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68화 (68/116)
  • 68화. 찌질한 새끼, 그 두 번째 이야기

    [ ※ 68-69 추천곡 : Radiohead - Creep ]

    여태 눅눅했던 남자의 시선은 연속 2연타로 꽤나 충격을 받은 듯 잘게 떨렸다.

    내내 꺼졌던 스위치가 남자의 머릿속에서 팟! 하고 켜진 순간이기도 했다.

    굽히고 있던 허리를 서서히 세운 무경이 조금 전 요원에게 들었던 말을 되씹었다.

    추행이자 폭행. 그러니까 성추행이자 성폭행이란 거 아니야, 지금.

    되새기면서 본인도 웃긴지 자조적으로 한번 웃기도 했다.

    “나 참.”

    몇 번을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는지 다시금 헛웃음 치며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그러다가 제 밑에 얌전히 깔린 요원에게로 극명하게 시선을 내렸다.

    “그 정도로 나와의 이 짓이 싫다는 거잖아. 나를 범죄자 취급할 만큼.”

    “하무경 씨.”

    “잠시만.”

    아직 정리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듯 검지를 세운 무경이 그녀의 말문을 막았다.

    음, 하는 소리를 일부러 길게 낸 무경이 제 턱을 어루만지며 아까보다 더 신경질적인 어투를 끄집어냈다.

    “채 순경. 혹시 지금 나 까인 겁니까.”

    “…….”

    “대답해. 나 까인 거예요?”

    요원의 표정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의 입술이 잠시 충격에 벌어졌다.

    “깐 거네.”

    “…….”

    “네가 나를.”

    불쾌함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아주 완벽한 시선이 요원의 헝클어진 얼굴을 더 헝클어트린다.

    “그런데 채 순경은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없네. 깔 땐 까더라도 이유는 말해주고 까야지.”

    남자가 제게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운운하는 게 우스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납득이 안 가서 그래요, 납득이.”

    본인은 그렇게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잘 지켜 입만 열면 거짓말을 반복했나.

    “내겐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좋다고 물고 빤 아름다운 기억밖에 없어서요.”

    뻐근한 목덜미를 붙잡은 그가 우두둑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 비틀어 꺾었다.

    “하루 만에 사람이 이렇게도 변하나? 아. 하루도 아닌가?”

    손을 더듬거린 그가 제 손목시계를 신경질적으로 잡아채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24시간도 안 지났으니 하루도 아닌 거네요.”

    8억짜리 시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바닥으로 내팽개친 무경의 까만 시선이 요원의 위로 불시에 뚝 떨어진다.

    “그러니 이유를 말해요, 채 순경.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

    “납득이 되면. 내가 깔끔하게 떨어져 나가 줄게. 아주 신사답게 점잖게 하하 웃으면서.”

    “…….”

    “말해요. 내가 왜 갑자기 싫어진 건지.”

    “…….”

    “내가 왜 싫어졌어?”

    남자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유가 없단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는 내 앞에서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경험상,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하나도 없거든요. 특히 인간관계에선 더더욱 그렇습니다.”

    무경의 검지가 요원의 코끝을 툭툭 두드렸고 요원은 반사적으로 코끝을 찡그렸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여자의 그런 얼굴이 깜찍해 죽겠는 무경은 정말 미친놈이 맞았다.

    “…….”

    요원에게서 꽤 오랜 시간, 그 어떠한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무경은 찡그려진 제 눈썹 앞머리를 긁적이며 적나라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지금 어려운 질문한 거 아닌데요.”

    “…….”

    “나는 말이에요. 나 싫다는 여자한테 질척거리고 그런 놈 아니에요. 그러니 편하게 말해도 돼.”

    그러시겠지. 당신이 누구신데.

    그 유명한 동녘 그룹의 막내 아드님이 아니신가.

    포털에 ‘동녘’을 검색하면 나오는 기사는 죄다 이렇다.

