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70화 (70/116)
  • 70화. 토지 합의서

    [ ※ 70-71 추천곡 : Lady Gaga – Angel Down ]

    오전 9시 정각이 되자 하무경 상무 집무실엔 앳돼 보이는 홍보팀 담당 둘이 들어왔다.

    그들은, 소파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올리고 서류를 넘겨보는 무경을 긴장된 낯빛, 혹은 수줍게 상기된 얼굴로 바라보며 보고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간, 하무경 상무에겐 홍보팀장이나 실장급 정도가 올라와서 보고했지만, 이제부터 사원급을 보내란 무경의 지시가 있었다.

    사원 교육에 유독 관심이 많은 하무경 상무를 잘 알기에, 홍보팀장이 대리 한 명과 사원 한 명을 올려보낸 것이다.

    “국무총리 따님과의 교제설이 사실이냐는 확인 전화가 많이 걸려왔었습니다. 물론, 뜬소문이라 저희 입장 밝혔고 데스크에서 다 막혀 기사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홍보팀 대리는 몇 시간이나 연습해온 내용을 그의 앞에서 또박또박 잘 말했지만, 사시나무 떨듯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까진 숨길 수 없었다.

    “계속해요.”

    무경은 서류를 넘겨보면서 동그랗게 말아쥔 주먹으로 입가를 가린 채 짧게 하품했다.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있고 입고 있는 슈트 베스트의 단추까지 모두 다 풀려있는 것을 보아하니, 회사에서 밤을 새운 듯 보였다.

    “그, 그리고 회장님의 건강 악화설이 사실이냐는 확인 전화도 여러 군데에서 걸려왔습니다. 그 또한 뜬소문이라 저희 입장 강경하게 밝혔고 이 또한 기사는,”

    “그 부분은.”

    무경이 하 회장의 이야기에 반응하듯, 보고 있던 서류 뭉텅이를 테이블 위에 쿵 내던지며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올렸다.

    “법무팀에 넘기세요.”

    그 날카로운 시선을 3초 이상 마주하지 못하고 두 사람이 얼른 시선을 발밑으로 내리며 대답했다.

    “예.”

    후, 하는 한숨과 함께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어 앉은 무경이 소파 헤드에 머리를 기대며 웃었다.

    “기자들 말이에요. 참 유치하지 않아요? 남 일에 혈안이 되어 그렇게 달려드는 꼬락서니들이. 좋은 일엔 쥐뿔 관심들이 없지, 그것들은.”

    가슴께에서 덜렁거리는 넥타이 매듭을 잡아 쭉 단숨에 끌어올린 그가 넥타이를 단정하게 고쳐매기 시작했다.

    “안 좋은 일은 기가 막히게 또 냄새 맡고 달려들어. 예의 없게.”

    이젠 그가 베스트 단추를 다시 걸어 잠그며 탁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장님의 건강 악화가 동녘에겐 재앙인데 그것들에겐 한낱 유희인가 봐. 짜증 나게.”

    씨발, 작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자 그 포스에 이유 없이 몸을 움츠러트린 홍보팀 직원들이 시선을 더 아래로 내리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여러분들. 먹고사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에요. 뭐 어쩌겠어요. 그들도 먹고살려면 그따위로 비열하게 살아야지. 안 그래요?”

    뭐라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앞으로 공손하게 모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 제 직원들을, 마치 어린양 보듯 귀엽게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린 무경이 그들을 지나쳐 뚜벅뚜벅, 데스크로 향했다.

    “홍보팀이 고생들 좀 해주세요, 지금처럼.”

    “예, 상무님.”

    “그리고 아까 그 누구야. 누구더라? 정 뭔데.”

    브라운 톤의 이태리 럭셔리 오피스 가죽 체어에 몸을 앉힌 무경이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히며 이마를 문질렀다.

    “아. 그래. 국무총리 딸. 정나정이었나? 맞아요?”

