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71화 (71/116)
  • 71화. 대변혁 [大變革]

    요원은 정처 없이 백야마을 내를 거닐었다.

    하천을 거닐다가 동산을 오르고 동산에서 내려와 마을 주변을 순찰하듯 정처 없이 거닐었다.

    하천이 흘러가는 물줄기 소리와 풀벌레 소리와 새소리가 귓전에서 계속해서 감돈다.

    시간이 저 물처럼 흘러갈수록, 자연의 소리는 요원의 귓가에서 까마득하게 점멸되고, 대신 한 남자의 음성만이 그 자리를 꽉 채웠다.

    ‘순경님.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이면 들어와요. 혼자 먹기엔 양이 좀 많아서.’

    ‘나에 대해 파악하셔야지? 내가 백야의 아홉 번째 가구 주민인데.’

    ‘그럼 순경님은 마을 사람들에 대해 아주 잘 아시겠다.’

    ‘유감입니다. 유감이네요. 유감이에요, 채요원 순경.’

    ‘어느 날 갑자기. 12억, 아니, 채요원 씨에겐 특별히 20억이 주어진다면. 가장 먼저 뭘 하고 싶습니까.’

    ‘비슷해요. 로또보다 확률이 높고 현실성 있는 것을 제외하곤.”

    ‘집 사서 서울이나 경기권으로 가요.’

    ‘떠나라고. 기분 좋게. 좋잖아요? 20억인데. 땡잡았지.’

    어느 날인가, 당신이 우리 집 화단을 보며 예쁘다고 했던, 그 날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어머니가 아끼시던 화단을 알아봐 준 당신이 너무 고마워서 나는, 웃으며 대답했었지.

    어머니 작품이라고.

    그때 당신, 내게 또 뭐라 했었더라.

    ‘하필 또 어머니야?’

    그것도 유감이라 했었던가.

    왜? 예쁜 화단까지 싹 다 밀어버려야 하니까?

    이제 보니 당신이 우리 어머니를…….

    당신이 우리 할머니와 아버지를…….

    당신이 이 마을 사람 전부를…….

    그리고, 당신이 나를.

    요원의 방랑하던 발걸음이 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발끝에 가 있던 시선을 서서히 들어 올리자, 모자챙 밑에 가려졌던 요원의 눈동자가 훤히 드러났다.

    그 차가운 눈동자가 굳게 닫힌 철제문을 서늘하게 바라본다.

    문고리를 잡아 미약한 힘을 주자 끼익 녹슨 소리와 함께 문이 철컹, 열렸다.

    요원은 이제 그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빈집 마당 한가운데에 서서 시골집을 천천히 살피던 그녀가 한 걸음, 두 걸음, 느리게 대청마루로 향한다.

    신발도 벗지 않고 그 대청마루 위를 우뚝 밟고 올라섰다.

    ‘채요원 순경, 혹시 알까 모르겠는데요. 당신, 키스 존나 잘해.’

    여기에서 우리, 키스했었나. 멘톨 사탕을 서로의 입으로 주고받던 아주 야릇했던, 첫 키스의 기억.

    대청마루를 지나 집으로 연결되는 문을 탁, 손바닥으로 단호하게 밀치자 그대로 문이 열렸다.

    요원은 여전히 신발을 신은 채로 집 안으로 들어가 주인 없는 컴컴한 집 안을 고요한 시선으로 휘- 살폈다.

    이 집에 올 때마다 내내 굳게 닫혀있던 비밀스러운 방을 향해 걸음을 막 옮기던 때에, 그녀의 발밑에 고물 선풍기가 툭 하고 치였다.

    뜻밖의 장애물의 등장에, 요원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린 듯 멈춰 서 더는 움직이지를 못한다.

    “…….”

    제 발아래에 치이는 선풍기를 한참을 가만 내려다보던 요원이 그 선풍기를 발로 툭 한 번 건드렸다.

    그래도, 장애물처럼 굳건하게 제 앞을 막고 버티자 그 선풍기를 또 한 번 툭, 건드리고.

    툭. 건드리고. 툭. 건드렸다가.

    쾅. 이제 그 발의 세기가 좀 더 세지고.

    쾅. 쾅. 쾅.

    쾅쾅. 쾅쾅쾅쾅쾅!

    선풍기를 부숴버릴 듯이 발로 마구 걷어차던 요원이 선풍기가 바닥으로 쓰러짐과 동시에 제 머리를 양손으로 꽉 부여잡으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머리를 붙들고 있는 그녀의 팔 전체가,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파르르르 떨렸다.

    남자에게서 받은 배신감이 요원의 영혼을 갉아먹는 기분이 들었다.

    용암처럼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세포 사이사이에 배어 쉬이 사그라지지를 않는다.

    쥐 죽은 듯, 시끄러운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

    “하아…….”

    심호흡과 함께 삐뚤어진 순경 모자를 다시 잘 고쳐 쓴 요원이 자리에서 똑바로 일어나 침체된 눈동자로 다시 무경의 고요한 집 안을 살폈다.

    여기에 온 목적이 결국 그거였구나.

    당신이 우리 어머니를…….

    당신이 우리 할머니와 아버지를…….

    당신이 이 마을 사람 전부를…….

    그리고, 당신이 나를…….

    처음부터 완벽히 농락했구나.

    이 천하의 개자식이.

    그녀의 적갈색 눈동자가 생전 처음 보는 서슬 퍼런색으로 침염되었다.

    .

    .

    .

    대변혁 [大變革]

    여름이 오고 있긴 한지, 그날은 유독 해가 긴 저녁이었다.

