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66화 (66/116)
  • 66화. 모두 다 꽃이야

    딸랑.

    팔각정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일요일 저녁 시간의 팔각정은 제법 한산했다.

    “옴마, 하무경 씨 왓소? 아따 오늘 먼 일로 그라고 차려입엇소?”

    멀끔하다 못해 귀티가 줄줄 흐르는 슈트 차림의 무경이 잠시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팔각정 내를 가늠하는 시선으로 휘이 둘러봤다.

    테이블을 차지한 손님은 단 두 명, 백야마을 주민은 아니다.

    스캔을 끝마친 무경이 카운터 앞에 앉아있는 팔각정 사장에게로 뚜벅뚜벅, 곧은 걸음으로 걸어가 그에게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아, 예. 예에, 하무경 씨도 안녕하시지라?”

    오늘따라 유독 범접할 수 없는 모습에 팔각정 사장도 덩달아 자리에서 함께 일어나 무경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무경입니다.”

    “이잉. 알지라. 내가 하무경 씨를 모를까라? 머슬 새삼시럽게 그런다요?”

    “모릅니다, 사장님은.”

    슈트 재킷 주머니 안쪽에서 명함 지갑을 꺼낸 무경이 명함 한 장을 잡아채 팔각정 사장에게로 건넸다.

    “전 이런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보통 때라면, 중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 상대방에게 비스듬하게 건넸을 명함을, 지금만큼은 정중한 자세로 건넸다.

    “옴마야, 하무경 씨. 취직했소? 참말로 축하하요잉!”

    명함을 받으면서 팔각정 사장이 방긋 웃었다.

    “내가 요리를 서비스로다가 고냥!”

    제 일처럼 기뻐하며 명함으로 시선을 내린 팔각정 사장의 눈이 휘둥그레 벌어진 건, 명함에 새겨진 글자를 본 그 순간이었다.

    「동녘그룹 ┃사업 총괄 본부장 ┃하무경 상무」

    화들짝 놀란 얼굴을 들어 올린 팔각정 사장이 눈앞의 무경을 당황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무경 씨. 이게 시방 머시다요?”

    “사장님.”

    허리춤에 끼우고 있던 갈색 봉투를 손에 비스듬하게 쥔 무경이.

    “빼갈이 뭔지는 이제 잘 아실 테고.”

    팔각정 사장을 평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압살하며.

    “저와 한잔하며 단둘이 얘기 좀 나누시죠?”

    서울의 네온사인처럼 화려하게 웃었다.

    ***

    백야마을에 깊은 밤이 찾아왔다.

    무경은 전봇대 하나 없는 어두운 시골길을 거닐었다. 정확히는 도로 옆길을 걸었다.

    팔각정 사장과 정확히 고량주 세 병을 비운 무경은, 운전을 할 수도 없고 대리를 부를 수 있는 상황도 아닌지라, 팔각정 앞에 포터를 세워두고 대신 멀쩡한 두 다리로 걷는 것을 택했다.

    평소엔 곧았던 그의 걸음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바람에 흔들리는 그네처럼 그렇게 흔들렸다.

    중간중간 멈춰 서서 크게 한번 숨을 내쉬었던 무경이 다시,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며 길을 거닌다.

    “아니 씨발, 뭐가 이렇게 앞이 하나도 안 보여…….”

    무경의 손엔 슈트 재킷과 구겨진 갈색 봉투가 아슬아슬하게 쥐어져 있었는데, 그 갈색 봉투 안에 들어있는 것은 바로, 팔각정 사장과의 합의서였다.

    “여기 군수 누구야, 군수…….”

    길을 걷다 말고 다시 제자리에 멈춰 선 무경이 눈매를 잔뜩 좁히며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후우…….”

    술 냄새가 옅게 배 있는 한숨을 짙게 내쉰 그가, 핸드폰 액정을 몇 번 터치한 뒤에 제 귓가에 핸드폰을 바짝 붙였다.

    “하…….”

    찡그린 눈매를 풀지 않은 무경이 슈트 재킷과 갈색 봉투를 바닥 위에 툭, 대충 내던지면서 흘러 내려온 머리칼을 대강 한번 쓸어올렸다.

