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너는 내 세상이었다
바깥은 분명 따뜻한 날씨였으나,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집무실에 앉아있는 두 사람 사이엔 시베리아 벌판을 떠올릴 듯한 냉기만이 감돌았다.
그러나, 이 온도보다 더욱 차가운 것은 아까부터 이마를 괸 채로 말이 없는 무경을 바라보는 요원의 눈동자일 것이다.
그 싸늘한 눈동자가 하무경 상무 집무실 내를 짧게 훑는다.
고급 인테리어, 고급 마감재, 고급 집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누리는 가운데의 남자를 다시금 정시한다.
남자의 탄탄한 몸을 감싸고 있는 최고급 슈트도, 시계도, 신발도, 그냥 저 남자의 모든 것이 ‘고급’ 그 자체였다.
늘 이상하다곤 생각했었는데.
그래. 이게 맞지.
언제 무너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법한, 백야마을의 그 후진 시골집이 아니라.
요원이 황망하게 웃으며 시선을 떨어트렸고, 무경은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찡그린 눈을 내내 감고 있었기에 보지 못했다.
상처에 짓무른 요원의 눈동자를.
이대로 멈추어버렸으면 하는 시간은 째깍째깍 잘도 흘렀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무경은 이마를 괴고 있던 손을 느릿하게 풀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말이에요.”
피로한 눈꺼풀도 더디게 밀어 올리며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이상한 곳에 집착을 시작해요.”
두 눈매를 가늘게 찡그리며 라이터를 탕, 탕, 탕, 위로 연신 튕겨 불을 붙인 그가 후우- 새하얀 연기를 길게 뱉으며 라이터를 테이블 위로 던졌다.
“우리 회장님에겐 그 집착의 대상이 어릴 적 고향인 백야마을일 뿐이고.”
매캐한 연기가 폐부에 꽉 들어찬 듯이 가슴이 갑갑해져서 무경은 담배를 걸고 있지 않은 손을 움직여 가슴께에서 대롱거리는 넥타이를 아예 풀어 빈 소파 위로 던졌다.
“회장님이 폐암이거든요. 시한부 선고를 받았어요. 길어야 뭐, 앞으로 10개월쯤 사실까?”
평소보다 탁한 음성이 담배 연기와 함께 자욱하게 뱉어졌다.
“내겐 징글맞은 형 누나가 있어요. 기사 좀 봤으면 알 거고 우리의 목표는 같습니다. 동녘 그룹의 차기 총수 자리.”
“…….”
“그 자리 하나만 보고 살아왔습니다.”
줄곧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가 있던 시선을 끌어올린 요원이 무경을 쳐다봤다.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동자가, 마치 제 심장을 뚫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느껴졌다.
예쁜 이마, 예쁜 눈, 예쁜 코, 예쁜 입술. 모든 것이 다 예쁜 나의 그녀, 채 순경.
“…….”
무경은 요원과 검은 시선을 한동안 맞추며 담배를 몇 번 더 빨다가 몸을 조금 움직여 그것을 테이블 위, 빈 재떨이에 대충 비벼 껐다.
“회장님은 백야마을에 동녘 그룹의 아웃렛을 크게 짓고 싶어 하세요. 자신을 고향에 새겨넣고 가고 싶으시단 거죠.”
순간적으로 요원의 눈썹 앞머리가 찡그려지는 것을 보았고 무경은 푸스스- 입에 남은 담배 연기를 웃음과 함께 흘리면서 다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어 앉았다.
“알아요. 이해 안 되는 거. 나도 처음엔 우리 회장님의 의중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지금 말하잖아.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은, 이상한 데에 집착을 한다고. 누구보다 현명하고 총명하셨던 분입니다.”
“그래서 백야마을에 오신 건가요? 마을 사람들 다 쫓아내고 회사 아웃렛 따위나 건설하려고? 감히 사람들의 터전을 빼앗아요? 그깟 아웃렛 하나 깔려고?”
“쫓아내는 게 아니라 협의.”
무경이 그 말을 정정했고 요원은 차게 웃었다.
“협의요? 무슨 협의요. 돈 몇 푼 줄 테니 고향 버리고 떠나라고요? 그 협의요?”
“몇 푼이 아니라 가구당 12억이었습니다.”
요원의 머리로는 도저히, 저 사람들이 이해되질 않는다.
