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끈적한 6월의 초여름 밤
요원은 제 앞에서 손을 내밀고 있는 무경을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그녀의 아래턱이, 잠시 파르르 떨렸다 느낀 것은 그만의 착각이었을까?
“하아…… 진짜…….”
얼굴을 일그러트린 요원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빠르게 가렸다.
“하무경 씨, 진짜 나한테 왜 이래요…….”
여자가 조금 내보인 속내에 무경이 기다렸다는 듯 얼른 몸을 낮추고 앉아, 아까보다 많이 누그러진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너한테 뭘 어떻게 했는데. 응?”
무릎만 꿇지 않았지, 이건 거의 무릎을 꿇고 금방이라도 요원의 앞에서 두 손이 발이 될 정도로 싹싹 빌 얼굴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말해. 말해줘야 알지.”
나쁜 새끼. 지는 한마디도 안 하면서.
여자가 얼굴을 가린 채로 뭐라 뭐라 웅얼거리는데 무경은 그 웅얼거림을 하나도 듣지 못하고 눈살만 찌푸렸다.
“채 순경, 지금 뭐라고,”
무경은 말을 차마 끝낼 수 없었다.
제게로 몸을 던지듯 달려든 요원이 자신의 목덜미에 두 팔을 꽉 두르며 격하게 입술을 부딪쳐 왔기 때문이다.
“!”
갑작스레 자신을 덮쳐온 여자의 무게에, 요원의 얇은 허리에 반사적으로 한쪽 팔을 휘감은 무경이 뒤로 쿵, 넘어가며 시골 장판 위에 등을 찧었다.
아, 하는 신음을 뱉은 것도 잠시.
혼란에 요동치는 무경의 검은 눈동자가, 눈을 곱게 감고 제게 입 맞추는 여자의 찌푸려진 얼굴을 한참을 올려다봤다.
그러다가, 요원의 가벼운 몸을 순식간에 들어 올린 무경이 시골 장롱 냄새가 나는 이불 위에 그녀를 쓰러트리듯 풀썩 눕혔다.
이제 두 사람의 자세는 정반대가 되었다.
무경은 요원의 위에, 요원은 무경의 아래에.
“너 지금 나랑 장난해? 성범죄자 취급할 땐 언제고 이젠 네가 나를 덮쳐?”
요원을 단단한 두 팔 사이에 가둔 무경의 어투는 질타에 가까웠지만.
“상대와 협의되지 않은 관계는 추행이자 폭행일 뿐이야. 잘 아시는 분이 그래.”
음성은 사랑을 속삭이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나는…….”
고개를 사선으로 비스듬히 틀며 요원에게 점차 다가선 무경이,
“어쩐지 협의하고 싶네.”
살벌했던 표정을 금세 싹 바꿔 싱그럽게 웃었다.
“입을 더 벌려요. 더. 옳지.”
“흐읍.”
남자는 이미 벌어진 요원의 입술을 더 애타게 벌려 키스했다.
요원의 입술을 강하게 빨고 당기고 물고 다시 빨고, 그녀의 입술을 탐하는 남자의 입술은 아주 갈급함 그 자체였다.
“하아, 채 순경. 채요원 씨. 채요원. 있잖아…….”
잠시 맞대고 있던 입술을 떨어트리고 여자를 여러 번 부른 무경이, 나직한 한숨과 함께 요원의 가슴께에 쓰러지듯 잠시 이마를 툭 기댔다.
“200억 집, 그거…… 그까짓 거, 그거 내가 다 사줄게…… 그러니까…….”
작게 중얼거리던 그가 다시 잘나 빠진 얼굴을 들어 올려 요원을 아까와는 다른 눈빛으로 바라보며 운을 뗀다.
“너…….”
나직이 중얼거린다.
“나 싫어하지 마.”
혼잣말하듯.
“미워하지 마.”
그렇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 싫다는 여자한테 질척거리고 그런 놈 아니에요.’라고 턱을 치켜세우고 말하던, 그 오만하던 남자는 여기 더는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요원의 눈동자는 지진이 난 듯 크게 휘청거렸다.
그냥 지진도 아니고 진도 9 정도의 대지진이.
왜냐면…….
“나는 너 많이 좋아해.”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저에게로 향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진심으로 다가와 매우 곤혹스러웠으므로.
“좋아해.”
그 세 글자에 다시 설렘을 느끼는 이 상황이 하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으므로.
그러나, 여기에서 더 어이가 없는 건…….
“너무 좋아해.”
