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80화 (80/116)

80화. 모래에 뒤섞인 사금을 걸러내듯

남이 병원은 협소했지만 갖출 건 다 갖춘 시골 병원이었다.

요원이 옥남이와 이야기를 나누러 간 사이, 병실 하나 달랑 있는 것을 갑순이 차지했다.

좁지만 깔끔한 병실 내를 주욱 둘러보고 있는 무경을 갑순이 조용히 불렀다.

“아야. 이리 잔 와봐야?”

갑순이 딱딱한 병실 매트 위를 툭툭 두드렸고, 무경은 별로 내키지 않는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제 곁으로 다가온 그를 인자한 시선으로 올려다보던 갑순이 갑자기 손을 뻗어 무턱대고 무경의 손을 붙잡았다.

무경의 얼굴에 불쾌감이 덕지덕지 묻어났으나 잡힌 손을 빼내진 않았고, 갑순은 그의 손등 위를 쓰다듬듯 문지르며 주름진 눈가를 휘어 웃었다.

“먼 사내 녀석이 손이 이라고 곱냐잉. 너는 일도 한번 안 해봤냐잉.”

생각해보니 딱히 손 쓸 일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손으로 하는 중요한 일이야 고작, 서류를 좀 넘겨보거나 만년필을 쥐고 사인을 휘갈기거나 정 급할 땐 딸이나 좀 치거나.

핸들을 직접 잡을 일도 거의 없고, 엘리베이터 버튼도, 식사를 차리는 일도, 커피를 마시는 일도, 어딜 가든 검지 하나만 까딱거리면 원하는 건 모두 다 제 눈앞에 떨어지는 생활.

이야, 굉장하지 않은가.

제 위대한 삶에 새삼 절로 감탄사가 흐른다.

“저는 주로 머리 쓰는 일을 했죠. 손이 아니라.”

“이잉. 아주 지랄 육갑을 떨고 자빠졌네.”

“이봐요, 어르신. 자꾸 저한테 상스러운 말씀 하시는데.”

“너는 우아래도 없냐잉. 이봐요가 머시여, 이 썩을 놈이?”

찰싹. 갑순이 무경의 손등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아야. 백수 총각.”

다시 주름진 눈가를 휜 갑순은 무경의 겉모습을 살폈다.

그의 탄탄한 몸을 잘 감싸고 있는 고급스러운 슈트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입을 연다.

“너 취직했냐잉. 그래가꼬 안 뵌 것이여? 다시 서울로 갈라고?”

무경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런 무경의 얼굴을 가만 웃으며 바라보던 갑순이 무경의 손등 위를 다정하게 두드려주었다.

“이잉. 잘됐네잉. 참말로 잘되았어.”

병실 내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작은 창문으로 시선을 가져간 갑순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랑께 우덜 같은 토백이들이 힘든 것이다. 마음 주고 나믄 다 떠나분께.”

무경도 갑순이 바라보는 그 창가로 무던한 시선을 돌렸다.

“너 보내놓고 나믄 우리 요원이 맴이 좀 그라거따.”

빛 아래에 누워 풍경을 담는 카메라 렌즈처럼…….

“우리 요원이가 불 꺼진 느그 집 앞에 서 갖고 암도 없는 그 집 안을 을매나 보고 있는지 니 아냐.”

무경의 시선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어둑한 창문 너머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갑순은 다행히 골절은 아니었고 근육 손상으로 보인다고 했다.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며칠 입원을 권했고, 무경과 요원 단둘만이 남이 병원에서 나란히 나와 왔던 길을 다시 거닐었다.

찌르르르. 찌르르르. 찌르르르.

여름이 짙어질수록 풀벌레 소리도 함께 짙어졌고 불어오는 바람에선 제법 열기가 느껴졌다.

무경이 앞서 걸었고 요원은 그의 뒤를 따랐다.

세 걸음 정도 떨어져 걷는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거리는 좁혀지지도, 더 멀어지지도 않고 변함없는 상태를 유지했다.

무경이 발걸음을 불시에 멈춘 그 순간이 바로,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던 순간이었다.

생각에 잠긴 채로 땅만 보며 걷던 요원이, 막 뒤돌아선 남자를 알아채곤 그 자리에 멈춰 고개를 젖혔다.

무경의 단정한 얼굴을 가만 바라보며 요원은 내내 궁금하던 질문을 던졌다.

