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67화 (67/116)
  • 67화. 내가 그렇게 못해?

    무경은 요원의 집 대청마루 위에 다리를 넓게 벌리고 앉아 갑순이 타준 꿀물을 마시는 중이었다.

    단 네 번 만에 한 잔을 비운 그가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거칠게 문질러 닦으면서 제 곁으로 다가온 갑순에게 빈 그릇을 습관처럼 한 손으로 내밀었다.

    “이건 또 어서 배워 먹은 버르장머리여!”

    물론, 갑순에게 뒤통수를 한 대 퍽, 세게 후려 맞았지만.

    “아.”

    그 힘에 고개가 앞으로 뚝 떨어진 무경이 눈썹을 사납게 찡그렸다.

    “제발 적당히 좀…….”

    비틀거리며 앉아있는 무경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갑순이 혀를 끌끌 차며 물었다.

    “한 잔 더 주리?”

    “그러시든지요.”

    무경의 오만방자한 대답에 갑순이 코웃음 쳤다.

    “아따, 시부럴 놈이 참말로 염치도 없네잉.”

    갑순은 구시렁거리면서도 주방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허허. 하무경 씨. 내일 과수원엔 나올 수 있겠소?”

    대청마루 위에 뒷짐 지고 선 채 무경을 지켜보고 있던 일섭이, 앉은 채로 중심을 잡지 못하는 무경에게 다가와 인자한 얼굴로 물었다.

    “늦지 않게 가야죠…….”

    한숨처럼 대답한 무경은 떨어진 고개를 계속해서 들지 않았다.

    “후우…….”

    미동도 하지 않는 그가 중간중간, 한숨을 커다랗게 푹 내쉬는 모습을 보고 일섭이 그의 넓은 등 위에 손을 얹었다.

    “하무경 씨.”

    그 손으로 무경을 위로하듯 툭툭, 두드리면서 별것 아닌 한마디를 던졌다.

    “오늘 하루도 애 많이 썼소.”

    무경은 잠시 숨을 고르며 두 눈을 감았다.

    저 깊은 심해로 빠져드는 것 같은 무력한 이 순간.

    그 심해 속에서 갈 길을 잃고 허우적거리며 제대로 호흡도 못 하여 괴로운 이 순간.

    “하무경 씨.”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무경의 무겁던 눈꺼풀이 서서히 밀려 올라갔다.

    눈을 떴다. 다시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세요.”

    고개를 서서히 들어 올린 무경이 제 시야에 꽉 들어찬 여자를 가만 바라봤다.

    “지금 하무경 씨는 저희에게 굉장한 실례를 범하고 있는 거예요.”

    좋아 미치겠는 나의 그녀, 채요원 순경을.

    “농사짓는 시골 사람들은요. 서울 사람들과는 달리 대부분 일찍 하루를 마무리해요. 그만큼 하루를 일찍 시작해야 하니까요. 하무경 씨는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고 시골로 내려오셨나요?”

    여전히 제게 묘하게 선을 긋는 듯한 여자의 차가운 태도가 하무경의 가슴에 강한 비수를 박는다.

    하, 허탈한 얼굴로 실소한 무경이 눈매를 가늘게 찡그리며 이마를 짚었다.

    “넌 대체…….”

    후, 하는 한숨과 함께 다시 고개를 아래로 푹 떨어트리기도 한다.

    “뭐가 불만이야…….”

    나직이 불평하며, 제발 붙잡아달라는 듯 요원을 향해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뻗은 무경이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물었다.

    “내가 그렇게 못해……? 내가……?”

    감정에도 액셀과 브레이크가 존재한다면.

    무경은 액셀을. 요원은 브레이크를 밟고 아예 멈춰 선 상황.

    그 말인즉슨, 앞으로 두 사람에겐 충돌만이 남았단 뜻이었다.

    ***

    ‘넌 대체…… 뭐가 불만이야…… 내가 그렇게 못해……? 내가……?”

    무경은 그 마지막 말을 이후로 필름이 반은 끊긴 듯 보였다.