한숨과도 같은 그 마지막 말을 던지는 남자의 단정한 얼굴에 또 한 번 정신이 팔려, 그깟 달콤한 사탕발림에 완전히 홀려, 밑으로 손을 빠르게 내려 더듬거리며 그의 벨트 버클을 철컹철컹, 푸는 정신 나간 자신이 아닐까, 싶었다.
요원의 그 야릇한 몸짓이 휘발유 같은 성정의 남자에 불을 지핀 듯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새하얀 박스티를 위로 홱 사납게 걷어 올린 무경이 브래지어를 하고 있지 않은 요원의 출렁이는 가슴을 한입에 크게 베어 물었으니.
아, 해일처럼 덮쳐오는 그 짜릿한 감각에 요원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신음했다.
자신의 집이라는 것을 깨닫곤 얼른 손으로 입술을 틀어막아 다행이었지만.
분홍빛 열매를 혀끝으로 몇 번 할짝대던 무경이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점차 더 아래로 내려갔다.
요원이 입고 있는 하의가 순식간에 모두 벗겨지고 새하얀 그녀의 다리는 M자로 완벽하게 벌어졌다.
그녀가 입고 있던 반바지와 팬티는 요원의 얇은 발목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대롱거렸다.
요원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무경이 예민한 곳을 능숙하게 빨아대다가 그 안쪽으로 깊숙이 혀를 꽂아 넣었다.
“!”
요원은 제 입술을 손바닥으로 더 꽉 누르며 신음을 삼켰다.
반사적으로 허리가 튕기며 그의 혀가 더 깊이 들어왔다.
이불을 꽉 틀어쥔 요원의 손이 쾌락의 끝을 달리듯이 바들바들 떨렸다.
“너, 내가 싫다고.”
그가 아래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 마음껏 비웃어. 나도 내가 지금 우스워 견딜 수 없으니.
요원은 엉망으로 흐트러진 제 이목구비를 두 손으로 가리면서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꾹 삼켰다.
나 역시, 그대가 너무 좋다고.
그러니, 제발. 그대여, 제발. 그대가, 제발.
지금보다 더한 개자식은 아니기를.
아무도 듣지 못하는 두 사람만의 조용한 행위가 시골집 안에서 삐걱삐걱 밤새 이루어졌다.
찌르르르. 찌르르르. 찌르르르.
자신들을 대신해 풀벌레가 밤새 소리 내어 울어주던, 아주 끈적한 6월의 초여름 밤이었다.
***
하 회장과 하태경이 백운의 정원에 나란히 앉아 생강차를 마셨다.
“사장 취임식이 벌써 코앞이네.”
“예, 회장님.”
“축하한다잉.”
쥐고 있던 찻잔을 고급 원목 테이블 위에 달칵 내려둔 하태경이 고개를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내렸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태경아.”
“예.”
“내가 얘기한 적 있더냐잉?”
“무엇을 말씀입니까?”
“니는 딱 거까지라고.”
테이블 위에 내려가 있던 태경의 눈동자가 서서히 올라와 하 회장에게로 정확하게 꽂힌다.
“무슨 말씀이신지…….”
“거까지다 하 부사장. 욕심내지 말어라잉.”
정원 한편에 우뚝 서있는 황금소나무로 시선을 돌린 하 회장은 잠시 굳게 다물렸던 입을 열었다.
“고라고 말이다. 누가 내 자리에 앉든 간에 마이 도와줘라. 니 역할은 딱 그거시여.”
“그게, 하무경 상무입니까?”
하 회장에게선 잠시 말이 없었고, 두 허벅지 위에 점잖게 내려져 있던 하태경의 두 주먹엔 불시에 바짝 커다란 힘이 들어갔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되어서 그러는데 말입니다, 회장님.”
황금소나무에 진득하게 가 있던 하 회장의 시선이 제 앞의 하태경에게로 비스듬히 쏠렸고.
“왜 저는 안 되는 겁니까, 회장님.”
하태경은 냉랭함을 숨긴 아버지의 인자한 시선을 피하지 않으면서 조금 까칠하게 물었다.
“왜 저를 인정해주시지 않는 겁니까.”
“아따, 고거시 시방 먼 말이래?”
한없이 진지한 하태경과는 달리, 하 회장은 서글서글 웃으며 찻잔을 다시 손에 그러쥐었다.
“내가 니를 인정을 안 했으믄 니가 지금 그 자리에 앉아 있것냐?”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회장님께서 더 잘 아시잖습니까.”