“여긴 또 왜 오셨어요? 짐 가지러 오셨나요?”

무경은 잘 매만진 제 머리칼 안쪽에 대충 손을 쑤셔 넣으며 웃었다. 조소에 가까웠다.

“짐은 무슨. 저딴 시골집에 무슨 짐이 있다고.”

“그럼 왜 오셨는데요?”

“바다 보러.”

“바다요?”

“생각해보니 내가, 그 유명한 백야의 바닷가 한 번을 못 가봤더라고. 그렇게 예쁘다던데.”

무경이 요원의 앞에 한 걸음 두 걸음 더 다가섰고, 그의 향기를 품은 더운 바람도 함께 다가와 요원의 마음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주 좁은 간격만을 벌린 채로 우뚝 멈춰 선 그가 묻는다.

“같이 보러 갈래?”

설레는 제안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저 없는 냉한 어조였다.

***

두 사람이 탄 포터가 바닷가 주변의 어두운 주차장에 멈춰 섰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인적을 찾기란 어려웠고, 안전벨트를 풀면서 요원은 운전석의 무경을 가만 쳐다봤다.

어휴 존나 시끄럽네, 구시렁거리며 시동을 꺼버리는 남자를 말이다.

그가 누구인지 모르고 봤을 땐 남자가 운전하는 포터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는데, 그가 재벌가의 자제라는 것을 알게 되고 포터를 몰고 다니는 남자를 보니 어이없는 헛웃음이 다 실실 흘렀다.

이걸 노력이 가상하다고 해야 할지.

시동이 꺼진 조용한 포터 안, 남자가 고개를 틀어 자신을 마주 본다.

남자의 눈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갑자기 온 세상의 빛이 사라진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 정도로 남자의 눈은 매우 검고도 깊었으므로.

“왜 그렇게 봐요.”

“……네?”

“하고 싶나?”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입만 작게 벌리고 있는데, 핸들을 끌어안은 남자가 농염하게 웃으며 더 어이없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순경복 입고 카섹스도 나쁘진 않지. 해볼래?”

미친놈. 그렇게 짓씹으면서 요원이 조수석 문을 덜컥 열고 그곳에서 내렸다.

진짜 미친놈.

바닷가로 향하는 성난 발걸음과는 달리 쿵쿵거리는 제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이 뛰고 있었다.

저딴 싸구려 음담패설에도 말이다.

그러나 이젠 크게 놀랍지도 않았다.

나는 쉬우니까.

“…….”

모래사장 위에 걸터앉은 채, 세워진 무릎을 끌어안고 밤바다를 바라보는 요원의 옆으로 무경이 다가왔다.

남자가 요원의 앞에 내민 건 레몬 향이 짙은 스파클링 음료였다. 왜 이렇게 늦나 했더니 이걸 사 오느라 그랬던 모양이다.

“운전 좀 대신해요.”

“또요?”

“그래야 두 번이지 뭘.”

무경이 차 키를 넘긴다. 그의 손에 쥐어있는 맥주캔에 요원은 기가 다 막혔다.

“뻔뻔하기론 아마 하무경 씨가 세상에서 일 등일 거예요.”

“좋네. 뭐든 일 등은 좋으니까.”

받아요, 하면서 무경이 다시 눈앞에서 500㎖의 페트병을 흔들었다.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면서 요원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요원의 옆에 막 앉으려던 무경이 잠시 머뭇대는 것을 보고 요원은 차게 웃었다.

“왜요. 모래 위엔 못 앉으시겠어요? 의자라도 구해다 드릴까요, 동녘 그룹의 하무경 상무님?”

“그래 줄래요?”

“하무경 씨.”

“농담.”

피식 웃은 무경이 제 슈트 재킷을 벗어 허공에서 한번 펄럭이곤 그것을 모래사장 위에 깔았다.

요원에게 그 위에 함께 앉자 고갯짓하면서 남자가 고귀한 몸을 앉혔다.

하, 진짜.

요원은 싫은 내색을 하면서도 그의 재킷 위에 얌전히 몸을 앉혔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서로의 옷깃이 스칠 정도의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요원은 레몬 음료를, 무경은 맥주를 마시면서 두 사람은 같은 곳을 건너다봤다.

주변의 소음이라곤 파도가 쓸려왔다 빠져나가는 소리가 전부였다.

