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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과백야-63화 (63/116)
  • 63화. 너 내게 제발 미쳐라

    계속해서 무경은 함묵했고 도현은 마음이 급해졌다.

    어떻게든 형을 설득해서 온정신으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는 그 생각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제발 현실을 직시하시고 계획대로 밀어버리세요, 이깟 마을. 공짜로 나가라는 거 아니잖아요. 그들에겐 오히려 더 좋은 기회잖아요. 마을 떠나 다른 곳에 살라는 게 뭐 어때서요? 우리 푼돈 주는 거 아니잖아요. 한 가구당 12억이에요. 여기 신축 아파트 2억이면 사요. 시골 사람들에게 그 돈이 얼마나 큰 돈인지, 잘 아실 텐데요?”

    무경의 팔뚝을 꽉 붙잡으며 애원하는 투로 말했다.

    “형이 경영권 못 쥔 상태에서 회장님 돌아가시면요. 아니. 형이 그깟 정 때문에 이 마을 포기한 걸 회장님이 아시는 날에는요.”

    “…….”

    “형 동녘에서 제명이라고요. 그리고 전 그 꼴을 절대로…….”

    도현이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고개를 아래로 푹 떨어트렸다.

    “못 본다고요…….”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아버지에게 버려진 기분.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우리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형은 나처럼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34년간 단 한 번도 그런 후진 대우를 받아본 적 없던, 동녘의 귀한 막내로만 살아왔으니.

    형은 절대로 견디지 못할 것이다.

    “…….”

    “…….”

    얼마의 시간이 더 흘렀는지 체감되지 않는다.

    “내가 요즘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됐는데.”

    도현의 정수리 위에서 무경의 나직한 목소리가 탁한 연기처럼 새하얗게 흩어졌다.

    “위로가 너무 해주고 싶으면 더 못 해주게 되고. 할 말이 너무 많으면 더 말을 못 하게 돼. 무슨 말인지 알겠니, 도현아?”

    다 태운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진 무경이 다시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래서 난.”

    눈매를 찡그리며 라이터를 위로 탕, 올려 불을 붙인 무경이 매캐한 연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이며 작게 읊조렸다.

    “더 말 못 해.”

    자신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도현과 눈을 맞춘 무경이 연기와 함께 자조적으로 웃었다.

    “맞아, 도현아. 형은 보기보다 싸구려 잡놈이야.”

    오해였다.

    “때를 보는 거야.”

    형은, 생각을 안 해본 것이 아니었다.

    “적절한 때를.”

    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거다.

    “그리고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상대가 느낄 그, 배신감에 대하여.

    “부탁 하나만 하자.”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 무경이 얼마 태우지도 않은 담배를 발밑에 던졌다.

    “이따 합의서 하나 작성할 거야.”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운동화로 그 꽁초를 짓이기며 말을 덧붙인다.

    “이쯤 되면 마을 합의서 하나 정도는 회장님 손에 들어가야 아, 얘가 지금 일을 제대로 하고 있구나, 안심하시곤 이 마을에 아예 관심을 끄시겠지. 그게 아무리 이면 합의라 할지라도 말이야.”

    “이면 합의라뇨? 그건 또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무슨 뜻이기는, 도현아.”

    무경의 까만 시선이 도현을 가지고 놀 듯 쳐다보며 픽 짧게 웃었다.

    “네 인생 목표가 실패했단 뜻이지.”

    숨을 멈추고 있는 도현의 어깨 위에 손을 턱, 올린 무경이 그의 귓전에 작게 속삭였다.

    “목표 다시 세워.”

    놀리듯이, 혹은.

    “그리고 동녘에서 떠나.”

    염려하듯.

    도현의 어깨를 두 번 툭툭 두드리며 그를 스쳐 지나가는 무경의 얼굴은 어느덧 심해보다 더 차갑게 변한 뒤였다.

    채요원 순경. 채요원. 요원아.

    나 너에게 정말 미안한데.

    너 나 이기적인 새끼라 욕해도.

    너 내게 제발 미쳐라.

    간절히 나를 원하고 더 많이 사랑해.

    그래서, 네가 언젠가 내게 느낄 그 배신감이,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도록.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

    민수가 기어이 백야파출소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경이었고, 세 사람이 사이좋게 팔각정을 찾았다.

    민수는 성준이 빠져주길 원했으나 요원은 성준이 함께하길 원하는 눈치였기에 결국 성준이 그들과 함께 온 것이다.

    “여기가 성준이 형에게 말로만 듣던 그 자장면 맛집이로군요?”

    팔각정 문을 열고 들어오는 민수의 커다란 목소리에, 쇼케이스 냉장고에서 막 고량주 병을 꺼내던 팔각정 사장이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옴마? 채 순경, 임 경장, 왔소? 옆엔 또 누구요?”

    “채 순경님 뵈러 서울에서 왔습니다! 김민수라고 합니다.”

    넉살 좋은 민수가 팔각정 사장을 향해 거수경례를 해 보이니 냉장고 문을 닫은 팔각정 사장이 허허,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무경 씨 알면 난리 나겄구만.”

