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74화 (74/116)
  • 74화. 완전 뻑이 가서

    대한 시그니처 호텔 VVIP 라운지 바에 들어서던 주연이 눈에 띄는 한 사람을 발견하곤 그 자리에 의아한 얼굴로 멈춰 섰다.

    본인이야 이 라운지 바 단골이라 해도, 저 남자는 대한 클럽 모임이 아닌 이상은 한 번도 발 들이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머? 이게 누구야? 자기야? 우리 자기 맞아?”

    또각또각, 힐 소리를 내며 걸어간 주연이 빨간 립스틱을 바른 예쁜 입술로 시원하게 웃으면서 남자의 앞에 앉았다.

    코냑 잔을 손에 비스듬히 쥔 채로 이마를 괴고 있던 남자가 그 손을 서서히 치워내며 제 앞에 앉은 주연을 가만 바라본다.

    “…….”

    시야가 흐릿한지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히며 한참 동안 주연의 얼굴을 뜯어보던 남자가, 뒤늦게 주연임을 자각하곤 눈을 부드럽게 휘어 생글 웃었다.

    “라 상무. 잘 지냈어?”

    그 매력적인 미소에 잠시 얼빠져있던 주연이 소파에 몸을 묻어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우리 자기, 오늘 좀 이상하네?”

    상체를 조금 굽혀 턱을 괸 주연이 무경을 수상쩍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평소와는 달리 헝클어진 것 같은 남자의 차림새가, 오늘따라 시각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우리 자기 취했니?”

    남자가 멀쩡히 앉아있다가 중간중간 옆으로 휘청거렸기에 알아차렸다.

    “음…… 조금?”

    고개를 뒤로 젖힌 무경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며 끝 음을 살짝 올렸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면 대답해줄 거야?”

    “싫은데?”

    라이터를 탕, 올린 무경이 눈매를 찡그리면서 입에 물린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우…….”

    천장을 올려다보며 기다란 연기를 내뱉는 남자의 반듯한 얼굴이 전엔 본 적 없던 낯선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용하게 담배만 태우는 남자의 어지러운 표정을 한참을 바라보던 주연이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자기. 나랑 방 잡고 놀까?”

    단순히 떠본 질문이었다. 얼마나 취했는지 보기 위해 떠본 질문.

    생각해보니 주연은 여태껏 무경이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지금 남자가 어떤 상태인지 도무지 가늠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하…….”

    한숨을 내쉬었던 무경이 갑자기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래.”

    벗어두었던 슈트 재킷을 주섬주섬 잡아챈 그가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놀자.”

    입에 담배를 비딱하게 문 채로 주연에게 손을 내미는 무경을 귀신 보듯 쳐다보던 주연이 제 입을 턱 틀어막고 기함했다.

    “어머! 어머! 웬일이야! 미쳤나 봐! 자기야!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빼액 소리 지르는 주연이 재미있다는 듯 킥, 웃음을 흘린 무경이 다시 소파 위에 쓰러지듯 몸을 풀썩 앉히며 중얼거렸다.

    “농담이야. 농담…….”

    소파에 머리를 툭, 기댄 무경은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며 담배를 빨고 연기를 뱉고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내가 술에 취하면. 이 독한 담배를 계속 태워대면. 너에 대한 기억이 조금은 흐릿해지지 않을까 하여.

    그런데, 이건 웬걸 씨발.

    흐릿해지기는커녕, 존나 더 또렷해져서 문제네.

    “자기야. 왜 그러는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면 편히 말해.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쉿. 잠시 또 휘청대며 제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는 듯 기다란 검지를 제 입술 위에 조용히 갖다 붙인 무경이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네가 날 어떻게 도와. 나도 날 도울 수가 없는데.”

    독백처럼 중얼거리며 몇 번의 터치로 누군가의 번호를 누르고 핸드폰을 귓가에 밀착시킨 무경이 후, 하는 차가운 한숨과 함께 머리를 대충 쓸어올리며 또 자조적으로 킥 웃었다.

    뚜우. 뚜우. 뚜우.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 또 전화를 건다.

    뚜우. 뚜우. 뚜우.

    이번에도 받지를 않아서 또 걸어본다.

    그렇게 한 일곱 번쯤 반복했을까?

    달칵. 소리와 함께 상대가 전화를 받았음이 느껴졌다.

    그러나, 말소리는 들려오지 않아 기계를 슬며시 귓가에서 떨어트려 액정을 확인했다.

