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65화 (65/116)
  • 65화. 거짓말의 거짓말의 거짓말의 거짓말의 거짓말

    민수와 아무렇지 않은 척 식사를 하고 헤어진 요원은 별빛다방에 앉아 무경을 기다렸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해가 길어졌는지, 저녁 6시가 조금 지나 있었지만, 창밖은 여전히 밝았다.

    의도와는 달리 손끝이 자꾸만 바르르 떨렸다.

    숨겨야 한다. 감정도 표정도 모두 다.

    내가 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남자가 절대로 먼저 알게 해선 안 된다.

    그가 마을에 들어온 정확한 이유를 내가 직접 알아내기 전까진.

    찻잔을 쥔 손에 힘을 꽉 주니, 그제야 떨림이 덜 보였다.

    딸랑.

    “어서 오세요?”

    요원은 입구를 등지고 앉아있었기에 소리만 들을 수 있었는데, 다방 내에 넓게 퍼지는 남자의 향기가, 뚜벅뚜벅 올곧은 발걸음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어 작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벌써 이렇게나 가까워졌나.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남자를 느낄 수 있을 만큼.

    남자가 제 앞에 앉기 전, 요원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리를 깨끗하게 비우려 노력했다.

    자신이 기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계는 리셋 버튼 하나만 누르면 그만일 테니.

    나는 앞으로 머릿속도, 상대를 바라보는 시각도, 상대를 향했던 감정도, 아주 깨끗하게 비워낼 것이다.

    다시 0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되짚어볼 거야.

    쓸데없는 감정을 모두 배제하고 상대를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처음부터 보는 거다.

    더 깊어지기 전에 알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여기에서 더 깊어졌더라면, 그 감정의 깊이에 이 분노가 우습게 잠식되었을지도 모르니.

    “오래 기다렸어요?”

    웃음기 밴 음성이 들려온 그제야 요원은 감고 있던 제 눈꺼풀을 서서히 밀어 올렸다.

    “뭐 마셔요. 오미자?”

    구김 하나 없는 빳빳한 스트라이프 셔츠에 네이비색의 슈트 바지를 받쳐입은 남자가 제 앞에 웃으며 앉는다.

    반듯하게 접어 올린 셔츠 소매 사이로 보이는 저 손목시계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하무경 씨가 차고 있는 그 모델이 8억짜리거든.’

    예전에 들었던 성준의 말이 수면 위로 떠 오르듯, 그렇게 또 요원의 머리를 스쳤다.

    ‘아 물론 하무경 씨 건 짭이지. 짭인데. 그 8억짜리 짭을 대체 어디서 구했냐고. 중국이라도 다녀왔나? 그게 참 수상하단 거지.’

    성준이 잘못 알고 있는 거다. 저 시계는 진짜다.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직접 물어봤잖아. 하무경 씨는 내가 알고 있는 그런 사람이 맞느냐고.

    맞다고 했잖아. 맞다고 해놓고. 어쩜 그렇게 뻔뻔하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내 눈을 보고 거짓말을.

    “새벽엔 언제 갔어요. 잠은 좀 잤어요?”

    질문하며 메뉴판을 넘겨보는 꼿꼿한 자태가, 음, 소리 내며 아래턱을 어루만지는 손짓이, 그의 표정, 동작, 자세, 이 소소한 모든 것들이 다시 보니 일반인과는 어딘가가 달라도 달랐다.

    마치, 작정하고 완벽하게 배워 몸에 제대로 익힌 사람처럼.

    “잠자리는 안 불편했어요? 피곤하진 않아요?”

    요원에게 계속해서 답이 없자 메뉴판에 가 있던 시선을 슬그머니 들어 올린 무경이 그녀를 가만 바라봤다.

    “채 순경.”

    요원은 아까부터 저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는데 그 표정이 평소와는 달라 고개가 다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이봐요, 채 순경.”

    테이블 위를 쿵쿵 두드리자 그제야 요원이 흠칫거리며 “네?”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잠은 좀 잤냐고.”

    “아, 네. 잤어요.”

    답을 들은 그제야 안심했던지 그가 다시 메뉴판으로 시선을 깔았다.

    “왜 그렇게 가요, 사람 서운하게. 연락도 한 통 없고. 가만 보면 채 순경도 참 냉정한 구석이 있다니까.”

    너만 하겠니.

    요원은 그 말을 속으로만 씹으면서 메뉴판을 넘겨보는 무경을 냉한 시선으로 응시하다가 애써 미소 지으며 그를 불렀다.

    “하무경 씨.”

    “네.”

    무경은 엄지와 중지를 딱딱 맞물리며 메뉴판을 정독하듯 보고 있었다.

    “백야에 왜 왔다고 했었죠?”

    “사정이 있어서요.”

    “그 사정이 뭐였죠?”