    「동녘 그룹, 사상 최대 영업이익 달성!」

    「동녘 그룹, 영업이익 6000억 넘겼다!」

    「동녘 家 자제들의 살벌한 신경전!」

    「동녘 그룹 지배구조 변화 움직임 포착!」

    「동녘 家 하 해경 회장, 누구의 손 들어줄까?」

    그런 기사들을 볼 때마다 늘 무감했다. 이해도 잘되지 않았을뿐더러 무엇보다 현실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관심조차 없었다. 어차피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따위.

    그런데 왜 하필이면 당신이.

    왜 당신은, 내가 알던 그 하무경이 아니란 말인가.

    “대체 왜. 내가 왜 갑자기 싫어졌어요? 적어도 이유 하나 정돈 알려줘야지. 그래야 내가 납득을 하지 않겠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내 밑에서 좋아죽던 여자가 24시간도 채 안 지나서 나를 성범죄자 취급하면서 싫다고 하는데 그 어떤 남자 새끼가 아, 예, 그러시군요, 제가 싫어지셨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꺼져드릴게요, 하고 깔끔하게 물러나요. 안 그래요?”

    “…….”

    “채 순경도 머리라는 게 있으면 상식적으로 생각이라는 걸 한번 해보란 말이야.”

    무경은 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고 요원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 하지 않았다.

    너 동녘 그룹 막내아들이라며? 대놓고 묻고 싶은 걸 겨우겨우 참아낸다.

    당신이 우리 마을에 침범한 이유를, 나는 꼭 알아야겠거든.

    진실이 뭔지. 동녘 그룹과 연관된 건지.

    그녀의 침묵에 지친 무경이 피로한 눈꺼풀을 닫고 후, 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채 순경. 봐요.”

    남자가 다시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오늘따라 유독 뱀처럼 가느다래진 눈매가 드러났다.

    영상에서 보았던 하태경과 하가경의 카리스마 넘치던 날카로운 눈빛이 뇌리를 스치던 순간이었다.

    정말 닮았구나. 말로만 듣던 동녘 그룹의 삼 남매는.

    셋이 찍은 사진 하나가 돌아다니질 않아 난 정말 까맣게 몰랐지.

    “나 좀 봐봐.”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있는 요원의 눈앞에서 무경이 엄지와 중지를 맞물려 딱, 하고 큰 소리를 냈다.

    “네가 봐도 이상하지 않아요? 아까부터 단 한마디도 못 하고 있잖아.”

    “…….”

    “보통 판을 깔아줬는데도 말을 못 하는 데엔 두 가지가 있죠. 정리가 필요할 만큼 할 말이 아주 많다거나 할 말이 하나도 없다거나. 채 순경은 어느 쪽입니까?”

    둘 다 아니다.

    당신에게 할 말은 모두 다 정해져 있으나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을 뿐이다.

    난 당신이 능력이 없어도 좋아했을 것이다. 평생 백수여도 좋아했을 것이다. 돈을 못 벌어도 좋아했을 것이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도 좋아했을 것이다.

    난 당신이 이유 없이 좋았으니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당신과 내가 더 깊어졌을 때, 어쩌면 내가 당신 손에 반지를 끼워주며 내가 당신을 평생 먹여 살리겠다 프러포즈했을 수도 있겠다.

    난 정말 당신이 그 정도로, 아무런 이유 없이 좋았으니까.

    그러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당신은, 내 눈앞의 남자는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더는 아니었다.

    내가 알던 그 ‘진솔한 백수 하무경’은 내 앞에 더는 없다.

    눈앞의 남자는 그저, 내 앞의 당신은 그저.

    사람을 아주 쉽게 속이고, 매사에 거짓을 일삼고, 진정성 따윈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천하의 개자식이자, 살면서 단 한 번도 스치기 힘든,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고고한 수준의 재벌가 양반일 뿐.

    당신이 우리 마을에 온 이유가, 당신의 그 복잡한 머릿속을 식히기 위해 잠시 휴식차 온 것이라면.

    단지 그 이유라면 나는, 어쩌면 당신을 어느 정도 이해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삶이 얼마나 힘든지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헤아릴 순 있을 것 같으니.

    그러나 만약, 당신이 다른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우리 마을에 온 것이라면 나는.