동녘 그룹 아닌가.
동녘에겐 없어도 되는 고작 아웃렛 하나겠지만, 누군가에겐 버릴 수 없는, 떠날 수 없는, 내 고향, 내 터전이 아닌가.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해 고향에서, 터전에서, 쫓아낼 권리는.
아무리 돈 많은 그들에게라도 없다.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리고 방금 채요원 순경이 말한 그깟 아웃렛. 그거. 작은 것부터 하나, 둘 깔아서 우리가 여기까지 온 거거든.”
남자의 낯선 사무적인 어투에 요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좀 더 정확히는 내가 회사 총수 자리를 먹기 위해 간 거예요. 내가 그 백야마을 사람들 죄다 합의해서 몰아내면, 차기 회장 자리는 내 거였거든요. 말했잖아. 그 자리 하나만 보고 살아왔다고.”
핑계 한마디도, 사과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는 그의 언행에 요원의 온몸에 힘이 쫙 풀렸다.
찡그리고 있던 미간도 맥이 풀리듯 같이 탁, 풀리면서 요원의 차가웠던 표정이 금세 처연해진다.
자신이 그간 알고 지내던 하무경이 아님을 금세 실감했기 때문이다.
당신이란 사람은 그저, 뼛속까지 사업가였을 뿐.
내가 알던 그 하무경은, 백야마을의 백수 하무경 씨는, 나와 눈 마주치고 웃고 함께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던 하무경 씨는, 저 남자가 만들어낸 허구 캐릭터였을 뿐이다.
그리고 눈앞의 이 남자는, 그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사람을 완벽히 속여왔던 것뿐이고.
배우가 역할을 따내 연기를 하듯, 그렇게 말이다.
당신은 배우를 했어도 정말 잘했겠다. 나는 정말, 그런 당신에게 까맣게 속아 넘어갔으니…….
숨소리조차 소음으로 여겨질 침묵만이 안개처럼 두 사람 사이에 자욱했다.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한 사람은 의외로, 지금까지 덤덤하게 행동했던 무경이었다.
무경은 다시금 주머니를 뒤적거려 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탕, 위로 올려 불을 붙이고 눈매를 사납게 찡그린 그가 시선을 옆으로 틀면서 볼이 움푹 팰 정도로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아까와 같은, 반복적인 행동 패턴이다.
“나한테 접근한 것도, 다 의도적인 거였어요?”
여자의 돌발 질문에 연기를 뱉던 무경의 숨 또한 함께 멈추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랑 친해지고 싶다고 했던 것도. 나한테 키스한 것도. 나 안은 것도. 전부 다…….”
한숨과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침음처럼 낮게 흘러나온다.
“계획의 일부였나? 내 마음 홀려서…… 합의서, 그거 받아내려고.”
무경은 다시 담배를 빨고 연기를 뱉어냈다. 자신을 가둔 그 연기가 무덤처럼 느껴졌다.
“왜냐면 나는 젊고, 마을의 순경이고, 그래서……. 다른 나이 많은 어르신보단 공략이 어려울 거로 판단해서. 그래서 더 친근하게 굴면서 다가온 거예요?”
혀를 굴려 이유 없이 따가운 볼 안쪽을 찌르던 남자가 시선을 정면으로 돌려 다시 요원을 제 시야에 꼭꼭 새겨넣었다.
“내가…… 바보처럼…… 등신처럼…… 당신 밑에서 순진하게 놀아난 거예요?”
중간중간 미간을 찌푸리던 요원은 어느 새부터는 칼에 찔려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인 양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팔각정 사장님네 뭐 좀 도와드리러 갔다가…… 봤거든요. 토지 합의서, 그거…….”
갑자기 속이 뒤틀렸다.
“동녘 그룹 이름 적힌 그거요.”
뒤집히는 속과는 달리 껍데기는 너무도 무던해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담배를 계속 빨았다.
“당신이 동녘 그룹 상무인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근육이 얼어붙은 듯 마비되는 느낌이 남자의 전신을 덮쳐온다.
“당신이, 내가 변한 이유를 고작 섹스에서 찾았을 때.”
“…….”
“당신이 술에 취해 우리 집에 찾아와 내가 그렇게 못하냐고 뻔뻔한 그 낯짝 들이밀며 웃기지도 않던 질문을 내게 던졌던 그 날!”
