 (81/116)
  • 81화. 절망적일 정도로 좋아서

    포터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으로 조금 멀리 보이는 바닷가를 응시했다.

    오가는 대화는 하나 없었지만, 철썩이는 파도 소리 덕에 이 오랜 침묵도 꽤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괜스레 핸들을 만지작거리던 요원이 조수석에 앉아있는 무경을 힐끗 쳐다봤다.

    무경은 습관처럼 이마를 괸 채로 눈을 감고 있었는데, 고단해 보이긴 했지만 잠을 자는 것 같진 않았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요원의 핸드폰이 갑작스레 울렸고, 핸들을 틀어쥐고 있던 손을 옮겨 핸드폰을 꺼낸 요원이 액정을 확인하고선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서태하] 액정에 뜨는 그 이름 때문이었다.

    잠시 무경을 한 번 더 힐끗거린 요원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 댔다.

    “응, 태하야. 오랜만이다.”

    [잘 지내?]

    서태하는 경찰학교 동기로서, 요원과 사계절을 연인이란 이름으로 지냈던 사이다.

    헤어진 사이가 어떻게 다시 친구가 되냐, 라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서태하와는 그게 가능했다.

    친구로 남았다고 해서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고, 그에게서 이렇게 연락을 받은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최근 근황도 제삼자를 통해 전해 들었다.

    서울의 한 지구대에서 근무하던 그는 경찰 일이 적성에 맞지 않음을 깨닫고 과감하게 퇴사를 했고, 아버지가 운영하는 떡집을 젊은 감성을 반영하여 SNS에서 대박 친 뒤, 매출을 억 단위로 상승시켰다고 한다.

    [요원아? 들려?]

    요원은 괜히 무경의 눈치를 살폈다. 이마를 괸 채로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자세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잠들었나? 생각하며 요원이 목소리를 급격히 낮췄다.

    “잘 있어. 왜 전화했어?”

    [오랜만인데 좀 반겨주지. 대뜸 왜라니. 조금 민망해진다.]

    “미안.”

    [영화 보다가 갑자기 네 생각이 나서.]

    요원은 침묵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다시 무경 쪽으로 고개를 틀던 순간.

    “!”

    요원의 눈동자가 흡 하고 크게 벌어졌다.

    어느덧 제게로 완전히 방향을 틀어 가까이 다가와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저 철썩이는 파도처럼 크게 요동쳤다. 그 속을 꽉 채운 남자의 얼굴도 함께 흔들린다.

    [서울에 언제 한번 안 와?]

    자신을 말없이 응시하는 무경을 떨리는 눈동자로 쳐다보면서 요원은 간신히 대답했다.

    “알잖아……. 갈 일 없는 거…….”

    [한번 와.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게…….]

    그 뒤론 서태하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요원이 쥐고 있는 핸드폰을 가뿐하게 잡아 뒷좌석으로 툭 던진 무경이 요원의 뒷덜미를 감싸 쥐고 제게로 끌어당겨 그대로 입 맞췄기 때문에.

    “흐읍.”

    두 사람의 입술이 성급하게 맞물렸다.

    벌어진 틈새로 서로의 혀가 정신없이 얽혀들었다. 아, 소리를 내면서 요원은 무경의 셔츠를 꽉 틀어쥐었다.

    무경은 제 고개를 사선으로 비틀어 더욱 깊숙이 키스했다.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안달 난 몸이 주체되지 않는다.

    “하아. 저 새끼 누구? 전 애인? 친구?”

    잠시 입술이 떨어졌을 때, 그가 들뜬 숨과 함께 물었다.

    “둘 다요…….”

    “둘 다?”

    요원에게로 몸을 더 기울인 그가 요원이 입고 있는 순경복의 단추를 툭툭 풀어 내리면서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킥, 한 번 웃었다.

    “뭐 하는 놈인데?”

    “서울에서 떡집 해요.”

    “떡집?”

    무경이 웃었는데 마치 그것은 신랄한 비웃음과도 같았다.

    자신과 비교도 되지 않는 전 애인의 급에 말이다.

    “그 떡집이 서울 어디에 있는데.”