    “저, 정나경 씨입니다.”

    “그래. 걔 말이에요.”

    무경이 동그랗게 말아쥔 주먹을 입가에 다시금 갖다 대며 짧게 아함, 하품했다.

    이번의 하품은 완전한 비아냥이었다.

    “또 기자들 전화 와서 물어보잖아요. 그럼 이렇게 좀 전해주세요.”

    “어, 어떻게 전할까요.”

    “정나경 양, 미국에서 펜타닐 좀 하셨던데.”

    “예? 펜타……닐이요?”

    “펜타닐이 뭐냐면요, 여러분들.”

    다 식어 빠진 테이크아웃 잔을 잡아 커피를 한 모금 삼킨 무경이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완벽한 각도로 내렸다.

    “아주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의 일종이에요. 주로 중증 환자들에게 처방이 내려지죠. 말기 암 환자 같은. 그런데 미국 슬럼가 약쟁이들이 이 패치로 투약을 시작했다고. 싼데 또 효과가 끝내주거든. 헤로인의 100배라는데 이미 말 다 했죠.”

    “…….”

    “미국뿐만 아니라 요즘 한국에도 비상등이 켜졌어요, 이 펜타닐 때문에. 뉴스에 간간이 나오기도 하는데. 못 보셨나 봐?”

    “죄, 죄송합니다.”

    “뭐, 죄송할 것까지야. 아무튼, 그게 금단현상이 아주 끔찍하다더라고. 인생 망하고 싶으면 펜타닐을 하란 말이 돌 정도로.”

    무경이 여유롭게 커피 한 모금을 더 삼켰다.

    “정나경 양, 중독재활센터에서 치료받느라 고생 좀 하셨겠던데.”

    딸깍딸깍, 그가 클릭하는 마우스 소리만이 적막한 집무실 내를 울렸다.

    “도박쟁이가 도박을 못 끊듯, 약쟁이도 절대 약 못 끊거든. 참는 거예요. 끊은 게 아니라.”

    딸깍, 거리는 소리가 이내 완전히 멈추고.

    “아무튼, 이 장황한 말의 결론은 말이에요.”

    노트북을 향해있던 심해를 닮은 검은 눈동자가 서서히 올라와 두 사람을 무섭게 꽉 옥죄며 맹수의 사나움을 떠올릴 법한 목소리가 그들에게로 툭 떨어진다.

    “지금 누구한테 그따위 싸구려 약쟁이를 갖다 붙여.”

    먹이사슬 꼭대기에 있는 맹수 앞에 내던져진 약해빠진 초식 동물처럼, 두 사람은 벌벌벌 떨고 있었다.

    “이건 우리 동녘에 대한, 이 하무경에 대한 모욕이지. 안 그래요?”

    “그, 그렇습니다.”

    말로만 전해 듣던 그 카리스마가 실로 엄청나서 다리에 힘이 다 빠질 정도였다.

    “이대로, 기자들에게, 그대로, 전하시라고.”

    일부러 말의 음절 사이를 뚝뚝 끊어 강조한 그가 이내 표정을 바꿔 싱긋 웃는다.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속에서 무경의 핸드폰이 지잉 지잉 지잉, 두 사람에겐 생명줄처럼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무경이 여전히 겁에 질려 창백한 낯빛으로 서있는 직원들에게 나가보라 손짓하며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 대 느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내일 한국 오신다면서요. 정확히 8년 만인가요? 아들 얼굴, 알아보실 수 있겠어요?”

    전화 상대는 제 어머니인, 서정연이었다.

    ***

    오후 1시 30분경, 요원이 자전거를 타고 팔각정 사장네 집 앞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녀를 반기듯 팔각정 사장이 집 안에서 반가운 얼굴로 뛰어나왔다.

    “채 순경! 바쁠 텐디 불러내서 미안해잉!”

    “미안하긴요. 순경이 마을 사람 도우라고 있는 거죠.”

