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이상 기후
쉽게 가자는 말을 한 무경은 소파에 다시 몸을 깊숙이 묻어 앉으며 한쪽 다리를 꼬았다.
“채요원 씨가 본 그 합의서는 이면 합의서입니다.”
“…….”
“백야마을 빼앗으러 간 거 맞습니다. 근데 빼앗고 싶지가 않아졌어요. 채요원 씨에게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것도 맞습니다. 키스나 섹스는 모두 다 진심이었고.”
깍지 낀 손을 허벅지 위에 가지런하게 올려둔 남자가 차갑게 묻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너 나 믿어줄 건가?”
남자의 검은 눈빛이 격동으로 흔들리고 있어서.
“첫 시작만 빼고 난 너에게 모두 다 진심이었는데. 너 나 믿어줄 거야?”
요원의 어지럽고도 뜨거운 머릿속 또한 혼돈에 요동쳤다.
그러다가 금세 눈앞이 분노와 적의로 시큰거린다.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 해도 배신당한 제 마음은 그리 빠른 치유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뻔뻔해도 이건 너무 뻔뻔하잖아.
“웃기지 마.”
아까부터 어찌나 주먹을 세게 틀어쥐고 있었던지, 손바닥에 얼얼한 통증이 계속 일었다.
“개소리야, 전부. 너 같은 새끼한테 두 번은 안 속아.”
무경은 요원의 이러한 반응을 이미 예상했단 듯이 고개를 한 번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조금 전 테이블 위에 내려뒀던 종이와 만년필을 요원의 앞으로 슥 밀치며 단 한마디만을 짙은 숨과 함께 토해냈다.
“쓰세요.”
애써 무너지지 않기 위해 꿋꿋하게 버티던 요원의 곧았던 눈동자가 또 한 번 충격에 휘청거리기 직전이었다.
지금 무경이 무슨 말을 뱉든, 요원은 방어할 수 없을 것이다.
“써.”
가을의 단풍잎처럼 짙은 여자의 눈동자를 오싹한 검은 눈동자로 꽉 조이며 무경은 비딱한 입술을 움직였다.
“내 옆에 계속 있겠다고 써.”
너는 알까. 나를 바라보는 네 혐오에 가득 찬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순간마다.
갑자기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는 것을.
지금 너에게 이따위 진실들은 중요하지 않겠구나.
이면 합의서고, 뭐고. 진실이고, 뭐고.
하긴. 진실이 대체 뭔데. 백야마을 쓸어버리고 동녘 먹으러 갔던 게 진실이지.
네가 잘 알고 있듯이. 그리고, 내가 너에게 조금 전 말했듯이.
이제 와 내가 백야마을을 지키려 한들, 그게 너에게 뭐 그리 대단한 의미가 있겠나 싶다.
“같이 밥 먹고 얘기하고 섹스도 하고.”
불안했다. 이게 정말 우리의 마지막일까 봐서. 네가 날 이대로 떠날까 봐. 너는 날 용서할 마음이 절대로 없어 보이니까.
“계속 나와 전처럼 그런 사이로 남겠다고 써.”
나 누군가에게 갖는 이런 마음, 정말 처음이었는데.
“그리고 사인해요.”
새하얗던 내 머릿속에 까만 안개가 들어찼고 내 마음 역시 까맣게 오염됐다.
“그럼 그깟 마을, 어머니와의 추억이 가득한 채 순경의 터전 그거.”
그래, 맞아.
“내가 지켜줄게.”
난 나쁜 새끼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뭘 망설입니까? 사인해. 내가 총수 자리 포기하고 네 그따위 촌마을이나 지켜주겠다잖아.”
아니지.
“이젠 네가 날 이용해. 내가 가진 힘을 이용해.”
나는 처음부터 너에게 나쁜 새끼였고.
“내가 누군지 다 알았잖아요, 채 순경.”
내가 너를 내 곁에 확실하게 붙잡아두는 방법 역시, 내가 나쁜 새끼로 남는 쪽이 훨씬 더 편리했으므로.