    “그게, 왜 궁금하신데요?”

    “왜긴. 문 닫게 하려고 그러지. 아니면 그 옆집에 동녘 이름 달고 더 큰 떡집을 차려서 망하게 하거나.”

    “그거야말로 제보해야겠네요. 서민을 향한 완전한 갑질이니까.”

    “하라고 해도 못 하잖아요, 채 순경은.”

    좁디좁은 운전석에서 서로의 몸이 빈틈 하나 없이 맞물렸다.

    키가 워낙 큰 무경인지라 불편함을 여과 없이 표출하듯 눈매를 찡그렸다가 곧 요원과 눈을 맞추며 싱그럽게 미소 지었다.

    “좁다.”

    간혹가다 보이는 남자의 천진한 미소가 제 가슴을 자꾸만 두드린다. 지금 그가 저의 닫혀있는 입술을 혀로 툭툭 두드려 여는 것처럼.

    “떡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제 아랫입술을 엄지로 슥 문질러 닦으며 화려한 미소를 지어 보인 무경이 요원의 귓불을 살짝 깨물며 속삭이듯 물었다.

    “난 쳐도 되나?”

    몸을 더 기울여 다가온 무경에 의하여 요원은 완전히 운전석에 갇히듯 그렇게 되어버렸다.

    “떡 칠까 우리? 여기에서 말이야.”

    “대체 그런 말은…….”

    “왜? 예전엔 좋아했잖아.”

    모든 곳이 사각지대다.

    “응? 해도 돼?”

    요원의 둥그런 뒤통수는 굳게 닫힌 운전석 문가에 완전히 기댄 채로, 아니 눌린 채로, 제 몸 위를 커다란 그림자로 덮고 있는 무경을 떨리는 눈으로 올려다보면서 애꿎은 핸들만 손에 꽉 틀어쥐었다.

    “왜 왔냐고 물었지.”

    이성은 안 된다 꾸짖고 본능은 된다 재촉한다.

    “보고 싶어서 왔어.”

    남자의 손이 고운 머리칼을 헤집고 어느덧 반쯤 벗겨진 새하얀 어깨 위에 입 맞췄지만 요원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네가 보고 싶어서.”

    “…….”

    “네가 나 안 반기는 건 아는데. 그래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네가 보고 싶어서.”

    무경이 끌어당기면 당기는 대로, 입 맞추면 맞추는 대로, 요원은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 새끼 보러는 서울 오지 마.”

    머리는 밀쳐내라 자꾸 몸에 신호를 보내는데 몸이 통 말을 듣지 않는다.

    “굳이 오려거든.”

    남자의 벨트가 철컹 풀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 보러 와.”

    요원의 바지도 속옷과 함께 순식간에 내려졌다.

    “혹시 너도 내가 보고 싶다면.”

    다리가 벌어졌고 무경은 제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어떠한 애무도 없이 저 자신을 단숨에 밀어 넣었다.

    키스 한 번으로 달아오른 요원의 몸은 그를 아주 부드럽게 받아들였다.

    “아…….”

    더운 숨이 공기 위를 날았다. 철썩이는 파도 위를 둥둥둥 떠다녔다.

    “하아…… 아…….”

    점점 흥분하는 제 신음 속에서, 요원은 여전히 진공 상태인 제 머리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보았다.

    “아…….”

    그러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소름 끼칠 정도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 남자와 있는 이 시간이 절망적일 정도로 좋아서.

    ***

    그로부터 별일 없던 며칠의 시간이 더 흘렀다.

    고풍적인 한옥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시은재」라는 식당 앞에 무경이 탄 검은 세단이 멈춰 섰다.

    “상무님. 도착했습니다.”

    느른하게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고 있던 무경이 스르륵 눈꺼풀을 밀어 올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약속 시각보다 정확히 45분 늦은 상황이었고, 이건 다분히 고의적인 행동이었다.

    “나오실 때 연락해주십시오, 상무님.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들어와서 식사하세요.”

    “예?”

    핸들을 틀어잡고 있던 방 기사가 무경을 돌아봤다.

