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79화 (79/116)

79화. 공기가 존재하는 곳 어디든

[ ※ 79-80 추천곡 : 백현 – 나인가요 ]

요원은 다시 백야마을로 돌아왔고 그로부터 5일의 시간이 더 흘렀다.

무경에게선 연락이 없었고 요원 또한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오후에 홀로 팔각정을 찾은 요원은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면서 차창 너머의 아름다운 풍경을 시야에 담았다.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르는 자장면이 와부러써요! 군만두는 싸비스!”

테이블 위에 자장면과 군만두를 내려둔 팔각정 사장이 웃으며 다시 주방으로 향하려던 때에.

“잠시만 앉아보세요, 사장님.”

생전 처음 듣는 요원의 낯선 목소리가 팔각정 사장의 두 발을 붙들었다.

“…….”

요원의 맞은편에 앉은 팔각정 사장은 계속해서 묵묵부답을 유지하는 요원의 눈치를 살폈다.

늘 해말간 모습만 보다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꼭꼭 숨기고 있던 냉철함을 이제야 드러냈던지.

괜히 순경이 아니었구만? 팔각정 사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장님. 얼마 전에 동녘 그룹과 토지 합의서 쓰셨죠?”

의외의 말에 팔각정 사장의 눈이 큼지막하게 벌어졌다.

“옴마! 채 순경! 그거슬 시방 어찌케 알아써야?”

“봤습니다, 며칠 전에. 사장님 댁에 갔다가.”

“이잉. 그때 갑자기 사라졌던 그 날을 말하나 보네잉.”

팔각정 사장이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곧 죄인처럼 요원의 앞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아따, 미안하요잉.”

“사장님.”

창가에 머물렀던 요원의 시선이 정면으로 돌아와 팔각정 사장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설핏 미소 지었다.

“합의하신 걸 탓하자는 게 아닙니다.”

이제야 다정한 채 순경처럼 보였다.

“잘하셨어요. 늘 수도권에서 장사하고 싶어 하셨잖아요. 축하드려요. 사장님껜 정말 잘된 일이에요. 좋은 기회고요.”

“채 순경.”

“하지만, 백야마을에서 떠나기 싫어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사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이잉, 알제. 나가 잘 알제잉. 백야마을이 우덜한티 어떤 으민지 나가 잘 알제.”

“그래서 전 단지 궁금해서 여쭤볼 뿐이니 솔직하게 대답해주세요. 하무경 상무가 뭐라고 하면서 토지 합의서를 내밀던가요.”

“옴마! 채 순경!”

팔각정 사장이 좀 과장되게 아무도 없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가 금세 요원에게로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건 또 어찌케 알아부러써? 암도 모른 줄 알았는디. 믿겨진가 채 순경? 하무경 씨가 시방 그란께 동녘 그룹 상무드만. 우덜이 깜박 속았지 머여. 어찌케 사람을 그라고 까맣게 속여 불 수가 있당가? 그때 놀란 것만 생각하믄 아직도 이 심장이 벌떡거려야?”

“말씀해주세요, 사장님.”

요원의 알록달록 단풍 색을 닮은 눈동자가.

“하무경 씨가. 아니 하무경 상무가.”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무채색으로 변한 건 순간이었다.

“뭐라고 하면서 합의서를 내밀던가요.”

팔각정 사장이 그 분위기에 몸을 흠칫 떨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고는 상세하게 그날의 일을 들려주었다.

까만 밤이 찾아왔다.

어둠 속을 유일하게 비추는 파출소 내에 멍하니 앉아 긴 상념에 잠긴 요원은 아까부터 박태상 기자의 명함을 바라보고 있었다.

팔각정 사장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하무경 씨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 했는디…… 채 순경이 본 그거슨 사실 이면 합의서여. 진짜 합의서는 내가 잘 모셔놨다 안 하요. 하무경 씨가 아니 그랑께 동녘 그룹이 나한티 투자를 해준다 안 하요. 여그서 썩기엔 내 실력이 너무 아깝다고. 머라드라? 머랭? 머슐랭? 암튼 거시기를 받아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람서. 동녘 그룹이 갖고 있는 백화점에다 가게를 내준다 안 하요잉. 그거시 진짜 합의서 내용이지라.’

각진 모서리 끝으로 유리 상판 위를 톡톡, 톡톡 느린 박자로 두드리던 요원이 하아, 하는 깊은 한숨과 함께 제 머리칼을 모두 다 쥐어뜯어 버릴 것처럼 부여잡았다.

그러다가 또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바라보고.