    임원 엘리베이터 문이 촤르륵 열리며 퇴근하는 무경이 그 안에서 내렸고, 늘 그렇듯 그의 뒤는 차태호 실장과 서이준 비서가 따랐다.

    그가 로비를 한 걸음 두 걸음 걸어 나가자 그의 앞이 홍해 갈라지듯 쩍 갈라지며 동녘 직원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서 관장님, 내일 인천 도착 시각 오전 8시 10분으로 예상됩니다.”

    태호의 보고에 무경이 제 귀를 문지르며 눈썹을 찌푸렸다.

    “언제 적 관장이에요. 관둔 지가 언젠데.”

    “죄송합니다. 입버릇이 되어서. 내일 상무님 댁엔 6시에 도착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지 마세요. 공항엔 내가 직접 운전해서 갈 겁니다.”

    “예? 상무님께서 직접요?”

    “8년 만에 보는 어머니예요. 내가 모셔야지.”

    “그럼, 내일 영등포 지점 방문 시간을 오후 4시로 늦추겠습니다.”

    “3시로 하세요.”

    “예, 상무님.”

    그렇게 업무 얘기가 오가며 뚜벅뚜벅, 세단이 기다리고 있는 정문으로 향하던 때에.

    “상무님. 그 시골집 욕실 공사 말입니다.”

    이 말을 아까부터 내내 준비했던 이준이 운을 떼었고, 시니컬한 한숨을 짧게 뱉은 무경이 아까부터 문지르던 귓가를 더욱 사납게 문질렀다.

    “네. 또 뭐요. 그 욕실이 또 왜.”

    쉬잇, 태호가 입을 다물라 눈치를 주자 이준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상무님.”

    태호의 점잖은 목소리가 들려온 그제야 귓가를 문지르던 무경의 행동도 함께 멈췄다.

    그렇게 또 뚜벅뚜벅, 제 앞길을 가로막는 것 하나 없는 그 길을 유유자적하게 걷다가…….

    어느 한순간에, 우뚝.

    무경의 발걸음이 지뢰라도 밟은 것처럼,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질 못하고 그대로 급하게 멈춰 서버렸다.

    “상무님.”

    태호와 이준이 갑자기 멈춰 선 무경의 날렵한 옆태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상무님?”

    두 사람이 동시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느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무경의 처음 접하는 표정 때문이었다.

    일직선으로 굳게 다물렸던 무경의 입술이 점차 벌어진다.

    경련이 일어난 듯 한쪽 눈썹이 움찔, 찡그려진다.

    얼굴이 창백해져선 한 걸음 뒷걸음질 치던 그가 순간적으로 비틀거렸다.

    “상무님!”

    놀란 태호가 그의 팔뚝을 덥석 붙잡았다.

    무경은 여전히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꼭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귀신이라도 본 사람인 양. 그렇게 넋이 나가 있었다.

    “상무…….”

    태호가 무경에게로 줄곧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그가 보는 방향으로 돌렸다.

    그곳엔,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순경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자신들과 일정 거리 벌리고 서 있던 여자가 한 발, 두 발,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한다.

    거리를 좁히고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여자를 대번에 알아본 태호 역시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무경을 쳐다본다.

    “…….”

    늘, 깊은 심해처럼 잔잔하기만 하던 무경의 눈동자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쳤다.

    해일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때리고 부순 것처럼, 그의 눈동자가 그렇게 엉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겁에 질린 얼굴, 혹은 엄청난 공황에 빠진 사람처럼 한 발 뒤로 더 물러나던 무경이 또다시 비틀거렸다.

    “사, 상무님!”

    이번엔 이준이 그의 허리를 지탱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 위태로운 남자와는 달리, 남자를 향해 다가오는 여자의 발걸음은 아주 정확하고도 꼿꼿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도, 표정에도, 어느 한 곳에도 ‘균열’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채 순경.

    분명 그녀를 부른 줄 알았으나, 사실상 무경은 벌어진 입 밖으로 그 어떠한 목소리도 내질 못하는 상황이었다.

    입을 벌리고 있으나 목소리는 나가지 않고, 입은 벌리고 있으나 산소가 들어오지 않는, 난생처음 접해보는 아주 기이한 경험이기도 했다.

    “하무경 씨.”

    무경의 앞에 우뚝 멈춰 선 요원이 고개를 뒤로 젖혀 그를 여유롭게 올려다본다.

    숨을 잘 쉬지 못하는 무경의 낯빛은 점차 더 창백해져 갔다.

    덜덜 떨리는 손이 제 넥타이를 잡아 빠르게 아래로 끌어내린다.

    그래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자 무경은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제 가슴께를 빠르게 문질렀다. 그 손끝이 티가 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이 아주 우습다는 듯, 요원이 순간적으로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리며 피식 실소했다.

    “아니지.”

    다시 고개를 꼿꼿하게 세운 요원이 그를 똑바로 직시한 채 웃으며 중얼거린다.

    “이렇게 부르면 안 되지.”

    한껏 비딱해진 그 미소가 점차 그녀의 말간 얼굴 위에서 잠식되며.

    “동녘 그룹의 고귀하신 막내 아드님.”

    여자의 가시 같은 목소리가 비수가 되어 무경의 심장에 그대로 내리박힌다.

    “하무경 상무 이 개자식아!”

    아예 꿰뚫고 지나간다.

    “아…….”

    그제야, 막혔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듯 무경의 잇새에서 절망이 깃든 탄식이 그렇게 흘렀다.

    ……이런.

    존나,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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