“이잉. 어려울 거 없어잉. 내가 인정한 니 능력은 딱 거까지라는 거시니께.”
“그게 이해가 안 된다는 겁니다, 저는.”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생강차를 한 모금 꿀떡 삼킨 하 회장은 세월이 보이는 눈가로 하태경을 가만 응시하였다.
하태경은 여전히 인정을 못 하는 얼굴로 있었고, 미소가 서서히 점멸되는 하 회장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섬광이 스친 건 찰나였다.
“바로 그거시다.”
하 회장이 이잉, 이잉, 소리를 내며 하태경의 얼굴을 향해 삿대질을 시작했다. 끌끌 혀를 차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어째 그 나이 먹도록 안 고쳐지는고잉. 머 어쩌것냐. 니 그릇이 딱 고만한 거시제.”
“회장님.”
“내가 동녘을 어찌케 이만큼 키웠는지 니 아냐. 부족한 건 채우고. 잘하는 건 더 발전시키고. 죽고 살고 일해가꼬 이만큼 왔다잉. 그란데 니는 아니여. 니 부족함을 인정할 줄을 몰라잉. 부족함을 인정 안 하믄 그땐 퇴보만이 남은 거시다. 수장 실격이제.”
“하무경 상무는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고거슨 니가 더 잘 알 거 아니냐?”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난 하 회장이 뒷짐을 진 채 서서 황금소나무를 다시 진득하게 내려다보았다.
“우리 무갱인 다르제. 니들이 열등감에 찌들어 하 상무만 보면 치를 떨고 흠집 내려 할 때에도, 하 상무는 니랑 하 전무가 잘한 부분은 인정하고 내 앞에서 니들을 칭찬하는 여유도 가졌다. 그뿐인 줄 아냐잉.”
“…….”
“자신이 부족한 부분은 아주 빠르게 인정하는 놈이여. 인정한 다음엔 어찌케 될 것 같냐. 다음번엔 더 나아져서 내 앞에 서부러. 자신을 낮춰야 할 땐 낮추고 높여야 할 땐 높이고 고개를 숙여야 할 땐 숙이는 법도 알고 자신이 돋보이는 법을 아주 잘 아는 놈이다, 고거시.”
“…….”
“아주 꼬리 백 개 달린 여우제, 여우.”
동녘의 막내아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하 회장은 정원이 떠나가라 크게 웃었고, 하태경은 그런 하 회장의 앞에서 빠르게 고개를 떨어트렸다.
“회장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그간 많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앞으로 제가 더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회장님.”
“이잉. 그래잉. 노력을 해라잉. 우덜 같은 사람들에겐 노력만이 살길이여.”
하 회장이 하태경의 어깨를 두 번 툭툭 두드리며 정원을 가로질러 서재로 향했다.
어금니를 꽉 깨문 하태경의 턱 근육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저 *물짠놈.”
혀를 끌끌 차며 서재로 돌아온 하 회장이 검은 가죽 의자 위에 몸을 앉혔다.
데스크 중앙에 놓인 갈색 봉투를 발견한 하 회장의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심 여사! 이거시 머시당가?”
늘, 하 회장의 근처에 있는 심 여사가 서재 문을 두 번 노크 후 조용히 들어와 손을 앞으로 모으며 대답했다.
“하무경 상무가 보낸 겁니다.”
“우리 무갱이가?”
하 회장이 부스럭거리며 갈색 봉투를 열어보았다.
갈색 봉투 안에 들어있는 뻣뻣한 종이를 꺼내 들고 데스크 위에 올려져 있던 안경까지 끼며, 하 회장은 눈매를 좁힌 채 종이에 쓰인 글자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날카롭게 다물렸던 하 회장의 입술이 곧 커다랗게 벌어져 하하하! 서재 안을 쩌렁쩌렁 크게 울렸으며, 아픈 사람답지 않게 아직 힘이 넘쳐나는 주먹은 데스크 위를 쾅쾅쾅 연신 두드리며 환호를 시작했다.
“봐라, 태경아!”
종이 한 장을 데스크 위에 쾅! 자랑스레 내려둔 하 회장이 여기에 없는 하태경을 찾으며 호쾌한 목소리를 내뱉는다.
“우리 무갱이는 더 나아져서 내 앞에 선다 했제?”
하 회장이 내려둔 종이 가장 상단엔 『토지 합의서』란 글자가 큼지막하게 적혀있었다.
*물짠놈 – 기대에 미치지 못한 인물이란 뜻의 전라도 방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