“그럼 사인해야지.”
미안해.
“내가 다 퍼주겠다는데.”
난 이런 방법밖에 몰라.
“당신 같은 일개 순경이 이길 수 있는 우리 동녘이 아니에요.”
맑기만 했던 두 사람의 위로는 회색빛 먹구름이, 따뜻하기만 했던 두 사람의 온도는 불시에 영하를.
“잘 아시면서 그래.”
두 사람이 온몸으로 맞는 첫 이상 기후였다.
***
무경이 내밀었던 얇은 종이를 잡아채 그대로 구겨버린 요원이 그것을 무경의 잘나 빠진 얼굴을 향해 집어 던졌다.
툭.
제 얼굴을 맞고 발밑으로 떨어진 종이를, 무경의 비스듬하게 떨어진 시선이 바라본다.
“좀 색다른 걸 가져와.”
소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운 요원이 꽉 말아쥐고 있는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돈으로 사람 매수하고 약점 틀어쥐고 조건 걸어 사람 곁에 두려 하고 이런 거, 너무 클리셰잖아.”
무경은 여전히 구겨진 종이 위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하무경 상무님은 가지신 거에 비해 사람이 참 후지네요. 내가 알던 그 하무경 씨가 백수라도 백 배는 더 나았어요. 그래서 오늘은요.”
요원이 한숨을 한 번 삼키며 겨우겨우 말을 뱉었다.
“제 마음이 많이 아프네요.”
여자는 더는 울지 않았고 남자의 위는 뒤틀리다 못해 아예 갈기갈기 찢어지는 감각을 받았다.
“내가 알던 하무경 씨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에.”
그런데 희한하게 또 육체적인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르신들껜 말씀 안 드려요. 백야마을 어르신 그 누구도 모르게 할 겁니다. 취직했다고 그렇게 말해둘게요. 그러니 다신 우리 마을에 발 들이지 마세요. 하무경 씨에게 상처받는 사람은 저 하나면 족한 것 같습니다. 어르신들이 그동안 하무경 씨에게 어떻게 했는데요. 그분들은 하무경 씨에게 누구보다 진심이셨습니다.”
그 고통보다 더한 통증이 심장 언저리에서부터 느껴졌으므로.
“그깟 돈 몇 푼 쥐여주면 백야 어르신들이 옳다구나, 그 돈 받고 나갈 것 같았어요? 아니요? 하무경 씨는 백야마을 어르신들을 정말 하나도 모르네요. 한 번만, 딱 한 번이라도 그분들과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눠보셨으면 잘 아셨을 텐데요.”
“…….”
“그리고 뭐? 이깟 종이 위에 사인하면 백야마을을 지켜준다고?”
요원이 날카롭게 웃으며 아랫입술을 잠시 꽉 씹었다.
“이봐요, 하무경 씨. 아니. 하무경 상무님.”
한쪽 무릎에 손을 얹고 허리를 낮춘 요원이 무경과 대강 눈높이를 맞췄다.
“당신 밑에서 순진하게 굴어주니 사람 물로 보셨나 봐.”
아까부터 줄곧 떨어져 있던 무경의 시선이 서서히 올라와 요원과 눈을 맞춘다.
“나 순경이야. 일개 순경 아니고요. 백야마을 지키는 순경. 대한민국 순경!”
요원의 언성이 불시에 높아졌고 무경은 시선이 얼추 맞는 그녀를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
“누구의 도움 따위 필요 없습니다. 당신의 도움이라면 더더욱 사양해요. 당신의 동녘 그룹으로부터 우리의 백야마을, 내가 지킬 테니까.”
요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손만 뒤로 가져간 무경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그 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매트 재질을 자랑하는 직각 모서리 명함을 요원의 앞에 내민 그가 건조한 투로 말했다.
“동녘 그룹의 하무경 상무입니다. 채 순경이 잘 알고 있듯이.”
갑작스레 내밀어진 그 명함 위로 요원의 시선이 자연스레 떨어졌다.
