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동녘의 막내 아드님
[ ※ 추천곡 : 조윤정 – The beginning of Doubt ]
“저희 상무님, 신수가 아주 훤하죠?”
사진을 바라보는 요원에게선 단 한 치의 움직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내에 팬클럽도 있는 분이에요.”
눈 아래만 잘게 경련하지 않았더라면, 마네킹이라 해도 믿을 법한 얼굴로 요원은 그 사진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회장님이 예뻐 죽는 늦둥이예요. 형이랑 누나랑 나이 차가 상당히 많이 나거든요? 그런데 또 능력은 가장 출중해서 저희 모두는 하무경 상무님을 차세대 회장님으로 보고 있어요. 여러모로 대단한 분이죠. 그 대단한 형, 누나를 꺾었으니 말이에요.”
민수가 핸드폰을 거두어가려는데 그대로 뻗어진 요원의 손이 민수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믿을 수 없는 악력에 민수가 잠시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요원 씨?”
그 남자가 언젠가 내게 그랬던가.
‘우리 형, 누나는 말이에요. 내겐 남보다 못한 사람들이거든요.’
또 뭐라 했더라. 뭐라 했었지? 그 남자가 내게 뭐라 했었더라?
‘채 순경이 알고 있는 그 하무경은 어떤 사람인데요.’
요원의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백수여도 누구보다 자신감 하나는 충만한 사람이요. 그래서 더 있어 보이는 남자요. 언젠가 꼭 성공할 것만 같은 남자요.’
‘또.’
풀지 못하는 전선처럼 아주 엉망으로 꼬여버렸다.
‘표현은 비록 거칠어도 상대에 대한 배려심은 깊은 사람이요. 그래서 보기와는 다르게 사람을 진정성 있게 대해요. 누굴 속일 줄을 몰라요. 거짓말도 몰라요. 그런 진솔한 사람이에요, 제가 아는 하무경 씨는.’
평화롭던 풍경이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그런 사람이 맞는 거죠?’
‘…….’
‘하무경 씨. 맞아요?’
‘맞아요.’
누가 보아도 적나라하게 파르르 떨리는 요원의 손끝을, 새하얗게 탈색된 요원의 낯빛을, 민수와 성준이 모를 리 없었다.
“요원 씨?”
“채 순경. 너 괜찮아?”
그래. 분명 하무경 씨는, 내가 아는 그 하무경이 맞다고 했었다. 했었는데. 그랬는데.
그런데 왜…….
“이 사람이.”
요원이 나직이 침음하면서 민수의 손에 쥐어져 있는 핸드폰을 제 손안으로 천천히 가져왔다.
“동녘 그룹 하무경 상무라고요.”
“네? 네.”
몇 번 두 눈을 꽉 감았다가 뜨면서 그 액정 속 사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악몽에서 깨어나고 싶은 사람처럼, 두 눈을 질끈 감았던 요원이 그 눈을 다시 번쩍 떠서 액정 속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을 보는 그 눈동자가 이젠, 거대한 해일을 만난 작은 조각배인 양 거칠고 위태롭게 흔들렸다.
요원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다시 액정을 확인한다.
그 행동을 몇 번이고 반복하니 요원을 바라보는 민수와 성준도 함께 초조해졌다.
“야, 채 순경. 너 왜 그래, 인마? 슬슬 무서워지려 그런다.”
“요원 씨. 괜찮으세요? 사진에 뭐 문제라도 있어요?”
“대체 뭔데 그래?”
상체를 반쯤 들어 올린 성준이 요원이 보고 있는 액정을 함께 보려 하였으나, 삭제 버튼을 누르는 요원의 손이 더 빨랐다.
요원은 아예 사진첩의 휴지통으로 들어가 영구삭제 버튼을 눌러 성준이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잘 봤어요, 민수 씨.”
요원이 자리에서 갑자기 일어났는데, 그 거친 반동으로 인하여 그녀가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쿠당, 넘어갔다.
민수와 성준은 더더욱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요원을 동시에 올려다보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봤어요.”
요원은 그 핸드폰을 민수에게 건네며 묵례했다.
“예? 아, 아니요. 별것도 아닌데요, 뭐.”
그 핸드폰을 받아들면서 민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묻는다.
“요원 씨. 그런데 정말 괜찮으신 거죠? 안색이 갑자기 너무 안 좋아지셔서.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래요?”
“아니요.”
요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이에요.”
“아……. 네.”
“죄송한데요. 제가 갑자기 속이 좀 안 좋아서요. 잠시만, 바람을 좀…….”
말을 아무렇게나 흘린 요원이 테이블을 벗어나자마자 순간 비틀거렸다.
“어어! 요원 씨!”
“채 순경!”
놀라 벌떡 일어난 민수와 성준이 그녀를 부축하려 하였으나, 요원은 한 손을 갈급하게 들어 올려 그들의 행동을 저지했다.
“괜찮습니다. 금방 올게요. 먼저, 드시고, 계세요.”
숨을 잘게 끊어 내쉬기 시작한 요원이 팔각정 밖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쟤 왜 저래? 김민수. 너 채 순경한테 대체 무슨 사진을 보여준 거야?”
“예? 아, 아니, 저는, 저희 상무님 사진을 보여드린 것밖에 없는데요?”