    “백수가 된 사정이랄까.”

    “저희 아버지껜 사업을 대차게 말아먹고 빚쟁이에 쫓겨 들어왔다고 하셨잖아요. 어느 게 맞아요?”

    허공에서 딱딱 소리를 내며 맞물리던 손가락이 불시에 멈췄다.

    메뉴판에 고정되어 있던 까만 시선이 서서히 올라와 요원을 쳐다본다.

    잠시 남자가 미간을 찡그렸다는 것을, 요원은 정확히 잡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표정 관리를 하듯이 눈썹을 가볍게 들었다 내리며 픽, 웃은 그가 다시 메뉴판으로 시선을 가져간다.

    “사업 말아먹고 백수가 됐으니까.”

    거짓말이다.

    “그런데 왜 사업하던 사람이 회사로 면접을 보러 다녀요?”

    “한번 말아먹어 보니 아, 난 사업엔 소질이 없구나, 해서요.”

    거짓말이며.

    “면접을 왜 굳이 여기에서 서울까지 왕복해요?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서울에 본가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서울에 원룸 하나 잡고 살면 더 수월하잖아요.”

    “서울에선 도망가는 족족 빚쟁이한테 다 걸리더라고.”

    또 거짓말이고.

    “그러다가 서울에 취직하면요? 어차피 서울에서 사셔야 할 텐데요.”

    “그땐 빚쟁이랑 협의를 봐야죠. 취직했으니 니들 돈 갚을 수 있다. 돈 받고 싶으면 직장에라도 다니게 날 좀 가만 놔둬라. 뭐, 이런 식으로?”

    다시 거짓말.

    “그리고 막상 있다 보니 백야마을이 좋아져서. 요즘은 서울보다 여기가 더 좋아요. 마음도 훨씬 편하고.”

    그리고, 거짓말.

    “아…….”

    요원이 탄식하며 소파에 몸을 털썩 묻어 앉았다.

    맥이 다 빠진 얼굴로. 상심한 눈빛으로.

    그랬구나.

    제대로 알고 다시 보니 그의 모든 것이 죄다 거짓말이었구나.

    거짓으로 똘똘 뭉쳐있는 사람이었구나, 하무경 씨는.

    그 어떠한 허술한 변명을 던져도, 그렇군요, 그랬군요, 미소 지으며 맞장구쳐주었던 내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얼마 되지 않는 음식값에 백수가 이렇게 돈을 많이 써도 되냐고 매사 걱정해주던 나를 보며 혼자 얼마나 웃었을까.

    얼마나 같잖았을까.

    대한민국에서 손꼽는 기업의 자제님께서.

    “…….”

    그를 바라보는 요원의 눈빛에 서릿발 같은 차디찬 기운이 점차 짙게 번져갔다.

    “하무경 씨.”

    “네.”

    “하무경 씨네, 돈 많아요?”

    메뉴판을 보는 듯 보지 않는 것 같은 그가 눈동자를 다시 치떠 요원을 빤히 쳐다봤다.

    “갑자기 무슨 질문이 그래.”

    남자는 어딘가 불쾌한 것도 같고 당황한 것도 같았다.

    “새벽에 그러셨잖아요. 뭐 갖고 싶은 거 없냐고. 말만 하라고. 다 사준다고. 다 준다고. 하무경 씨 거 다 가지라고. 제게 분명 그러셨잖아요.”

    “…….”

    “백수가 무슨 돈이 있나 싶었는데, 집이 꽤 잘사나 해서요. 전에 좋은 호텔에서 머무른 것도 그렇고. 그리고 그 시계요. 그거 비싼 거라고 들었거든요. 옷도 다 비싸 보이는데 차라리 그거 다 팔고 빚부터 갚으시면 어떨까요? 집이 잘살면 부모님께 손이라도 벌려 빚을 청산하시든지요. 왜요. 그건 또 쪽팔리나?”

    무경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의 청산유수인 요원을 함묵한 채 바라보며, 쥐고 있는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의미 없이 몇 번 문질렀다.

    그 손끝엔 어딘지 모를 갈급함이 배어있었다.

    “오늘은 맨정신에 세게 나오시네.”

    그러나, 지는 성격의 무경도 아니었기에 갈급한 손길은 금세 여유를 되찾아 메뉴판을 탁 덮는다.

    “왜요.”

    주문을 위해 한 손을 들어 올린 무경이 요원을 보며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뭐 갖고 싶은 거 생겼어요?”

    “말하면. 다 사주시는 거예요?”

    “말해 봐요.”

    다가온 다방 주인에게 인삼차를 주문하며 메뉴판을 넘긴 무경이 되물었다.

    “뭔데요.”

    주인이 떠나자마자 깍지 낀 손 위에 느른하게 턱을 괸 무경이 호선을 그린 입술로 또 묻는다.