    대청마루 위에서 삐끗거리며 중심을 잃고 옆으로 넘어가려는 것을 요원이 재빨리 붙잡아 망정이었지, 하마터면 이 귀하신 몸에 흠집이라도 날 뻔한 아찔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아이고, 저 오사랄 놈. 아주 지랄 염병을 하고 자빠졌네.”

    갑순은 혀를 끌끌 차면서도 손님 방에 요를 잘 깔았다.

    여기에 재우라는 갑순의 말에 일섭은 허허, 웃으며 비틀거리는 무경을 그 요 위에 잘 눕혔다.

    “엄니. 요즘 젊은 사람들 참 힘들어요잉?”

    “원래 다 힘든 거시다.”

    “근데 인물이 참말로 훤하긴 하네요잉.”

    “이잉. 백수 총각이 얼굴이라도 반반해야 먹고 살제.”

    “두 분은.”

    눈 감은 무경의 반듯한 얼굴을 흡족한 표정으로 뒷짐 진 채 내려다보고 있던 두 사람 사이로 요원이 끼어들었다.

    “먼저 들어가 주무세요. 여긴 제가 마저 정리하고 들어갈게요.”

    “이잉. 요원이 니도 어여 가 자라잉.”

    갑순과 일섭이 문을 닫고 나갔고, 문이 닫히자마자 무게감이 상당한 적막이 안개처럼 방 안에 자욱하게 깔렸다.

    “…….”

    잠에 빠진 듯 보이는 무경에게로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 요원이 그를 비딱하게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인상을 팍 찡그린 남자는 가슴이 갑갑한지 셔츠 윗단추를 탁탁 풀어 내리다가 후우, 하는 까칠한 한숨과 함께 손을 다시 이불 위로 툭 떨어트린다.

    그러다가 그 손이 다시 느릿하게 올라와 제 손목에 채워진 손목시계를 잘그락 풀어 성의 없이 바닥 위로 내던진다.

    요원은 그 모습에 기가 다 막혔다.

    고고하신 재벌가 양반들은 다 이렇구나.

    이 집의 몇 배나 되는 8억짜리 시계를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8천 원짜리 대하듯 막.

    나라면 누가 훔쳐 가진 않을까 불안해서 매일 밤 애지중지 끌어안고 잘 것 같은데.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참아 누른 요원이, 그가 눕기 전 바닥 위에 대충 집어 던졌던 슈트 재킷을 옷걸이에 걸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남자의 짙은 향수 냄새와 담배 냄새가 오묘하게 섞여 밴 슈트 재킷을 집어 들었는데, 재킷 밑에 숨어있던 갈색 봉투가 툭 소리와 함께 요원의 발밑으로 떨어졌다.

    요원이 손을 뻗어 그 갈색 봉투를 손에 쥐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 봉투를 벌리던 때였다.

    “!”

    요원의 손목이 홱 급하게 당겨짐과 동시에.

    쿠당!

    저 멀리 나가떨어진 갈색 봉투처럼 요원의 몸이 바닥 위에 내동댕이치듯 눕혀진 건 아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무경 씨?”

    “하…….”

    기골이 장대한 188㎝의 남자가 자신을 한방에 밑에 깔아 머리를 쓸어올리는 여유로운 동작을 취하고 있는 장면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진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여기 우리 집이에요. 정신 차리고 얼른 내려오세요.”

    “나 아직 대답 못 들었는데요.”

    발음이 아주 정확하다. 둘만 남게 되는 이 상황을 위해 지금껏 취한 연기를 했나 싶을 정도로. 또 거짓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런 거라면 이 남자는, 배우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며 남을 속이는 데에 아주 특출난 재능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제가 무슨 대답을 드려야 하죠?”

    “물었잖아. 내가 채 순경 기준에서 그렇게 못하느냐고.”

    “그러니까 뭘요.”

    “뭐겠어요, 채 순경.”

    남자가 허리를 굽히자 술 냄새보다 더 진한 향수 냄새가 훅, 하고 요원을 덮쳤다.

    “섹스밖에 더 있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린 그가 요원의 귓불을 간질이듯 살짝 깨물었다.

    아, 요원이 그에 반응하듯 몸을 움찔 떨었고 여자의 움직임에 무경의 눈동자는 한층 더 짙은 이채를 품었다.

