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나는 정말로 쉬워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불 꺼진 서울 내의 모텔방 안에서 핸드폰이 시끄럽게 진동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수많은 사람이 거쳐 간 침대 위에서 간신히 잠들어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요원이었다.
모텔 방 테이블 위엔, 빈 소주병과 마른안주가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그렇게 엉망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잡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 얼굴이 불시에 찡그려지고, 요원은 매트리스 위에서 손을 더듬거려 핸드폰을 찾았다.
기계 덩어리를 제 얼굴 앞까지 바짝 끌고 온 요원이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액정에서 번쩍거리는 번호를 확인했다.
저장되지 않은 열한 자리의 번호를 의문스럽게 바라보던 그녀가 동시에 시간을 확인했다.
2시가 조금 넘은 깊은 새벽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손에서 울리는 진동 못지않게 머리가 찡하니 울렸다. 지독한 숙취였다.
“읏…….”
요원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포기를 모르고 계속해서 울려대는 전화에 갑자기 짜증이 북받쳐 올라서 핸드폰 전원을 아예 끄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열한 자리 모르는 번호를 무시하지 못하겠는 요원의 손가락은 결국 전원 버튼이 아닌 통화 버튼으로 향했다.
하아, 옅은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귓가로 가져가서 보통 때보다도 짜증이 짙게 밴 음성을 꺼냈다.
“대체 누구시죠? 누구신데 이 시간에,”
[채요원 순경님! 맞으십니까?]
상대의 목소리가 너무도 크게 울려서 머리가 또다시 찌잉 흔들렸다.
“……네. 제가 채요원인데요.”
요원이 깨질 것 같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늦은 시간에 정말 죄송합니다. 우선, 제 소개부터 드리겠습니다. 저는 동녘 그룹의 하무경 상무님을 모시고 있는 차태호 실장이라고 합니다. 로비에서 잠시 스치듯 뵈었었는데 기억을 하실지…….]
관자놀이를 느리게 문지르던 요원의 손짓이, 누군가 다급하게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그대로 멈췄다.
“……네. 기억납니다.”
요원의 낯빛이 침전하듯 가라앉으며 건조한 음성을 뱉었다.
“그런데 전화는 이만 끊어야 할 것 같네요. 제가 동녘 그룹과는 별로 상대하고 싶지가 않아서요.”
[다…… 아셨습니까?]
“어떤걸요. 하무경 씨가 백야마을에 온 이유요? 네. 다 알았습니다.”
[그렇군요. 다 아셨군요. 하필이면 순경님께서 아셨으니 이것 참, 여러모로 저희가 난처한 상황이 되었네요.]
“난처한 상황이요? 누가요. 동녘이요?”
사과를 모르고 뻔뻔한 건 상사나 부하 직원이나 똑같다고 생각하면서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만 끊겠습니다.”
그녀가 냉철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귓가에서 막 떼어내던 순간이었다.
[상무님께서 많이 아프십니다, 채 순경님.]
전화를 끊으려는 요원을 눈치챈 태호가 침착함을 조금 잃었다.
[정말 많이 아프십니다.]
누군가 주먹으로 제 가슴을 있는 힘껏 내리친 것처럼, 그렇게 요원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채 순경님만 계속해서 찾으세요. 제발 좀 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나 아파.’
‘아파. 이번엔 거짓말 아니고 진짜야.’
술에 젖은 남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뜨겁게 어지럽혔다가 차갑게 정리시켰다가를 반복했다.
[상무님께서 이렇게까지 아파하시는 모습을 제가 난생처음 보아 그렇습니다.]
뻣뻣하게 경직된 팔을 움직여 핸드폰을 다시금 귓가로 가져간 요원이 침을 한 번 삼켰다.
[순경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구멍에서 고통스러운 압박감이 느껴졌다.
[한 번만 와주십시오.]
“저와는…….”
요원은 겨우겨우 입술을 떼어 말했다.
“이제 상관없는 일 같네요. 죄송합니다.”