    셔츠 깃을 세운 무경은 풀어헤쳤던 넥타이를 목에 두르고 있었다.

    “아닙니다, 상무님. 저는 근처에서 간단하게 식사하면 됩니다.”

    “들어오세요. 오늘은 차 실장님도 안 계셔서 홀로 적적하실 텐데.”

    “하지만,”

    “거 참 진짜.”

    냉소적인 목소리가 터지자 방 기사가 입을 꾹 다물며 냉큼 고개를 숙였다.

    “예, 상무님. 들어가겠습니다.”

    “왜 꼭 여러분들은 한 번 이상을 말해야 내 말을 듣지? 대체 왜 그래요?”

    무경의 잔소리 비슷한 볼멘소리에도 방 기사의 얼굴엔 싫은 기색 하나 없었다.

    자신을 위하는 그 마음을 모르지 않으니 당연했다.

    시은재는 멤버십으로 운영되는 한식당이었는데, 벌써 정문에서부터 그 위용이 대단했다.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고 신분이 확인된 자에 한해서만 그 문은 열린다.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로 방 기사와 고가의 돌담을 성큼성큼, 오르는 무경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도 싸늘하다고 방 기사는 생각했다.

    저녁 선약의 상대가 하태경이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오셨습니까, 하무경 상무님?”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사뿐사뿐 걸어 나온 시은재 사장이 무경을 직접 정중하게 맞이했다.

    “우리 직원입니다. 방 하나만 비워줘요.”

    무경이 고갯짓으로 방 기사를 가리켰고 시은재 사장은 곁에 대기하고 있는 직원을 보며 고개를 한번 끄덕거렸다.

    그 신호를 알아차린 고운 한복 차림의 직원이 방 기사를 빈방으로 안내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시겠습니다.”

    “어느 방인지만 알려주세요. 담배 한 대만 태우고 들어가게.”

    “늘 가시는 오른쪽 끝방입니다.”

    무경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머니를 뒤적여 담뱃갑을 꺼냈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무는 그 순간까지도 시은재 사장이 곁을 떠나지 않자, 무경은 그녀와 눈을 맞추며 불쾌한 얼굴로 웃었다.

    “뭐. 한 대 같이 태우자고? 드려요?”

    시니컬한 억양이 한껏 리듬을 탔고 묘한 가시가 돋아난 무경의 분위기를 알아차린 시은재 사장이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라이터를 탕, 탕, 탕, 위로 튕겨 불을 붙인 무경이 담배 연기를 스읍 깊숙이 빨아들이며 허공을 응시했다.

    후우- 새하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주변에 넓게 퍼졌다.

    주머니를 뒤적인 그가 핸드폰을 꺼내어 얼마 전 찍었던 사진 한 장을 바라보았다.

    바다를 등진 채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눈을 가늘게 좁힌 채로 그 사진을 곱씹듯 한참을 바라보면서, 무경은 볼이 움푹 팰 정도로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고 또 뱉고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렇게 몇 개비를 태우며 꼬박 15분을 더 낭비하고 약속 시간엔 한 시간을 늦었다.

    이 또한 상대를 꼴 받게 하려는 의도였다.

    시은재 사장이 말한 오른쪽 끝방의 전통 창호 문 앞에 우뚝 멈춰 서자, 안에서 대기하고 두 직원이 남자의 그림자를 알아차리고 문을 양옆으로 활짝 열어젖혔다.

    무경이 안으로 들어서자 점잖게 대화 나누며 누군가와 식사하던 하태경이 뒤를 돌아 무경을 확인했다.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자세를 다잡은 무경이 허리를 숙였다가 세웠다.

    무경과 시선이 맞닿자마자 하태경이 눈썹 앞머리를 슬쩍 찡그렸던 것 같지만, 대외적으론 사이가 좋은 동녘의 형제인지라 하태경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우리 하무경 상무가 좀 바빠야지. 와 앉아라.”

    무경의 검은 눈동자가 하태경의 앞에 있는 두 사람을 잠시 비스듬하게 바라봤다.

    그곳엔 현(現) 국무총리 정상철과 정나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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