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그, 배신감에 대하여
햇빛이 쨍한 일요일 아침, 무경은 채채 과수원에 와있었다.
요원과 여러 번의 관계를 가지고 몇 시간 못 자고 나온 터라 무경은 피로에 눅눅해진 얼굴이었다.
아마, 자신보다 요원이 더 심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만하자는 여자를 계속해서 짐승처럼 몰아붙였던 것이 누구인지를 잘 알기에.
분명, 같이 잠들었는데 눈을 뜨니 요원은 곁에 없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그 공허한 감정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무경 씨. 일은 할 만하요?”
사과에 유백 봉지를 씌우던 무경이 곁으로 다가온 일섭을 무던히 바라보며 대꾸했다.
“딱히 어려울 게 없는데요.”
높낮이 없이 대답하는 무경을 가만 바라보던 일섭이 곧, 그가 사과 위에 씌운 유백 봉지의 형태를 보면서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오메오메 꼼꼼하니 잘 해부렀네요잉.”
일섭을 대면하고 있는 지금, 무경은 자신이 심각한 범죄자가 된 기분을 잠시간 받았다.
‘하아……. 거기, 그만. 그만해요.’
당신의 하나뿐인 소중한 딸과 새벽에 무슨 짓까지 했는지 일섭이 안다면.
‘그럼. 채 순경이 대신 빨아줄래요?’
무슨 짓까지 요구했는지 일섭이 안다면.
‘예쁘네요.’
제 것을 입안 가득 물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흡족하게 웃었던 자신을 안다면.
일섭은 저를 보며 절대 저런 얼굴로 웃지 못할 테니.
“아버님.”
“이잉? 아버님이요?”
“아니. 채 사장님.”
“말해보쇼. 나한티 먼 할 말 있소?”
“채요원 순경, 참 반듯하게 잘 키우셨어요.”
무경의 뜻밖의 말에 일섭의 눈이 일순 커다래졌다가 모자를 벅벅 긁으며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우리 요원이가 지 알아서 잘 컷제라. 나는 한 것이 없어라.”
“그럴 리가 있습니까.”
무경은 다시 사과나무로 시선을 돌리며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엄부자모(嚴父慈母)라는 사자성어가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자식을 엄하게 다루고 어머니는 자식을 깊은 사랑으로 보살펴야 한다.”
단정한 얼굴로 말하며 하나 남은 사과에 유백 봉지를 마저 씌운 무경이 일섭과 다시 시선을 맞추며 호선을 그린 입술로 말을 덧붙였다.
“애쓰셨네요. 두 사람 몫을 홀로 해내시느라.”
전혀 기대하지 않은 사람에게 받은 뜻밖의 위로에, 일섭은 말문이 다 막힌 듯 보였다.
“옴마, 하무경 씨.”
값싼 안경 뒤, 일섭의 시선이 잘게 떨리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지금 내 맴이 시방, 참말로 거시기해부요잉.”
그대로 손을 쭉 뻗은 일섭이 무경의 손을 덥석 붙잡았고 무경은 웃지 않는 눈으로 일섭을 바라보았다.
“참말로 고맙소잉.”
햇볕에 그을린 일섭의 얼굴을 몇 초간 가만 바라보던 무경이 잡혀있는 손을 빼내며 흠, 작게 헛기침했다.
“잠시 담배 한 대만 태우고 와도 되겠습니까.”
“이잉. 그라요. 그래.”
각 잡힌 자세로 정중하게 인사를 마친 무경이 주머니에 양손을 꽂으며 저 멀리 사라졌고, 그런 무경의 훤칠한 뒤태를 바라보면서 일섭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저 지금 과수원 앞이니 잠시 시간 좀 내주세요. 형에게 여쭐 것이 있어요.
도현의 메시지를 뒤늦게 확인한 무경이 과수원 앞을 나와 두리번거렸다.
무경을 30분 넘게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도현은 입구 옆 화단에 서서 양귀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 작가님. 등단을 하려면 글을 쓰셔야지? 꽃구경할 시간이 있어요?”
비아냥거리는 무경의 등장을 알아차린 도현이,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무경에게 인사했다.
도현을 본체만체 그대로 지나쳐 낮은 돌담 위에 대충 몸을 앉힌 무경이 도현을 향해 중지와 검지를 가위 모양으로 내밀었다.
손짓을 알아차린 도현은 제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무경의 손가락 사이에 잘 끼워주었다.
무경이 그 담배를 입술 사이에 무니, 도현은 곧바로 라이터를 탕, 위로 올려 무경이 물고 있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우. 존나 피곤하네.”
무경이 담배를 빨면서 제 이마를 문질렀다.
후- 땅바닥을 보며 연기를 길게 뱉던 무경이 담배를 비스듬하게 문 채로 눈을 찡그리며 제 시계를 확인했다.
“서론 본론 죄다 집어치우고 결론만 짧게. 5분이면 돼?”
유쾌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무경이 상대에게 보고를 받는 방식은 늘 이랬기에, 그의 스타일을 잘 아는 도현 또한 곧바로 입을 열었다.
“새벽에 형이 제게 하신 말씀이요. 회장님께 보고할 테면 하라고, 이제 별 상관 안 한다고. 그거 대체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에요? 제가 밤새 생각해봐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다시 여쭈러 왔어요.”
볼이 움푹 팰 정도로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 무경이 그 연기를 길게 뱉으면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뭐가 더 있어. 네가 들은 그대로지.”
“제가 들은 게 뭔데요?”