    통화 시간을 알리는 숫자가 위로 계속 치고 올라가고 있었음에, 상대가 듣고 있음을 확인한 무경은 다시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가며 무턱대고 따지듯 말했다.

    “내가 알았어?”

    담배 연기처럼 탁하고 습기에 젖은 것처럼 축 늘어진 저음이었다.

    “내가 채 순경이 거기 살 줄 알았냐고. 난 억울해. 난 너보다 더 억울해. 알아?”

    상대에게서 들려오는 말은 여전히 없었다.

    “넌 아직 잃은 거 하나 없잖아. 잘 생각해봐요, 채 순경. 네가 대체 뭘 잃었는데?”

    말이 또 까칠하게 나가 아차, 싶었지만 억울한 건 사실이니까.

    나는. 나는 있잖아, 채 순경. 존나 다 잃게 생겼거든.

    “아무튼…….”

    그가 중심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몸을 움직여 담배꽁초를 성의 없이 재떨이 위에 대충 비벼 껐다.

    “요는 말이에요…….”

    코냑 잔을 다시 손에 그러쥔 무경이 쓰디쓴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칭얼거렸다.

    “나 아파.”

    […….]

    “나 그때처럼 위가 또 아파. 아무래도 위경련인 것 같은데요.”

    […….]

    “그때처럼 와서 나 간호해줘.”

    […….]

    “돌봐줘.”

    […….]

    “아파. 이번엔 거짓말 아니고 진짜야.”

    아까부터 턱을 괸 채 무경의 생경한 모습을 바라보는 주연은, 아주 신기한 광경을 보는 사람처럼 그렇게 있었다.

    “왜 대답이 없어. 너 이제 진짜 나 안 볼 거야?”

    상대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고 무경은 피로한 눈가를 쓸면서 조금 헤프게 웃었다.

    “존나 벽이랑 얘기해도 이것보단 덜 비참하겠어요.”

    […….]

    “내가 일전에 너한테 순경 말고 광고 모델을 하지 그랬냐는 말. 그거 취소할게. 다시 보니 채 순경은 순경이 잘 어울려요. 아까 보니 이야, 멋지던데? 비꼬는 거 아니고. 진심이야.”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며 제 목소리를 듣고만 있던 상대가 전화를 끊는 것이 느껴졌다.

    무경은 한숨과 함께 테이블 위에 이마를 기댔다.

    “채 순경…….”

    통화 종료 시각만이 애처롭게 번쩍이고 있는 핸드폰을 손에 꽉 붙잡은 채로 나직이 읊조린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무거운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앉으면서 무경의 시야가 완전히 점멸했다.

    육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굉장한 하루를 보낸 무경이었기에 보통 때와는 달리 술이란 존재 앞에서 쉽게 무릎을 꿇었다.

    챙그랑! 코냑 잔을 쥐고 있는 손에 순간적으로 힘이 빠지면서 잔이 바닥 위에서 깨지고 엉망으로 흩어졌다.

    꼭, 오늘의 두 사람처럼.

    “흐음.”

    턱을 괴고 있던 주연이 자세를 원상태로 돌리면서 태호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네에, 차태호 실장님? 이게 얼마 만이에요? 나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했죠? 내가 너무 미안해서 어떡해요? 실례가 너무 많잖아요? 그런데 이를 어째요?”

    테이블 위에 쓰러진 무경에게로 손을 뻗은 주연이 필름이 끊겨서도 핸드폰을 꽉 쥐고 놓지 않는 그의 손에서부터 핸드폰을 간신히 빼앗아왔다.

    그러고는, 통화목록에서 조금 전 그와 통화한 상대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확인하면서 태호를 향해 말했다.

    “우리 하무경 상무가 회까닥 아주 맛이 갔네요?”

    제 품에 축 늘어진 무경을 뒷좌석에 조심스레 태우고 문을 닫은 태호가 이마를 문질렀다.

    담배는 많이 태워도 공적인 업무를 제외한 사적으론 술은 입에도 잘 대지 않는 분이다.

    그런 분이, 아침 일찍 공항도 가셔야 하는 분이, 무슨 술을 저렇게까지…….

    강한 탠이 되어있는 창문을 내려다보며 심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던 태호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저와 함께 나와준 주연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라주연 상무님. 제게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별한 분위기를 풍기긴 했지.”

    “예?”

    주연은 제 아래턱을 문지르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혼자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 순경 말이에요. 하무경이 그간 봐오던 여자들과는 많이 다르잖아요. 그쵸?”

