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76화 (76/116)

76화. 한(恨)

[ ※ 추천곡 : Will Ferrell, My Marianne – Husavik (My Hometown) ]

남자의 향기가 짙게 배어있는 침실을 감상할 새도 없이 요원의 시선은 침대 위 무경에게로 정확히 떨어졌다.

은은한 조명 밑에 검은 파자마를 입고 잠든 남자의 얼굴이 선명한 듯 흐릿했다.

한 발, 두 발, 그를 향해 다가섰다.

그저 그의 옆에 서서 남자를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가 조용히 손을 뻗어 남자의 반듯한 이마 위를 짚어본다.

아직도 뜨끈한 열감이 손바닥에 아릿하게 전달됐다.

요원은 아랫입술을 감쳐 물었다.

왜 당신이 아프고 그래? 아파도 내가 아픈 게 맞지. 배신당한 건 나인데. 속은 건 나인데. 왜 당신이 아프고 그래? 찾긴 왜 또 찾아? 내가 분명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내가 당신 뺨까지 때렸는데…….

무경의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려, 조금 전 그를 때렸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져주었다.

미안해요. 아프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젓는다.

아니지. 아니야. 내가 왜 사과를 해? 사과받아야 하는 사람은 나인데?

남자의 뺨에 가 있던 손을 확 떼어낸 요원이 방향을 잃은 손을 아예 뒷짐 지고 감췄다.

요원은 남자를 제 눈동자에 꼭꼭 새겨넣었다.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었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처럼.

잠든 남자를 바라보며 요원은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무경 씨. 미안해요.

당신 내게 나쁜 새끼 맞는데요. 나도 이제 당신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저 사실, 동녘 그룹 무섭거든요. 그래서 나는 내일부터, 우리 마을을 지키기 위해 뭐든 다 할 거예요. 나는 지켜야 하거든요.

하무경 씨가 모르는 게 있어요.

백야마을 어르신들의 소원은 같아요. 돈이 아니에요. 풍족함도 아닙니다.

수십 년을 함께해온. 어쩌면 자식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동생을, 형님을, 곁에서 보내주고 자신 또한 눈감고 싶은 거예요.

자신의 고향에서. 자신의 집에서.

그래서 하무경 씨에게 화가 났어요.

어르신들에게 중요한 건 정작 돈이 아닌데, 돈이면 다 된단 식으로 생각하는 동녘 그룹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건 없습니다. 돈으로 못 살 것도 없어요. 하지만 때때로, 세상엔 돈보다 더 소중한 것도 존재하는 법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요. 그리고 전 그런 현실이 너무도 슬픕니다.

점차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본만 중시하는 것 같아서요. 그런 세상이 되어버려서요. 그런 슬픈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어서요.

우리의 마지막이 이래서 유감이라고 했던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당신과 함께하던 매 순간이 나는, 입안이 다 얼얼할 정도로 달콤했으니까요.

조금 전까지 나는, 당신을 믿은 나를 자책했고 나를 속인 당신을 원망하고 탓했지만…….

조금 더 단순하게, 평범하게 생각하고 싶어졌어요.

처음부터 우리는 그저,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뿐이라고.

하무경 씨 말이 다 맞아요. 하무경 씨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우리가 백야마을에서 그런 식으로 만나게 될지. 그렇게 얽히게 될지. 하무경 씨 말대로, 어쩌면 더 억울한 건 하무경 씨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문득 듭니다.

난 아직 잃은 게 없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절대 잃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하무경 씨도, 하무경 씨의 방법으로 당신들의 것을 지키세요.

저 또한, 제 나름의 방법과 방식으로 우리의 것을 지킬 테니.

여전히 동녘은 백야를 이해할 수 없고, 백야는 동녘을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우리는 그저 뜻하는 바가 다를 뿐. 그저 그럴 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요.

다시 우리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나는 당신을 예전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고, 우린 이제 같은 감정으로 함께할 수 없겠지만.

짧았지만 당신과 함께한 모든 시간들이 내겐 찬란했고 또 특별했습니다.

오랜 시간 느껴보지 못했던 설렘이란 감정, 온 세상을 핑크빛으로 보는 눈동자, 손끝만 스쳐도 눈앞이 아찔해지던 매 순간.

잊고 지내던 그런 시간을, 감정을, 내가 다시 느낄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마웠습니다.

진짜 오랜만에 내일이 기다려졌거든요. 당신을 만난 이후로.

하무경 씨. 당신 내게 나쁜 새끼임엔 변함없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아프지는 마세요.

여전히 뒷짐을 진 채 서서히 몸을 낮춘 요원이 무경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살포시 포개며 두 눈을 감았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남자와의 입맞춤이었다.

***

다음 날의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인천공항의 출국 게이트를 지나 서정연이 나왔다.

한 손에 캐리어를 쥔 채로 두리번거리던 정연이 분홍색 튤립을 들고 서 있는 세련된 슈트 차림의 남자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캐리어를 끌며 무경의 앞으로 다가선 정연이 그가 내민 분홍색 튤립을 받아들며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아들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우리 막내가 이제 남자가 되어 서있네.”

8년 만의 첫인사는 매우 단조로웠다.

두 사람의 목적지는 백운이었다.

무경이 직접 운전하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남들과 다를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모자(母子)간의 일반적인 대화였다.

두 사람을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 회장이 정연을 반겼다. 아마 그녀를 오래 기다린 듯 보인다.

“건강은 좀 어떠세요?”