    “대답해. 내가 못해?”

    제 위를 딱 지키고 있는 무경을 빤히 올려다보며 요원은 생각했다.

    재벌이나 서민이나 남자란 종족은 죄다 똑같이 단순하다고.

    “못하냐고.”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면 남자는 끝까지 자신을 괴롭힐 심산으로 보여, 요원은 한숨과 함께 그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잘해요. 됐죠.”

    말을 끝냄과 동시에 무경의 어깨를 밀친 요원이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요원은 대화를 중단하고 싶어 한 행동이었으나 잘못된 선택이었다.

    사슴처럼 길고도 매끈한 목덜미가 남자의 시각을 더욱 자극하기만 하였으니.

    “원하는 답 들으셨으면 이제 그만 내려오지 그래요?”

    여자들은 모를 것이다. 자신들은 갖지 못한 여자의 고운 선에 남자들이 얼마나 환장을 하는지.

    “안 들려요? 이제 그만 내 위에서 내려오,!”

    “응. 안 들려.”

    요원이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튼 순간에 읍, 요원의 뒷말은 순식간에 집어 삼켜졌다.

    그것도 남자의 입안에서. 남김없이, 싹.

    반사적으로 입을 꽉 다무는 요원의 하관을 잡아 벌린 무경이 그녀의 입안으로 제 혀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흐읍…….”

    그의 어깨를 뒤로 퍽퍽 몇 번이나 밀쳐보았지만, 작정하고 덤벼드는 자신보다 몇 배나 더 큰 남자가 쉽게 밀려날 리 없다.

    무경은, 자꾸만 저를 밀어내는 요원의 손이 아주 신경 쓰인다는 듯이 한 손으로 그녀의 두 손목을 가뿐하게 결박시켜 단숨에 위로 끌어올렸다.

    “으읍.”

    그와의 키스는 자극적이었지만 절대 위협적이진 않았다.

    그랬는데, 오늘따라 무지막지한 기세로 달려드는 남자의 존재감이 워낙 월등해서 난폭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이후라 더 낯선 기분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요원이 고개를 옆으로 틀어 그와의 키스를 피하면, 그는 재빠르게 요원의 턱을 다시 잡아당겨 맹렬하게 키스했다.

    제 입안을 유영하는 그의 혀가 오늘따라 자신을 농락하는 기분에 요원은 이 순간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남자는 정말 키스를 잘했고, 그와의 행위는 늘 저에게 색다름과 황홀함만을 선사했었는데.

    오늘은 정말이지, 견딜 수 없을 만큼…….

    “하아, 싫다고!”

    고개를 다시 옆으로 홱 비튼 요원이 거친 숨을 헐떡이며 거부감을 내비쳤다.

    “적당히 해요. 정말, 싫으니까.”

    제 젖은 입술을 엄지로 슥 문질러 닦은 무경이 호선을 그린 입술로 묻는다.

    “뭐가요. 주어를 정확하게 해야 알지.”

    요원의 하관을 붙잡아 다시 정면으로 돌린 무경이 제 고개를 사선으로 비스듬히 틀어 요원의 작은 입술을 농밀하게 집어삼키려던 때였다.

    “하무경 씨가요.”

    막 요원의 아랫입술을 깨물려던 무경의 입술이 더는 다가오지 않고 그 자리에서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는다.

    “그러니 그만하고 내려오시죠.”

    요원이 제 위에 있는 무경을 차가운 눈동자로 조이면서.

    “마지막 경고입니다.”

    평소보다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상대와 협의되지 않은 관계는 추행이자 폭행일 뿐이니까. 잘 아시는 분이 그러세요.”

    “추…… 뭐?”

    무경이 제 귀를 의심하는 듯한 얼굴로 한쪽 귀를 사납게 문지르며 되물었다.

    “방금 너 뭐라고 했어. 추행?”

    어둠 속에서 요원의 적갈색 눈동자는 더는 갈색이지 않았다.

    검은빛이 발화된 눈동자를 남자에게 여전히 똑바로 고정한 채 요원은 말했다.

    “그래.”

    아주 또박또박.

    “추행.”

    그의 귀에 때려 박듯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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