    뚜우. 뚜우. 뚜우.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상대가 통화 버튼을 눌렀음이 느껴진다.

    [상무님. 전화 받았습니다.]

    “여기…… 군수가 누구죠?”

    [예? 군수요?]

    “앞이 하나도 보이질 않잖아. 지금 내 눈앞이 아주 새카맣잖아. 전봇대를 세워줘야지. 그래야 보이지. 이러니까 씨발, 뺑소니가 일어나는 거지. 안 그래요?”

    자신은 또박또박 말한다 생각하였으나, 상대가 듣기엔 술에 거나하게 취해 혀가 잔뜩 꼬부라진 부정확한 발음이었으리라.

    [상무님. 혹시 술 드셨습니까?]

    “좀 마셨는데요. 왜요. 안 됩니까?”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내가 괜히 마셨겠습니까. 합의서 받으려고 마신 거지. 일한 거라고, 나.”

    [합의서를 드디어 받으셨습니까?]

    “아직은 한 가구지만요. 네. 첫 시작이 좋네요.”

    [회장님께서 무척이나 기뻐하실 겁니다.]

    “당연히 그러시겠죠…….”

    뒷말을 흐린 무경이 그대로 바닥 위에 지친 몸을 풀썩, 앉혔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세워진 다리 사이로 고개를 푹 떨어트린 무경의 잇새에선 자꾸만 실없는 웃음이 실실 흘렀다.

    “……차태호 실장님.”

    [예, 상무님. 듣고 있습니다.]

    “내가…….”

    땅바닥을 내려다보는 무경의 눈꺼풀이 자꾸만 무겁게 내려앉았다.

    “내가 말이에요…….”

    금방이라도 잠이 들 듯한 그의 손엔, 핸드폰이 떨어질 듯 위태롭게 들려있었다.

    “내가…….”

    [예.]

    “그렇게 못하나?”

    [예?]

    “나…… 잘하거든요. 차 실장님도 잘 아실 거 아니에요.”

    아, 연달아 작게 탄식한 무경이 제 이마를 문지르며 킥, 짓궂게 웃었다.

    “차 실장님은 모르시겠구나.”

    술에 취한 그는 확실히 웃음이 헤펐다.

    “나랑 해본 적 없잖아요.”

    [상무님. 술을 대체 얼마나 드신 겁니까.]

    “적당히 마셨습니다. 딱 기분 좋을 정도로만.”

    거짓말이다. 이미 주량을 넘어서 속이 다 울렁거려 기분이 아주 더러울 정도였으니.

    그대로 길바닥에 철퍼덕, 드러누운 무경이 하늘을 가만 바라보았다.

    취한 와중에도 머리칼에 흙이 묻는 것은 또 싫었던지, 무경은 자신의 재킷 위에 머리를 받치고 누운 상태였다.

    “차 실장님.”

    [예, 상무님.]

    까만 밤하늘 위에 수놓아진 별을 바라보던 무경이 내일 아침이면 분명 수치사 할지도 모를 법한 질문을 스스럼없이 던졌다.

    “사랑, 혹시 해봤어요?”

    태호에게선 잠시 말이 없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리는 것을 보니 적잖게 당황한 눈치였다.

    [제가…… 결혼을 했잖습니까, 상무님.]

    “네. 하셨죠.”

    [사랑을 해서 한…… 결혼이거든요, 그게.]

    “아. 아아. 그래. 맞다. 내 정신 좀 봐.”

    동그랗게 말아쥔 주먹으로 제 이마 위를 콩콩, 때린 무경이 소년처럼 눈을 휘어 또 한 번 싱그럽게 웃었다.

    “미안합니다. 내가 요즘 자꾸 이러네.”

    [아닙니다.]

    태호는 무경을 이해했다.

    무경이 사는 세계에선 정략이 기본이고, 정략이란 고로 사업체 간의 시너지를 위해 하는 것이니.

    그런 결혼에서 사랑까지 바라는 것은 사치이며 그런 관계에 익숙한 자들이 사랑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생각했으니.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궁금하신 겁니까?]