백야마을 근처의 바다는 거대하고 아름다웠다.

물결을 이루어 다가오다 뭍에 닿으면.

하얀 거품으로 부서지는 파도는, 바다에서 제일 가까운 모래를 축축하게 만들다 사라졌다.

소금 냄새를 품은 바닷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동시에 헝클이고 지나간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황량하게 넘실거리고 있는 바다 저편을 응시하면서 무경이 먼저 말을 꺼냈다.

“박태상 기자에게 왜 연락 안 했어요. 기다렸는데.”

“했었어요.”

무경이 그랬냐는 표정으로 요원의 새하얀 옆모습에 시선을 내렸다.

여자의 얼굴은 파도 같았다. 눈앞에서 새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금방 끊었지만요.”

중얼거리면서 요원은 음료병을 다시 입가로 가져갔다.

“왜?”

무경도 다시 밤바다로 무던한 시선을 돌렸다.

요원에게선 한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무경의 귓가에 철썩이는 파도 소리만이 들리다가 자연의 소리보다 더 청아한 여자의 음성이 곧 들려왔다.

“하무경 씨가 불행해지는 건 싫어서요.”

막 맥주캔을 입가로 가져가려던 무경의 손짓이 멈췄다.

“그런 걸 바랐던 게 아니에요.”

무경을 남겨두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요원이 갑자기 바닷가 쪽으로 걸어간다.

신발과 양말을 얌전하게 벗은 그녀가, 입고 있는 순경복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곤 철썩이는 파도에 발을 담갔다.

파도가 철썩이며 들어오면 물러섰다가, 파도가 밀려 나갈 때면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그녀의 몸짓이 마치, 바람에 살랑이는 꽃잎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바닷바람이, 묶지 않은 그녀의 머리칼을 스친다. 멋대로 헝클인다.

요원이 제 뺨을 때리며 흩날리는 머리를 가만 놔두면서 옆을 바라보았다.

어렴풋이 미소 짓고 있는지 그녀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갑자기 찰칵, 하는 소리가 들리자 요원이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한번 찰칵 하는 소리가 들린다.

요원에게 초점을 맞춘 무경의 핸드폰에서 나는 소리였다.

“뭐예요? 지금 설마 제 사진 찍으신 거예요?”

“응.”

“왜요?”

“음. 예뻐서?”

태연하게 대답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 봤으니 이만 가죠.”

모래가 잔뜩 묻은 고가의 재킷을 잡아채어 허공에서 몇 번 펄럭거려 모든 모래를 다 털어버린 그가, 바닷바람을 뚫고 다시 포터로 향하기 시작했다.

“벌써요? 고작 십 분 볼 거 혼자 오지 왜 저까지 데리고 왔는데요!”

갑자기 자리를 옮기는 무경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한 요원은, 벗어두었던 양말과 신발을 헐레벌떡 주워 그의 뒤를 따랐다.

“이봐요, 하무경 씨!”

요원이 난색을 보이며 포터에 다다르자, 편의점 쪽에서 걸어 나온 무경이 대뜸 요원의 앞에 몸을 낮추고 앉아 모래로 범벅이 된 요원의 새하얀 발을 그러쥐었다.

“지금 뭐 하시는!”

얼른 그의 손에 잡힌 발을 빼내려고 하였으나, 무경은 그 발목을 다시 꽉 그러쥐고서 놓지 않았다.

“차에 모래 떨어져요.”

발목이 얼마나 가는지 여자의 발목은 남자의 손안에 다 들어올 정도였다.

“난 차를 굉장히 아끼는 사람이라. 남자는 대부분 그래.”

생수통의 뚜껑을 돌려 연 무경이 맑은 물을 그녀의 발 위에 흘렸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저 포터는 싫어하셨잖아요.”

“내가?”

“몇 번 봤어요. 디자인 후지다 바퀴 걷어차고 시끄럽다 욕하고.”

“그건 또 언제 봤대.”

무경이 웃음을 흘리면서 계속해서 그녀의 발 위에 투명한 물을 흘려보냈다.

모래가 차츰 씻겨나갔고 파도는 계속해서 철썩였다.

요원은 고귀한 자태로 제 발을 씻겨주고 있는 남자를, 마치 모래에 뒤섞인 사금을 걸러내듯 그렇게 제 눈동자에 고이 모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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