그러다가 또 마른세수하듯 양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문지르고.

이제 입술까지 잡아 뜯던 요원이 무언가 큰 결심을 한 듯 핸드폰을 잡아 들었다.

다른 손에 쥐어진 명함과 핸드폰 액정을 번갈아 쳐다보며 번호를 꾹꾹 눌렀다.

뚜우. 뚜우. 뚜우.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상대가 전화를 달칵 받았다.

[박태상입니다.]

냉소적인 어투에 요원이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는 운을 떼었다.

“제보 드릴 것이 있는데요.”

[제보요? 실례지만 어디시죠?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는…….”

다음 말을 뱉기 위해 달싹이던 입술이 그대로 멈췄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나가질 않는다.

‘하나도 안 우스워요, 채요원 순경. 네가 우스웠다면 내가, 그 자리에서 저 새끼랑 같이 낄낄거리면서 앞섶을 붙잡았겠죠? 나는 먹어봤다고 씨발 자랑질하면서?’

무조건적으로 내 편이 되어준 남자를 기억한다.

‘그래서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한데. 채요원 씨, 하나도 안 쉬워. 호구 아니야. 오히려 자존감 높은 멘탈 갑이지. 그래서 특별해.’

난 남자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람인데, 그런 나를 조건 없이 띄워주던 그 남자를 기억한다.

[여보세요?]

이러면 안 되는데. 정말 안 되는데.

‘나 채 순경에게 그간 너무 받기만 한 것 같아서. 이제 채 순경에게 돌려줄까 합니다.’

사실은 내가 더 많은 것을 그에게서 받은 것 같아서.

[어떤 제보죠?]

결국 나는 또…….

“아니요.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했네요.”

……이렇게 되는구나.

“늦은 시간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여보세,]

전화를 뚝, 끊어버린 요원이 액정에서 깜빡거리는 번호를 바라보며 황망한 얼굴로 헛웃음 쳤다.

무경은 제게 나쁜 놈이 맞는데 또 나쁜 놈이라고 하자니 제게 나쁜 짓을 한 놈은 아니라서.

백야마을을 망치러 왔던 놈은 맞는데, 오히려 백야마을에 도움을 줬던 일이 더 많은 것만 같아서.

미워하려야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그 남자 때문에 이렇게도 마음이 고달프다.

결국, 요원은 박태상 기자의 명함을 반으로 갈라 찢어버렸고 그것을 휴지통에 집어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정말…… 쉬워.

***

요원이 자전거를 타고 비포장길을 달렸다.

불 꺼진 무경의 집을 애써보지 않고 미련 없이 지나쳐 제집으로 향했다.

“할머니. 저 왔어요.”

철제문을 열고 들어선 요원이 마당 한편에 자전거를 잘 세워두고 피로한 목덜미를 문지르며 대청마루로 향했다.

“저녁은 안 먹을게요. 대충 먹고 왔거든요. 입맛도 별로 없고요.”

지친 몸을 대청마루 위에 철퍼덕, 눕힌 요원이 느릿하게 눈을 끔뻑거리며 별이 콕콕 박혀있는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저 그냥, 사과 하나만 먹을까요?”

까만 밤하늘에 박힌 별이 꼭, 아이스크림에 박힌 바닐라빈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대답 없는 집 안을 바라봤다.

“할머니? 집에 안 계세요?”

상체를 서서히 일으켜 세운 요원이 다시 한번 갑순을 불렀다.

“할머니.”

아예 몸을 일으켜 세운 그녀가 갑순이 있어야 할 주방 쪽으로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할머니?”

일순 정적이 찾아왔다가.

“할머니!”

요원의 외침이 백야마을에 넓게 울려 퍼졌다.

“할머니, 괜찮아, 괜찮아.”

갑순을 업고 뛰다가 몇 번 넘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버텨낸 요원은 다시 어두운 비포장길을 내달렸다.

타닥. 탁. 탁. 탁!

한참을 바삐 달리던 요원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멈춰 선 것은 찰나였다.

어디선가 익숙한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이다.

“아.”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된 것도 순간이었다.

자신과 일정 거리 벌리고 서 있는 세련된 슈트 차림의 남자 때문이었다.

요원의 등 뒤에 업혀있던 갑순 역시 남자를 발견하곤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빼꼼 내밀곤 환히 웃었다.

“옴마, 백수 총각! 니 으디 갔다가 인자 왔냐잉.”

남자는 여전히 침묵을 유지한 채 그 자리에 가만 서 있었다.