    “순경…… 이요?”

    “어머.”

    주연이 일부러 과장되게 제 입을 텁 틀어막는 시늉을 했다.

    “우리 차태호 실장님은 하무경 오른팔이란 분이 어떻게 나보다 더 모르셔? 하무경 상무 말이에요.”

    독특한 디자인의 네일을 받은 검지가 일직선으로 갑자기 쭉 뻗어졌다.

    “그 순경 때문에 저러는 거잖아요?”

    무경이 타 있는 세단 뒷좌석을 정확하게 가리킨 그녀가 확신에 찬 어투로 말한다.

    “그 순경에게 완전 뻑이 가서.”

    태호의 눈썹 앞머리가 불시에 찌푸려졌다가.

    “아…….”

    벌어진 잇새에서 작은 탄성이 흘렀다.

    이제야, 로비에서 보았던 그의 낯선 모든 것들이 대번에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일 났구나.

    생각하며 태호는 이마를 턱 짚었다.

    ***

    무경을 태운 세단은 무경이 거주하는 레지던스로 향하는 길이었다.

    늦은 시간이었기에 서울의 도로는 막힌 것 하나 없이 시원하게 뻥 뚫려있었다.

    태호와 방 기사는 아까부터 룸미러를 통하여 무경을 살폈다.

    아무리 진탕 취해도 매사 단정한 차림과 자태를 유지하는 남자가 아니던가.

    그런데 오늘의 모습은 어딘가가 좀 많이 낯설다.

    넥타이는 어디에다가 버렸는지 목가는 허전하고, 셔츠 윗단추는 아무렇게나 풀려있고, 입고 있는 슈트 베스트 단추도 죄다 풀려 벌어져 있고, 늘 깔끔하게 바지 안에 넣던 셔츠 밑단도 제멋대로 빠져나와 자기주장을 하고.

    무엇보다도, 저 표정.

    표정이 많이 낯설었다.

    헤드 레스트에 머리를 기댄 남자의 눈썹이 자꾸만 찌푸려졌고 구겨진 미간은 풀릴 줄을 몰랐으니.

    가장 괴로운 죽음이 화형이라 하던가?

    그렇다면 지금 그의 모든 것은 불에 타들어 가고 있는 것처럼, 남자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듯 보였다.

    “아…….”

    갑자기 앓는 소리가 들려와서 황급히 고개를 뒤로 돌린 태호가 무경을 살폈다.

    제 한쪽 팔을 배에 두르는 무경의 작은 행동을 알아차린 태호가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평소 남자를 괴롭히는 극심한 위경련의 전조증상임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속히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낸 태호가 그의 주치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조 선생님. 밤늦게 죄송합니다. 저희 상무님 댁으로 급하게 좀 와주셔야겠습니다.”

    [또인가요?]

    “예. 이번에도 어째 심할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한 시간 안쪽으로 도착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간결한 통화를 끝마친 태호가 다시 고개를 뒤로 돌려 무경을 지켜봤다.

    “차…….”

    무경이 뭐라 뭐라 중얼거려서 태호가 예? 하며 고개를 좀 더 뒷좌석으로 내밀었다.

    “상무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세워.”

    “차요? 차를 세우란 말씀입니까?”

    무경은 여전히 찡그린 눈을 감은 상태로 제 가슴께의 셔츠를 뜯어버릴 듯 손에 꽉 틀어쥐고 있었다.

    “상무님? 속이 안 좋으십니까? 답답하세요? 차 세울까요?”

    무경이 느리고 미약하지만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방 기사님.”

    태호가 방 기사를 바라보자 방 기사가 부드럽게 핸들을 틀어 갓길에 차를 세웠다.

    세단이 멈춰 서기 무섭게 뒷좌석 문이 덜컥 급하게 열리며 무경이 내렸다.

    “사, 상무님!”

    놀란 태호와 방 기사가 동시에 문을 열고 그를 따라 함께 뛰어내렸다. 세단에서 내리자마자 배를 움켜잡은 무경이 크게 한번 휘청거렸기 때문이다.

    “상무님!”

    행여라도 자신이 모시는 귀한 몸에 흠집이라도 생길까, 놀라운 운동 신경을 발휘하여 무경을 부축한 태호의 눈동자가 놀라 크게 벌어졌다.

    그의 온몸이 뜨겁게 펄펄 끓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실제로도, 자신이 만든 불 속에 갇혀 활활 타들어 가는 중이었으니.

    왜?

    여자에게 완전 뻑이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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