“아직은 살 만하제. 희한하게 나는 통증 한나 없어야. 그 원장 놈, 오진한 거 아니여?”

하 회장을 착잡한 시선으로 오래도록 바라보던 정연이 운을 떼었다.

“그러니까. 그 담배 좀 끊으시라니까.”

무미건조한 위로였지만 그 안엔 그간 함께해온 사람에 대한 정이 묻어있었다.

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식탁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 모양이다.

이미 기다란 식탁 위엔 음식이 한 상 가득한데도 백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듯 음식을 날랐다.

모두 다 정연과 무경이 좋아하는 것들이었으나 무경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저놈의 샹들리에를 내가 다 떼버릴까.

그저 의미 없이, 프랑스식 럭셔리 금박 식탁 위 샹들리에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노려봤을 뿐이다.

“우리 무갱이는 밥을 어째 그라고 못 먹냐. 8년 만에 만난 즈그 엄니랑 말도 안 하고잉. 안 반갑냐잉?”

하 회장의 웃음기 섞인 물음에 무경의 시선이 샹들리에에서 떨어졌다.

“옛말 하나 틀린 게 없어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죠. 나랑 떨어진 8년. 할 말이 뭐 있겠어요? 이제 엄마가 필요한 나이도 아니고. 안 그러니, 무경아?”

제 편을 드는 정연을 보며 무경은 웃었다.

“그럴 리가요.”

그러고는 정연의 잔에 정중하게 물을 채우며 입에 발린 소리를 뱉었다.

“많이 보고 싶었는데요. 베갯잇을 눈물로 다 적실 정도로.”

“됐다, 얘.”

어머니가 안 반가울 리 없다. 사이가 딱히 나쁜 것도 아니니.

다만, 무경의 머릿속은 온통 하태경과 하가경이 오기 전에 이 자리를 떠야겠단 생각뿐이었다.

지금 그들을 대적할 여력이 무경에겐 하나 없었으니.

“바쁠 텐데 그만 가봐. 우린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무경의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잠연히 젓가락질하던 정연이 무경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무경 역시 그녀를 쳐다보며 설핏 미소 지었다.

“오후에 외부 업무가 있긴 해서요. 먼저 일어나 죄송합니다.”

중얼거리며 쥐고 있던 화이트 리넨 냅킨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릴 때였다.

“가기 전에, 하 상무.”

평온히 손을 들어 올린 하 회장이 무경에게 잠시 앉아있을 것을 권고했다.

“인자 슬슬 다 걷어와야제?”

주어는 빠졌지만, 무경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하 회장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 아베가 있자네? 통증은 없는디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은 확실해야. 느껴진다 안 하냐.”

“뭘 걷어와요?”

삽시간에 미소가 깨지는 무경을 알아차린 정연이 불쑥 껴들었다.

“아따, 서 여사. 부자지간에 그란 게 있어요잉.”

하 회장의 뉘앙스는 농담조였으나 그것은 일종의 경고와도 마찬가지였다. 궁금해하지 말라는.

“회장님.”

목덜미를 문지르다가 또 넥타이를 가지런히 한 무경이 하 회장에게로 몸의 방향을 틀었다.

“무갱아.”

입맛이 통 없어 홀로 생강차를 호로록 마시던 하 회장은 먼 산을 바라보듯 그렇게 허공을 응시하며 무경의 말을 끊었다.

“니는 시골 사람들이 다 인정 많은 천사들 같제?”

정연의 의문스러운 시선이 하 회장을 바라봤다가 무경을 바라봤다가를 여러 번 반복했다.

“아니여. 이 애비가 어릴 적에 있자네. 병신 자식이라고 멸시당한 것만 생각하믄 아직도 배가 살살 아파부러야? 고 생각만 하믄 속창시서 열불이 난다고.”

하 회장이 주먹으로 제 가슴을 쿵쿵 두드렸고, 처음 접하는 이야기에 무경은 눈썹을 비딱하게 들어 올렸다.

“니 할아부지가 생전에 다릴 절었어야? 니는 모르제. 니 나기전에 돌아가셨응께.”

생강차를 호로록 한 모금 더 삼킨 하 회장이 무경의 어두운 눈동자를 응시한 채 어딘가 편치 않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평소엔 내가 정신없이 바쁜께 생각도 못 했던 것들이 죽을 때가 된께 갑자기 막 억울해야?”

“그분들이 아직, 백야에 살아 계십니까?”

“다 뒈졌다 안 하냐.”

섬짓한 하 회장의 미소가 겨울바람처럼 싸늘하다 느끼던 순간.

“언능 가져와라, 무갱아.”

하 회장이 무경의 손등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이 애비 생전에 한 잔 풀자잉.”

나는, 그랬다.

동녘의 수장 자리도 물론 탐이 났지만, 아버지의 생이 다하는 그 날까진, 그의 곁에 가장 뛰어난 자식으로 남고 싶었던 마음이 가장 컸다.

자식 된 도리로서, 안 그래도 썩어가는 아버지 가슴 더 빨리 썩으라고, 죽어가는 저 가슴을 내 손으로 직접 후벼팔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난 여태 불효막심한 자식이 아니었을뿐더러, 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 뜻밖의 말을 들은 지금 이 순간, 무언가가 내 머리를 정확하게 관통했다.

“…….”

하 회장을 바라보는 무경의 눈빛은 찰나에 요동쳤고, 그런 제 아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망하는 정연이었다.

어쩐지, 생각이 많아질 것 같은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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