「동녘그룹 ┃사업 총괄 본부장 ┃하무경 상무」
명함에 새겨진 하무경이란 이름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그 낯선 이름을 요원은 눈으로 한참을 읽었다.
“…….”
글자를 읽을 때마다 깜빡거리는 눈동자가, 눈 밑에 음영을 만들어내는 기다란 속눈썹이, 애처롭게 요동친다.
하무경을 자극하는 반응이었다.
“그거 알아요, 채 순경?”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느릿하게 세운 무경이 테이블 쪽으로 상체를 조금 더 기울여 요원과의 거리를 좁혔다.
“남자는 말이에요.”
요원이 시선을 올려 제게로 조금 더 가까워진 무경을 경계하듯 쳐다봤다.
“이 시각과 후각이 전부예요.”
명함을 끼우고 있는 손가락으로 제 눈과 날렵한 코끝을 대충 한 번씩 가리킨 무경이 미소 지었다.
“이 두 가지가 내 오감을 만족시키면 그땐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거거든. 남자는 그래요. 복잡한 여자와는 달라요. 그 단순한 게 바로 남자가 하는 사랑입니다.”
예상치 못한 단어를 듣게 된 요원의 눈썹이 맥이 풀린 듯 그렇게 탁 위로 올라섰다.
“채 순경이 내 오감을 만족시켜요. 그래서 내가 이따위로 달려드는 거고. 아 참. 그리고 말이에요.”
요원이 어찌할 새도 없이 빠르게 뻗어진 무경의 손이 그녀의 목 뒤를 덥석 감싸 안았다.
흡, 요원은 저도 모르게 크게 한번 숨을 들이마셨다.
한 손에 다 쥐어지고도 남을 정도로 남자의 손은 컸으며 여자의 목선은 얇았다.
내가 이 목선에 아주 환장을 하지.
“그룹까지 상대할 필요 없습니다.”
제게로 여자의 시선을 똑바로 고정시킨 무경이 근사하게 웃으며 상대를 조롱하듯 말했다.
“나로부터 잘 한번 지켜봐요, 그깟 백야마을.”
여자의 날 선 눈동자를 피하지 않으면서 무경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내게 손 내밀고.”
쫘악! 마찰음과 함께 무경의 뺨이 사선으로 틀어진 건 순간이었다.
“…….”
틀어진 얼굴을 돌리지 않은 채로 무경은, 입안의 혀를 굴려 볼 안을 깊숙이 찔러 상처를 확인했다.
언젠가 한 대 맞을 줄 예상하던 반응이었다.
“우리가 첫 식사를 같이했던 날. 제게 유감이라 하셨죠.”
목구멍에 통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다시금 눈썹 앞머리를 찡그린 요원이 눈을 부릅뜨며 말을 마저 이었다.
“저 또한 유감입니다.”
눈물을 참기 위함이었다.
“우리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하게 되어서.”
마지막.
그 뜻이 갑자기 무경은 생각나지 않아서 머릿속으로 한참을 곱씹다가.
집무실 문이 콰당! 닫히는 소리에 머리보다 먼저 반응한 몸이 그녀를 따라잡기 위해 닫힌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큰 보폭으로 나아갔다.
단 몇 걸음 만에, 인테리어가 훌륭한 회사 내부 복도를 걸어가던 요원의 팔목이 남자에게 순식간에 붙잡혀 그대로 되돌려졌다.
“놓으세요.”
환멸감.
“놓으시라고요.”
저와는 달리, 그 감정 외로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여자의 눈동자를 마주한 그 순간.
“놔.”
그래.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놔!”
무경의 까맣던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며 요원의 팔뚝을 붙들고 있는 손에도 스르륵, 절로 힘이 빠졌다.
금방이라도 휘청거릴 것 같은 남자를 몇 초간 더 경멸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던 요원은, 그대로 무경에게서 등을 보이며 저 멀리 사라졌다.
저에게서 완전히 멀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