    “미치겠어서요.”

    [예?]

    “좋아서요.”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싹 가신 남자의 얼굴에…….

    “그래서요.”

    다시 미약한 미소가 달빛처럼 아름답게 번졌다.

    ***

    방 한편에 앉은 요원은 벽에 등을 기댄 채 동녘 그룹을 검색해보는 중이었다.

    백화점 전국 20개 운영, 대형 마트 전국 170개, 아웃렛 전국 15개, 편의점 점포만 해도 2000여 개.

    굉장하네.

    헛웃음 치며 잠시 벽에 머리를 기댄 요원은 땅거미가 짙게 깔린 창밖을 응시했다.

    유통업계를 평정하고 있는 동녘 그룹을 모르진 않으나, 이렇게 데이터를 놓고 보니 정말 대단한 기업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해당 그룹의 막내 아드님께선 또 어떻고.

    그런 굉장한 집안의 자제님께서 나 같은 시골 순경의 비위를 맞춰주시느라 그간 얼마나 힘드셨을까.

    어둠에 잠식된 세상을 바라보면서 남자의 가라앉았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글쎄요. 그냥 무서워요. 그냥.’

    제 가족이 무섭다고 했던 그 마음은 진심 어린 속내였을까, 아니면 그 또한 거짓이었을까.

    인간적으로 보이기 위한 속임수였을까?

    ‘채 순경은 차라리 배우를 해보지 그랬어요. 아니면 광고 모델이나.’

    당신이나 해보지 그랬어, 배우.

    연기 정말 잘하던데.

    나는 그날 밤, 당신이 정말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거든.

    요원의 다물렸던 잇새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 입술을 손등으로 꾹 막으면서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자꾸만 흐르는 웃음을 도저히 막을 길이 없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요원은 이제 이어폰을 두 귀에 꽂았다.

    그가 무서워 견딜 수 없다던, 그의 가족이자 형제인 동녘 그룹의 부사장 하태경과 동녘 그룹의 전무 하가경의 영상을 보기 위해서다.

    하태경 부사장의 영상은, 반듯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그가 한 대학 강연장에서 경제학과 학생들에게 지식을 나눠주는 장면이었는데, 입은 웃고 있으나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 깊었고.

    하가경 전무의 영상은, 동녘 그룹 신년행사에 하 회장과 손을 꼭 잡고 등장하는 장면이었는데, 짙은 스모키 화장에 올 검은 슈트를 빼입은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 특히 인상 깊었다.

    요원이 영상을 보고 느낀 점은 단 두 가지였다.

    닮았구나, 세 사람.

    특히,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인 분위기가.

    무서울 만도 하구나.

    만약, 제 앞에 이 두 사람이 있었더라면 자신은 말 한마디조차 건넬 수 없었을 것 같으니.

    사실, 하무경이란 남자도 매한가지 아닌가.

    하천에서 그를 처음 만났던 그 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던 남자를.

    백야마을이 아니었더라면, 어디 말이나 걸 수 있었을까?

    “아야.”

    덜컥, 방문이 갑자기 열려 요원이 움찔거리며 귓가에 꽂힌 이어폰을 얼른 잡아 빼냈다.

    “할머니. 노크 좀요!”

    “지가 못 들어놓고 지랄이여.”

    “왜 그러시는데요.”

    “잔 나와봐야?”

    요원이 피로한 눈가를 쓸면서 한숨과도 비슷한 음성으로 말했다.

    “급한 거 아니면 내일 하면 안 돼요? 제가 오늘 좀 피곤해서요.”

    “백수 총각이 왓다 안 하냐. 기냥 온 것도 아니고 아주 술이 떡이 되어 갖고 왔다 안 하냐잉.”

    갑순의 입에서 나온 백수 총각이란 호칭에.

    “하무경 씨가요?”

    요원의 얼굴에 혼란이 찾아온 것도 잠시.

    “…….”

    곧 그녀의 얼굴엔 겨울바람 같은 싸늘함이 피었다.

    여자의 차디찬 얼굴과는 달리, 바깥세상은 모두 다 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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