“뭔데 그래? 대체 누군데 그래? 나도 좀 보자.”
“……어? 사진이…….”
“사진이?”
“지워졌는데요?”
팔각정 구석진 자리에 앉은 손님은, 요원이 나간 뒤에도 계속 소란을 만들어내는 두 남자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소리 없이 고량주를 비웠다.
그가 마지막 잔을 허공에서 단칼에 꺾어 마셨고. 탕! 고량주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둔 손님이 모자를 푹 눌러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산이요.”
지갑을 꺼내 카운터 앞에 멈춰 선 손님이 조금 전 요원이 열고 나간 문 쪽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는, 도현이었다.
***
팔각정 앞 벤치에 앉아 고개를 푹 떨어트리고 있는 요원에게선 마네킹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쌕쌕 내쉬는 거친 숨소리와는 달리, 놀라울 정도로 미동 하나 없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였다.
‘서울엔 왜 가세요? 면접 보러 가세요?’
‘면접을. 내가.’
‘지금 차림이 딱 그래서요.’
‘맞아요. 면접.’
매주 서울을 갔던 건…….
‘아버지는 나 백수 된 거 모르시거든요. 이 정도로 차려입고 가야 의심을 안 하시겠죠. 워낙 엄하신 분이라.’
왔다 갔다 하고 있었구나. 동녘과 백야를.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좀 이상해서. 지인이 동녘 그룹을 다녀 꽤 아는데. 30대 초반에 억 단위로 버는 직원은 없는 거로 아는데. 임원을 제외하곤.’
‘그럼 보자. 31세면 사원이나 잘해야 대리 정도 달고 있을 테고. 연봉 6천에 성과급 포함해도 8천, 성과가 좋은 해엔 9천 정도 될 테니. 아하. 아예 반올림을 하셨나?’
‘그래서. 그 친구 이름이 뭔데요. 방금 내가 말하지 않았나? 지인이 동녘 다닌다고. 그래서 좀 알아봐 드리려고.’
‘채 순경이 결정 내리기 쉽게 내가 김민폐에 대해 좀 알아봤는데요. 어떻게. 알려드릴까?’
그래서 그렇게 잘 알고 있었구나. 동녘 그룹에 대해.
생각해보니 첫 만남부터가 이상했다.
‘여기, 총 여덟 가구 맞습니까. 그냥…… 궁금해서요.’
대체 누가 처음 방문하는 곳의 가구 수부터 궁금해할까.
처음부터 수상하다곤 생각했었는데…….
순경이잖아. 마을을 지켜야 하는 순경. 왜 더 수상쩍게 여기지 않았어. 왜 그 경계를, 그렇게나 쉽게 풀었어.
요원이 자책하듯 눈을 찡그렸다.
땅바닥을 줄곧 내려다본 채로 다시 생각에 잠겼다. 불안정한 호흡은 그대로였다.
그 남자는 왜 굳이 정체를 숨기고 백야에 왔을까. 왜 굳이 백수 행세를 하면서 지내고 있던 걸까?
사람의 눈을 피해 쉬고 싶어 온 사람은 아니다. 정말 쉬고 싶어 시골까지 내려온 사람이라면, 여기에서만큼은 칩거 생활을 했겠지. 이리저리 백야를 들쑤시고 다니는 것도 부족해 매주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남은 건 사실 하나다.
좋아죽겠다고 고백한 내게까지, 몸도 마음도 나눈 내게까지, 정체를 숨기는 단 하나의 이유.
떳떳하질 못하니까.
재벌가의 자제분께서 대체 우리 마을엔 왜 왔을까. 왜 하필 백야마을일까. 무슨 목적이 있어 왔을까.
내가 먼저 알아내야 한다.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절대, 내가 그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그 남자가 먼저 알게 해선 안 된다.
내게 또,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거짓을 고할 수도 있으니.
그런데 그 남자, 내가 좋다는 말이…… 진심이긴 했나? 그 또한 달콤한 사탕발림은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대체 무얼 위해서?
어지럽고 뜨거운 요원의 머릿속에, 잊고 지내던 남자의 이상했던 말이 번개처럼 뇌리를 빠르게 스쳤다.
‘어느 날 갑자기. 12억, 아니, 채요원 씨에겐 특별히 20억이 주어진다면. 가장 먼저 뭘 하고 싶습니까.’
지이잉. 지이잉.
‘집 사서 서울이나 경기권으로 가요. 떠나라고. 기분 좋게. 좋잖아요? 20억인데.’
지이잉. 지이잉.
요원의 고개가 더 아래로 낮게 추락한다. 벤치를 꽉 틀어쥐고 있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미안합니다, 내가.’
손톱 끝이 벤치 위를 무섭게 긁는다.
지이이. 지이잉.
진동이 끊이지 않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요원이, 고장 난 기계처럼 손을 삐거덕 움직여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을 확인했다.
액정에 뜨는 낯익은 그 이름에 잠시 흔들렸던 요원의 눈빛이 곧, 모양과 색을 완전히 바꾸어 차디찬 호숫가처럼 시퍼렇게 변했다.
그 남자다. 사진 속의 주인공.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고 고귀한 자태로 빌딩을 올려다보고 있던 그 남자.
백야마을의 백수 하무경 씨.
아니.
동녘 그룹의 막내 아드님.
하무경 상무.
이 개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