    “우리 채 순경은 뭐가 갖고 싶은데요.”

    “서울에 집 한 채 사주실래요?”

    “집?”

    “그냥 집 말고요. 저희 머물렀던 호텔이요. 거기에 레지던스 있다면서요. 200억 좀 넘는다는 것 같던데.”

    때마침 냉수를 들이켜던 무경이 콜록, 갑자기 사레에 걸려 잔기침을 터트렸다.

    콜록, 콜록.

    제 가슴께를 문지르며 기침을 간신히 진정시킨 무경이 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요원을 잠시 황당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200억짜리 레지던스?”

    “네. 왜요? 안 돼요?”

    눈을 새침하게 치켜뜨고 묻는 요원의 낯선 모습에 무경의 머릿속에 새까만 암전이 찾아왔다.

    “다 사준다면서요. 이번에도 번지르르한 말뿐이었어요?”

    사줄 수 없어서가 아니다. 당연히 사줄 수 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부동산 중 몇 개를 떼줄 수도 있다. 명의 옮기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다만, 혼란스러울 뿐이다.

    팔각정에서 십만 원도 채 되지 않는 음식값을 내는 자신을 걱정하던 그 여자와 동일인물이 맞나 싶어서.

    무경의 어지러운 표정을 감상하듯 가만 바라보던 요원이 갑자기 푸흡, 하고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어딘지 모르게 비딱한 웃음 같기도?

    “죄송해요.”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오는 제 입가를 손등으로 꾹꾹 누른 그녀가 어딘지 모르게 날이 선 분위기로 말한다.

    “표정 푸세요. 농담이니까.”

    미소 짓고 있던 무경의 입꼬리 역시 서서히 밑으로 떨어져 일직선으로 차갑게 굳어졌다.

    서로를 가늠하는 두 사람의 주변으로 살벌한 겨울바람이 부는 착각마저 일었다.

    ***

    차 한잔을 금방 마신 요원은 급한 용무가 있다고 말하며 다방을 나갔다.

    그렇게, 요원과 허무하게 헤어진 무경은 팔각정 앞에 세워둔 제 포터의 핸들을 끌어안은 채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었다.

    ‘백야에 왜 왔다고 했었죠?’

    ‘하무경 씨네, 돈 많아요?’

    ‘다 사준다면서요. 이번에도 번지르르한 말뿐이었어요?’

    ‘표정 푸세요. 농담이니까.’

    뭐지. 반나절 만에 사람이 묘하게 변한 기분이 든단 말이야.

    아니. 묘하게 변한 게 아니지. 360도. 아니다. 360도는 원점이잖아. 180도 변한 기분이 들어.

    왜 갑자기 그런 것들이 궁금해졌을까?

    설마 나에 대해 무언가를 알아냈나?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대체 무슨 수로 알아낸단 말인가.

    그럼 뭐지. 뭘까?

    무경이 복잡한 표정으로 제 뒷머리를 느릿하게 문지르며 천천히 헝클어트렸다.

    생각해보니 잠자리만 가졌다 하면 사람이 좀 차가워진다 해야 할지. 뭐지. 나와 속궁합이 안 맞나? 그래서 나랑 섹스만 했다 하면 마음이 변하는 걸까?

    아니야. 그런 일은 있어서도 안 되고, 그건 정말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그걸 정말 잘하니까.

    자신만만한 얼굴로 룸미러를 쳐다본 무경이 제 셔츠 깃을 세우고 조수석에 던져두었던 네이비색의 넥타이를 목에 둘렀다.

    그러나, 시간이 째깍째깍 흐를수록.

    ‘잠깐.’

    넥타이를 매는 손짓은 점차 느려지고.

    ‘나 설마…….’

    이내 아예 멈춰 선다.

    ‘존나 못하나?’

    룸미러 속 무경의 검은 동공이 일순 당혹감을 드러내며, 절망적일 정도로 단순한 생각이 남자의 머릿속을 후벼판 것도 찰나였다.

    채 순경은 나와의 잠자리가 만족스럽지 않은 건가? 그럼 대체 어느 정도로 잘해야 만족을 줄 수 있나. 내가 만족스럽지 않은 거라면, 세상 대체 어느 남자가 저 여자를 만족시킬 수 있겠냔 말이다.

    아니지, 씨발. 다른 남자랑 있는 상상만 해도 존나 다 빡이 도네.

    미치겠네, 정말.

    평소에 절절한 사랑을 해봤어야 여자 마음을 알지?

    “하아.”

    넥타이를 반듯하게 맨 무경이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가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뒷머리를 다시 깔끔하게 매만졌다.

    그러고는, 조수석에 던져두었던 슈트 재킷과 의문의 갈색 봉투를 한꺼번에 잡아채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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