    백야마을을 지켜야 하는 순경으로서 나는.

    대한민국의 순경으로서 나는.

    사회적 도의와 책임을 느껴야 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인인 당신을.

    당신을……. 그땐 어쩌면 좋을까.

    요원의 대답을 한참을 더 기다리던 무경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한번 저었다.

    “이렇게 있으면서 가만 생각이라는 걸 해보니 말이에요. 이유는 들어 또 뭐 할까 싶네.”

    한숨과 함께 그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요원을 누르고 있던 묵직한 무게도 함께 멀어졌다.

    “어차피 싫다는데.”

    던져뒀던 시계와 재킷과 갈색 봉투를 차례대로 잡아챈 남자가, 굳게 닫힌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문고리를 잡아 막 문을 열어젖히려는데, 요원이 자신을 잡지 않는다. 솔직히 잡을 줄 알았는데.

    이게 대체 무슨 개 같은 경우야.

    단 한 번도 이런 꼴을 당해본 적 없기에 이 상황이 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존나 어이없네. 어제까진 분명 날 좋아했던 것 같은데.

    무경이 재미있다는 듯 킥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다시 한번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실어 문을 열려는데, 이 망할 놈의 손은 대체 왜 문을 열지 않는가.

    나가. 나가라고. 나가, 이 등신 같은 새끼야!

    머릿속에서 이성이란 놈이 그렇게 소리친다.

    그래. 맞다. 나는 당장 미련 없이 나가는 게 맞다.

    하무경이 싫다는 여자 따위 붙잡아 뭐하나. 어차피 내 눈짓 하나면 넘어올 여자들은 이미 차고도 넘치는데.

    하무경의 자존심에 엄청난 스크래치가 간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무경이 싫다는 여자는 난생처음이었으니. 그것도 이렇다 할 이유 하나 없이.

    자존심에 스크래치만 갔으면 다행이지.

    무경은, 견고하게 쌓아 올린 마음속 건물이 와르르 한꺼번에 붕괴되는 기분을 생전 처음으로 경험했다.

    이런 게 바로 실연의 고통인가 싶고.

    만약, 이런 것이 실연의 고통이라면.

    다신 겪고 싶지 않기도 했다.

    마치, 덧난 상처 위에 휘발유를 들이붓는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불을 붙이는 것 같은 그 끔찍한 고통을 말이다.

    방금 자신은 그 정도로 아픈 실연을 당했는데.

    저 여자는 자신을 잡아주지도 않는다.

    사람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검은 재규어라 불리는 이 하무경을.

    저 난다 긴다 하는 형, 누나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이 하무경을.

    저 시골 순경이. 저 여자가. 네가 감히 나를.

    너무 화가 나서 이런 비겁한 생각도 잠시 했던 것 같다.

    그래. 당장 여기에서 나가자.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나가서 처음 계획했던 대로 백야마을 밀어버리면 그만이야.

    아주 싹 다 밀어버릴 거야.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아주 잔인하게, 그렇게.

    네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려서 한 번만 봐 달라고, 우리 마을 제발 살려달라고, 너 내게 애원해도 나는 절대 물러나지 않을 거다.

    그리고 나는 동녘을 먹을 거야. 완전한 해피 엔딩을 꿈꿀 거다.

    그런데 나는 대체 왜…….

    “너.”

    지금 왜…….

    “나 안 잡아?”

    대체 왜…….

    “왜 안 잡아?”

    한 손에 쥐고 있던 슈트 재킷과 시계, 봉투를 죄다 옆으로 집어 던지면서.

    “야. 채요원 순경.”

    그렇게, 이불 위에 앉아있는 너에게로 성큼성큼 다시 다가가나.

    “잡아.”

    그리고 왜 또 나는 너에게,

    “나 잡아줘.”

    간절하게 손을 내미나.

    “응?”

    구걸하듯 그렇게, 애처롭게.

    아……. 이성이란 놈이 머릿속에서 나직이 탄식하며 내게 말한다.

    나가 뒈져라, 이 찌질한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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