사과하며 그대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옆으로 돌아눕고 조용히 두 눈을 감아 시야를 차단했다.
저 멀리서 벌써, 그리운 백야의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리고 불현듯, 그 밤의 기억 또한 장애물처럼 떠오른다.
‘너…… 나 싫어하지 마. 미워하지 마.’
풀벌레 소리가 대신해 울어주었던, 남자와의 끈적했던 밤이.
하무경 씨. 나 오늘은 당신에게 못 가요.
그러니 부디, 많이 아프지 말기를. 당신에겐 아프지 않은 새벽이기를.
이 와중에도 남자를 걱정하는 나는, 참으로 쉽구나.
허탈한 웃음을 잇새로 흘려보낸 요원이 잠자리에 들기 위해 눈을 더욱더 꽉 감았다.
그러나.
위이이이잉- 모텔 방 안을 울리는 냉장고 소리 때문에 잠을 쉬이 이루지 못하겠고.
반쯤 열어놓은 작은 창문 너머로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심하게 거슬려서 잠을 쉬이 이루지 못하겠으며.
잊고 싶은 음성 하나가 자꾸만 저의 새하얀 머릿속에 물감처럼 번져 들어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고생했네. 고생 많았어요. 고생했어.’
상냥한 음성과 제 머리를 쓰다듬던 따뜻한 손길, 남자의 그 체온까지도.
또다시 그 순간이 찾아왔다. 요원의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순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듯 그대로 벌떡, 일어난 요원이 벗어두었던 순경복을 다시 급하게 챙겨입으면서 태호에게 전화를 걸어 단 한마디만을 내뱉었다.
“채 순경입니다. 주소 보내주세요.”
통화를 종료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욱여넣은 요원은, 손목에 걸어둔 머리끈으로 제 머리칼을 질끈 하나로 빠르게 묶으며 모텔 방을 뛰어나갔다.
나는 정말로, 쉬워.
***
요원을 태운 무경의 세단이 그가 거주하는 레지던스로 들어섰다.
태호가 주소를 보내주는 대신, 그녀가 있는 위치를 받아 방 기사가 온 것이었다.
방 기사는 조수석에 앉은 요원을 힐끗힐끗 곁눈질했다.
뒷좌석엔 굳이 타지 않겠다며 옆자리를 고집한 그녀였다.
무경과 관련된 여자를 직접 보는 것은 또 처음인지라 방 기사는 마냥 신기했다.
방 기사는 오랜 시간 무경을 곁에서 보좌했다.
무경은 제게 상사 그 이상이었다.
남자는 살가운 스타일은 결코 아니었으나 받은 만큼 돌려주는 남자였고, 이상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을 지닌 남자였다.
곁에서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그를 위해서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무경 상무의 사람이라면 모두 이 말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태호에게 대충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다.
지금 이 여자는 하무경을 볼 기분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또 그를 찾아간다는 건, 어쩌면 같은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남자는 그런 존재였다.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희한한 능력을 갖춘 존재.
호텔과도 같은 레지던스 정문 앞에 대형 세단이 멈추어 서자, 그 차를 알아본 정갈한 슈트 차림의 레지던스 직원이 달려 나와 뒷좌석 문을 덜컥 열었다.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 짐짓 당황한 직원이 이제 조수석 문을 열었다.
이런 대우에 익숙지 않은 요원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리니 그녀를 따라 운전석에서 내린 방 기사가 직원을 향해 부탁했다.
“하무경 상무님 손님분이시니 엘리베이터까지 잘 좀 모셔주십시오.”
“예.”
“그리고, 채요원 순경님.”
“네?”
요원이 방 기사를 돌아보니, 잠시 머뭇거리던 방 기사가 어렴풋이 미소 지으며 감사합니다, 하는 뭣 모를 인사와 함께 요원을 향해 허리 굽혔다.
요원도 얼른 그의 앞에서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였다.
“5707호입니다. 올라가십시오.”