무력감. 체념. 낙망. 비관. 실의. 좌절. 절망. 낙담.
“나는 그날…….”
환멸. 비애. 두려움. 초조함. 애수. 슬픔. 설움 등.
“나는 그날이요, 하무경 씨.”
모두 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과 감각투성이.
“당신의 정체를 알고 온 세상이 다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어.”
겉으로 보기에 무경은 그저 태연할 뿐이었지만, 그 속은 말이 아니었으니.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래요?”
위가 또 찌르르하게 뒤틀리는 기분이었지만, 무경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얼굴로 그저 조용히 담배만 태웠다.
“나는 정말…….”
어느 상황에서든 포커페이스를 배우고 몸에 익힌 저 자신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하무경 씨에게 정말 진심이었는데…….”
요원이 애써 눈을 부릅뜨고 버티다가 눈을 한 번 깜빡거리자,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새하얀 뺨 위엔 이슬 같은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다 알면서도…… 그래. 사정이 있겠지.”
침묵한 채, 슈트 재킷 안쪽 주머니를 뒤적인 무경이 그녀의 앞에 말없이 손수건을 내밀었지만, 요원은 그 손을 싸늘하게 탁, 쳐낼 뿐이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거절당한 무경의 손이 허공에 잠시 머무르며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한동안 그렇게 가만있었다.
“그래. 이유가 있겠지. 다 이유가 있을 거다. 기다리다 보면. 하무경 씨 믿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내게 다 이야기해줄 날이 올 거다. 올 거야. 그러니까 기다리자.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내게 다 말해줄 거야.”
“…….”
“그 사정이, 그 이유가…… 결국 이런 거였구나.”
그녀의 목소리 끝에 비참한 울음이 섞여들었다.
무경은 바짝 마른 입술로 계속해서 연기를 빨고 또 뱉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시선을 구둣발 아래로 떨어트렸다.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다급하게 눈물을 훔치는 가여운 동작도 느껴진다.
“미안하다고 말해요. 그게 우선이잖아.”
눈물을 다 닦아낸 요원이 맹렬하면서도 싸늘한 눈을 올려 저를 직시한다.
“사과해요.”
꽉 말아쥔 주먹 탓에 맨살 안으로 손톱이 파고들어 고통이 느껴졌다.
“나 속인 거. 우리 전체를 농락한 거.”
모든 것을 죄다 부숴버리고 싶다는 원초적인 충동을 억누르면서, 요원은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내 눈 보고 제대로 사과해.”
상처받은 여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경의 눈썹 앞머리가 거칠게 찡그려졌다. 여자의 감정이 고스란히 와닿았기 때문이다.
“사과하라고.”
자신을 바라보는 요원의 눈동자에서, 그리고 목소리에서.
“이 쓰레기 같은 새끼야.”
작열하는 통증을 느꼈다.
“슬프네.”
무경은 미약하게 떨리는 손을 숨기듯 제 머리칼 안쪽에 대충 찔러넣으며 피식,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작게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채 순경은 그 쓰레기 밑에서 되게 좋아했던 것 같은데.”
성마른 어조였다.
의도와는 달리 말이 그렇게밖에 나가질 않았다.
“세세한 설명 죄다 집어치우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다시 중지와 검지 사이로 옮겨간 무경이 그 담배를 재떨이 위에 비벼 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 나 너에게 정말 미안해. 너 속여서 진심으로 미안해.
수십 번, 수백 번, 수만 번, 수억 번, 속으로 곱씹었던 그 말이 도저히 입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이 뭣 같은 상황이 나 또한 괴롭고 답답하긴 마찬가지인데.
그만해야지. 더 상처 주면 안 된다. 나도 잘 아는데. 나 정말이야. 너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그런데 나는 왜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너를 등지고 어디론가 향하나.
나는 대체 왜 지금…….
종이 한 장과 만년필을 잡아채 다시 네 앞에 앉아 그것을 너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밀고 있나.
“채요원 씨.”
너는 절대로 모를 것이다.
내가 너를 택하기로 한 그 순간부터, 내 인생 전부를 너에게 걸고 싶어졌다는 것을.
언제부터인가 너는, 내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 쉽게 갑시다?”
그래. 너는 내 인생 전부를 걸고 싶은 내 세상이다.
너는, 내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