    “예? 누구요? 하무경이요?”

    갑자기 듣게 된 검은 재규어의 이름에 몸을 떨었던 민수가 다시 하하, 웃으며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맞다. 여기에도 하무경 씨가 계신다고 했죠? 저는 또 우리 상무님인 줄 알고. 근데 요원 씨?”

    이미 자리 잡고 앉은 요원과 성준에게로 쪼르르 달려간 민수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저 사장님 말씀은 뭐예요?”

    “뭐가요?”

    “왜 하무경 씨가 저 때문에 난리가 난다는 거죠?”

    “그러게? 두 사람 뭐 있어?”

    성준까지 합세하여 네 개의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가 요원을 바라보았다.

    “네?”

    요원이 뭐라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 구석진 자리에 있는 손님의 테이블 위에 막 고량주 병을 내려둔 팔각정 사장이 메뉴판을 들고 그들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서며 폭탄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것이사 하무경 씨가 채 순경을 좋아항께 그라지라.”

    “예?”

    “예?”

    “예?”

    팔각정 사장의 한마디에 세 사람이 미어캣처럼 동시에 고개를 홱 틀어 다가온 팔각정 사장을 가만 올려다봤다.

    “채 순경, 설마 몰랐소? 내가 다 알것든디?”

    모를 리가.

    ‘채 순경. 채 순경. 씨발, 채 순경. 내가 널 진짜.’

    새벽 내내 그는 온몸으로 제게 좋아한다 말했었는데.

    좋아한다, 온몸으로 말한 사람은 과연 그 남자뿐이었을까?

    ‘하무경 씨. 하무경 씨. 아, 하무경 씨.’

    그에게 매달려, 그의 이름을 몇 번이고 목 놓아 부르며, 그의 밑에서 엉망으로 흔들리던 저 자신 또한 마찬가지 아니었나?

    “진짜야, 채 순경? 하무경 씨가 채 순경 좋아해?”

    ‘내가 널, 진짜 많이 좋아해.’

    성준의 목소리와 무경의 고백이 오버랩되면서 요원의 두 뺨은 순식간에 벌겋게 상기되었다.

    “이잉? 왜 또 얼굴은 벌게지고? 설마 채 순경도 하무경 씨 좋아해? 그럼 우리 민수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성준이 요원을 한 번, 민수를 한 번,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가 민수의 등을 장난스레 툭 치며 웃었다.

    “너 새 됐다, 야.”

    “아. 실은 그게요, 경장님. 민수 씨, 사실은 그게 말이에요.”

    목까지 벌게진 요원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쓰고 있던 순경 모자를 벗어 얌전히 내려두었다.

    “그러니까, 제가요.”

    머뭇대던 요원이 자세를 바르게 잡고 앉았다.

    “제가 진작부터 말씀드리려고 했었는데요.”

    요원이 민수를 미안한 얼굴로 쳐다보며 막 입술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더 말씀 안 하셔도 돼요, 요원 씨.”

    손을 들어 올려 요원의 뒷말을 저지한 민수가 그녀를 보며 싱긋 미소 짓는다.

    “제게 관심 없으신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데요.”

    민수가 검지로 제 뺨을 긁적이다가 성준의 등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저희 두 사람 일이니 성준이 형에겐 더더욱 변명 안 하셔도 되고요.”

    친절한 말과 함께 제 주머니를 뒤적거린 민수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저는 단지 요원 씨와 한 번 더 만나 뵙고 식사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때 첫 만남에 회사 일 때문에 도중에 떠난 게 너무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예의가 너무 없었잖아요.”

    “아니요. 그 일은 정말 괜찮았는데요, 민수 씨.”

    “제가 안 괜찮았어요, 요원 씨.”

    액정을 터치하면서 중간중간 요원과 눈을 맞춘 민수가 요원을 안심시키듯이 활짝 웃어 보였다.

    “이 기회에 우리 성준이 형도 보고 겸사겸사 온 거죠. 또 요원 씨에게 보여드릴 것도 있잖아요. 그러니 제게 미안해하지 마세요.”

    갑자기 이상해진 분위기에 성준이 크흠! 크게 헛기침하며 “날씨 한번 끝내준다.” 창밖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 알면서도 술이 당기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취하기 전에 보여드릴게요.”

    진심인 듯 장난인 말을 툭 던진 민수가 사진 하나가 띄워져 있는 핸드폰 액정을 요원의 앞으로 가까이 들이밀며 말했다.

    “이분이에요.”

    미안함 가득한 눈동자로 민수를 바라보던 요원이 제 눈동자를 슬쩍 밑으로 내리깔아 민수가 내민 액정 속 사진을 시야에 담던 그 순간이었다.

    “동녘 그룹의 막내아들.”

    사진을 바라보는 요원의 고요하던 눈동자가 찰나에 술렁였고.

    “하무경 상무님이요.”

    세상의 시간은 모두 잘만 흘러가는데 요원의 시간만 멈추어버린, 아주 기막히고도 비현실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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