“니 그라고 섯지만 말고 야 좀 말려봐야? 발목 쪼까 다친 거로 야가 이 난리랑께?”

갑순이 다시 요원의 등 뒤에서 구시렁거렸다.

“아야. 누가 보믄 이 할미 저시상 간 줄 알어야? 너 참말로 빌 것도 아닌 것 갖고 어째 이라냐잉.”

“별거 아닌 게 어딨어요! 아프시잖아요!”

요원이 남자를 애써 외면하며 빽 소리쳤다.

“나 할머니 없으면! 나 할머니까지 없으면! 나 할머니까지 떠나시면 나는 그땐 정말!”

요원이 말을 하다 말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화가 났다.

할머니에게 화가 난 것이 절대로 아닌데. 할머니에게 화를 낼 일도 절대로 아닌데.

저 남자가 쓸데없이 반가워서.

저 남자를 여태 그리워했던 나 자신에게.

그래. 난 바로 그것에 화가 났다.

모든 것이 다 엉망진창이라서.

“…….”

부들부들 떨고 있는 요원을 침체된 시선으로 바라보던 무경이 그녀에게 한 발 두 발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지 마세요!”

뒤로 주춤 물러난 요원이 그의 시선을 황급히 회피하듯 시선을 아래로 뚝 떨어트렸다.

“다들 순찰을 나가서 말이에요. 여기까지 오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네요. 구급차도 오려면 너무 오래 걸려요. 아버지도 다른 곳에 계셔서 시간이 좀 걸리고요.”

눈물을 꾹 참는 어린아이처럼 요원이 눈에 힘을 주며 간신히 말을 이어나갔다.

“마을에 운전할 어르신이 하나도 안 계세요. 차가 없어요. 그 작가인지 아닌지 모를 미친놈도 집에 없고요. 이제 궁금한 거 없으시죠.”

무경에게선 여전히 들려오는 말이 없었고 요원은 여전히 발끝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지금 남이 병원으로 달려야 하는데요. 제가 지금 빨리 달려야 하니까요. 달려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제발. 내 앞에서 제발…….”

요원이 눈을 질끈 한번 감자,

“사라져주세요.”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말간 뺨을 타고 눈물이 뚝 떨어져 내렸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더 흘렀을까.

“어휴. 착해 빠져선.”

작은 한숨 비슷한 목소리가, 꿈에서도 그리웠던 체향이 훅 하고 요원을 파도처럼 덮치듯 성큼성큼 다가온다.

“칼자루를 손에 쥐여주면 뭐 하나. 휘두를 줄을 모르는데.”

무경이 갑자기 그들에게 등을 보이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르신. 제 등에 업히시죠.”

묵묵부답인 상황에 무경이 고개를 뒤로 슬쩍 돌려 요원과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이런 말 미안한데요, 채 순경. 지금 좀 호들갑인 건 맞거든요.”

그 미소가 소년의 것처럼 청량하고 맑다고 생각했다.

“하무경 씨가, 하무경 씨가 대체 뭘 안다고!”

“안 떠나요, 아무도.”

금세 비딱해진 차가운 음성과 표정, 그러나…….

“내가 그렇게 만들지 않아.”

비딱하지 않은 마음.

요원이 아무런 말 못 하고 입만 벌렸다가 다시 굳게 다물었다.

“그러니, 울지 마요. 왜 자꾸 울어. 채 순경 네가 애야?”

꾸짖으며 고개를 바로 돌린 무경이 작게 읊조렸다.

“울지 마. 나도 같이 울고 싶어지잖아.”

그 말을 듣지 못한 갑순은 버둥거리며 무경의 넓은 등 위에 업혔다.

“어르신. 제가 참 걱정입니다.”

한 손으로 무릎 위를 짚으며 읏샤, 하는 소리를 낸 무경이 굽혔던 몸을 일으켜 세워 말을 덧붙였다.

“어르신 손녀분은 왜 저렇게 착해 빠졌답니까? 나중에 누가 데려갈 거야.”

“니가 데려가라, 이눔아!”

갑순이 무경의 뒤에서 깔깔거리며 웃는다. 무경도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앞을 향해 걸었다.

몇 걸음 앞서 나아가다가 우뚝 멈춰 선 무경이 요원을 돌아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빨리 와요.”

그러고는 다시 요원을 등지고, 갑순을 업은 채로 앞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간다.

점차 작아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던 요원도 걸음을 떼었다.

당신은 내게 바람과도 같은 존재다.

견딜 수 없는 것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공기가 존재하는 곳 어디든 바람은 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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