“여자에 미쳤어. 나사 하나가 빠졌어. 이 형이, 완전히 돌아버렸어.”
그가 픽 웃으며 검지를 관자놀이 옆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무경의 가벼운 태도에 도현은 어금니를 힘껏 씹었다.
“회장님께서 형을 이곳으로 보낸 이유. 잘 아시리라 생각해요.”
“잘 알지.”
광합성을 하듯 고개를 뒤로 젖힌 무경이 광활한 태양 아래에서 눈을 잠시 감았다.
“아버지의 고향까지 밀어버릴 수 있는 강인한 사람이 되라고. 인정에 흔들리지 말고 회사의 이익만 보고 움직이는 그런 냉철한 사람이 되라고. 내가 증명해 보이면 저 자리 나 주시겠다는 거 아니야, 지금.”
담배 필터를 앞니로 꽉 한번 물었다가 힘을 푼 무경이 느릿하게 눈을 뜨며 강한 어조를 짓씹는다.
“아니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씨발.”
푸스스, 연기와 함께 웃음도 흘렀다.
“왜 꼭 그 방식이 멀쩡한 마을을 밀고 사람 뒤통수를 후려야 하는 건데?”
웃음기 싹 가신 얼굴이 도현을 단단히 조이며 묻는다.
“내가 깡패 새끼냐, 도현아? 내가 기업인이지 재개발지구에서 강제 철거 하는 깡패 새끼야?”
“그런 의미 아니라는 거,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그러세요.”
“그런 의미가 아니기는, 씨발. 존나 그런 의미지.”
짜증이 짙게 밴 한숨을 내쉰 무경이 바닥에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
“채요원 순경 때문에 이러세요?”
굳건했던 뿌리가 흔들리는 모습에 울화 같은 감정이 치밀어 오르면서, 도현은 무턱대고 그런 질문을 던졌다.
“…….”
무경은 소리 없이 담배를 다시 입에 물면서 눈을 슬며시 올려 도현을 바라보았는데, 더는 까불지 말라는 경고의 눈빛도 담겨있었다.
하지만 도현은 물러서지 않고 주먹을 꽉 말아쥐며 그를 더 도발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건 제가 형을 옆에서 쭉 지켜보면서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이건 아니지. 내가 형의 뒤를 어떠한 마음으로 지켜왔는데.
“형은 대체 뭐가 그렇게도 여유로우세요?”
어떠한 더러운 일을 대신해 왔는데.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던지 아니면 도현의 생경한 태도 때문인지, 무경의 눈썹이 위로 비스듬히 치솟았다.
“그렇잖아요. 경영권 못 쥔 상태에서 회장님 돌아가시면 형은 하태경과 하가경의 등쌀에 못 이겨 밀려날 거 뻔하고. 또 그깟 인정에 흔들려 백야마을 포기하고 올라가도 회장님께 내쳐질 형의 미래가 제 눈엔 생생히 다 그려지는데. 형은 정말 아무것도…….”
“…….”
“아무것도 보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요.”
잠시 두 남자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태우지 않는 담배만이 무경의 손가락 사이에서 가만히 타들어 가고 있었다.
도현은 그의 신경을 건드린 것을 눈치챘고, 이때다 싶어 목소리에 더욱 강한 힘을 실었다.
“왜요. 다 포기하고 이깟 시골 마을에 내려와 저 여자랑 살림이라도 차리시려고요? 애 낳고 알콩달콩 행복하게, 뭐. 형은 그런 소박한 미래를 꿈꾸시는 거예요, 지금?”
“…….”
“근데 말이에요, 형.”
무릎에 손을 얹으며 허리를 반쯤 굽힌 도현이.
“제가 갑자기 또 궁금해져서 그러는데요.”
무경과 눈을 맞추며 뼈있는 질문을 던진다.
“채 순경이 용서해준대요?”
지금껏 힘을 풀고 있던 무경의 눈매가 금세 형태를 바꾸었다.
표정은 무던하나 손끝에 걸린 담배는 그렇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얼마의 정적이 더 흘렀을까.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힐끗 확인한 무경이 낮게 욕을 씹어 뱉으며 비소했다.
“이 개새끼가 요 며칠 더럽게 기어오르네, 사람 짜증 나게.”
돌담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세운 무경이 도현을 비스듬히 깔아봤다.
“누가 그렇게 주인 앞에서 눈을 똑바로 치켜뜨고 건방지게. 응?”
담배를 입에 물고 중얼거리는 무경의 기운은 실로 엄청났지만.
“제가 분명 전에도 말씀드렸죠.”
지금의 도현은 광기 어린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면서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채 순경은 형하고 다르다고. 채 순경이 앞으로 형을 어떻게 믿을까요. 애초부터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남자를 말이에요.”
무경이 도현에게서 잠시 눈을 떼어내며 머리를 거칠게 한번 쓸어올렸다.
“형은 이 마을 없애려고 왔잖아요.”
그 말엔 무경의 눈썹 앞머리가 사납게 팍 찡그려졌는데, 그 모습이 어딘지 조금 놀란 얼굴 같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 죄다 엿 먹이러 왔잖아요.”
충격 먹은 얼굴 같기도 하고.
“뒤통수 후리려고 했잖아요?”
그 모습에서 도현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게 사실이잖아요.”
형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구나.
“형이 대체, 재개발지구에서 강제 철거 하는 깡패 새끼랑 뭐가 달라요?”
상대가 느낄 그, 배신감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