최첨단 엘리베이터에 잠시 올라 무경이 거주하는 층수 버튼을 누르고 내린 레지던스 직원이 요원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시야를 뒤덮고 있던 색안경이 한 꺼풀 벗겨지고 나니 이제야 남자가 제대로 보인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는지, 또 보는지도.
그의 위치가 새삼 피부로 와닿는다.
그와 함께 서울에서 술을 마시던 그때에도 지금 와 생각해보니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웨이터가 지나치게 그를 어려워한다고만 느꼈었지, 그가 이런 위치의 사람이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나는 왜 그간 몰랐나. 정말 굉장한 사람이었는데, 하무경 씨는.
요원이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트리며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요원은 내내, 백수 하무경이 그리웠던 것 같다.
57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고급 호텔보다 더 모던하고 세련된 내부 복도를 요원은 거닐었다.
요원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문 앞에 마중을 나와 있던 태호가 그녀를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순경님. 먼 길 와주셔서.”
하무경 사람들은 내게 뭐가 이리도 고마운지.
요원 또한 태호에게 묵례하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가 거주하는 진짜 집에 들어서니 거실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통창 너머로는 유명한 호수가 보였고 끝내주는 전망이 시야를 대번에 사로잡았다.
화려하면서도 정갈한 인테리어는, 그와 어우러지지 않는 백야마을 집과는 다르게 남자를 꼭 닮아 있었다.
태호가 가는 방향으로 따라가자 목적지는 남자의 침실이었다.
“조금 전에 잠드셨습니다.”
침실에 닿기 전까지 태호는, 곁의 요원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위경련이 와도 이렇게 심하게 고통을 호소한 적은 없으셨습니다. 해열제를 놓아도 잠깐이지 금세 또 열이 올라 주치의도 이유를 잘 모르더군요. 스트레스인 것 같다고만. 그래서 염증 수치가 높아진 게 아닐까, 예상만 하는 거죠, 저희는. 정확한 검사는 병원을 가봐야 알 것 같습니다.”
“네.”
“너무 힘들어하셔서 센 약을 하나 드렸습니다. 웬만해선 깨지 않으실 거예요. 채 순경님께서 오셨다곤 내일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상무님께서 채 순경님을 뵙고 주무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그때부터 요원은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았다.
“좋은 분이시네요, 순경님은. 힘든 걸음 하셨다는 거, 저 잘 압니다.”
그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들어가 계시겠어요? 저는 차를 좀 내오겠습니다.”
태호가 굳게 닫힌 침실 문을 열기 무섭게.
“차태호 실장님이라고 하셨죠?”
요원은 그 문을 다시 닫으며, 단단한 음성을 뱉었다.
“저는 오늘 여기 안 온 겁니다.”
“예?”
“다 아셨다면서요.”
태호가 난처한 얼굴로 안경테를 슬쩍 추켜 올렸다.
“뒤통수 세게 한 방 후려 맞았거든요. 당신의 저 상무님이란 사람한테. 그래놓고 여태 사과 한마디를 못 들었어요.”
태호가 변명이라도 대기 위해 가슴을 들썩였으나 요원은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말문을 막았다.
“이해합니다. 대단하신 분이잖아요. 동녘의 자제님이신데 얼마나 대단해요? 저 같은 일개 시골 순경 따위에게 사과하실 분 아니라는 거. 저 누구보다 잘 압니다.”
“순경님.”
“그러니까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저 오늘 여기 온 거.”
교연한 태도와는 달리 여자의 축 처진 둥그런 어깨선이 태호의 눈에 가장 먼저 보였다.
“인간적으로 너무 쉽잖아요. 아프다고 해서 쪼르르 달려온 제 꼴이.”
“…….”
“그리고 저 좋은 사람 아니에요. 적어도 앞으로는요.”
매정한 음성과는 달리 풀 죽은 안색도 함께 보인다.
“순경님. 저희 상무님도 상황이,”
태호가 정신을 차렸을 땐, 요원은 이미 침실 문을 열고 안쪽으로 사라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