    “이잉. 우리 채 순경이 최고여.”

    “그런데 사장님. 웬일로 오늘은 팔각정 문 안 여셨어요?”

    “응?”

    “경장님하고 점심 먹으러 들렀다가 허탕만 치고 왔잖아요.”

    “이잉. 그래부러써? 미안해서 어째야 쓸까잉.”

    자전거에서 훌쩍 내린 요원이 순경 모자를 잘 고쳐 쓰며 팔각정 사장에게로 다가섰다.

    술 냄새가 풍겨오는 팔각정 사장 앞에 멈춰 서며 빙그레 미소 짓는다.

    “낮술 하셨어요?”

    “이잉. 내가 기분이 좋아가지고라 딱 한 잔 혔구만.”

    “아하. 그래서 안 여셨구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이잉. 난중에 말해줄랑게.”

    요원이 습관처럼 주변을 휘-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제가 무슨 일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채 순경, 경운기 몰 수 있제?”

    “기본이죠.”

    “그람 내가 시방 지금 취해서 그라는데 저 짝으로 잔 갖다 줄 수 있는가?”

    “경운기를 어디로 갖다 드리면 될까요?”

    “저그 으디여. 부녀회장 논밭으로. 지금 필요하다 한디 내가 거하게 취해부렀응께.”

    “키 주세요, 사장님.”

    “이잉! 참말로 고맙당게? 아참! 수정과 있는디, 한잔할랑가?”

    “주시면 감사하죠.”

    “이잉. 저서 째깐 앉아서 기다리랑께? 내가 그냥 곶감을 넣어가꼬 시원하게 한잔 갖다 줄랑께.”

    팔각정 사장이 가리킨 대청마루 위엔 막걸리병과 과자가 늘어져 있었다.

    그것들을 피해 대청마루 끄트머리에 잘 앉은 요원이 쓰고 있던 순경 모자를 잠시 벗어 대청마루 위에 내려두기 위해 막 시선을 깔던 때였다.

    요원의 손이 막걸리병 옆에 놓인 종이로 망설임 없이 뻗어진 순간은.

    남의 것에 함부로 손을 대는 타입이 절대로 아니었으나, 이상하게 그 종이는 보자마자 손이 먼저 나갔다.

    달그락. 달그락.

    집 안에선 팔각정 사장이 요원에게 줄 수정과를 뜨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그 종이를 집어 제 얼굴 앞으로 가져온 요원의 시선은, 종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느릿하게 신중하게 내려가고 있었다.

    새하얀 종이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검은 글자가 요원의 적갈색 눈동자에 각인되듯 그렇게 새겨지기 시작한다.

    『 토지 합의서

    본인의 다음 토지는 ㈜동녘 그룹에서 취득키로 성립되었으므로 그 소유권은 아래 기간부터 ㈜동녘 그룹에 있다.

    토지의 소재지: 전라도 xxx xxx 백야마을 127번지

    토지 취득 기간: 본 합의 날로부터 1개월 이후 즉시 효력 발휘

    ㈜동녘 그룹은 위 소재지의 현 토지소유권자인 본인에게 토지 비용 외의 합의금으로 일금

    ₩1,200,000,000원정을 합의 후 1개월 이내로 일시납 한다.

    본인과 ㈜동녘 그룹은…… 』

    합의서 내용을 조용히 읽어내려가던 요원이 그 종이를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원상태로 올려두었다.

    “…….”

    고개를 든 그녀가 고요한 시선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아름다운 백야마을의 풍경이 요원의 시야에 그림처럼 새겨졌다.

    다시 순경 모자를 머리 위에 조용히 눌러쓴 요원이 대청마루 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채 순경! 수정과 한잔 시원하게!”

    그리고, 팔각정 사장이 밖으로 다시 나왔을 때.

    요원의 자전거는 거기 그대로 있었지만, 요원은 그 자리에 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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