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58화 (58/116)
  • 58화. 너는 좋아지고, 서울은 싫어지고

    [ ※ 추천곡 : 탑현 – 호랑수월가 ]

    전날, 무경은 태호에게 백운의 초대 명단 리스트를 받았다.

    초대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고, 사회적 위치를 외우고, 그들의 관심사를 외우고, 한 시간가량 그들과 맘에도 없는 대화를 나누며 맘에도 없는 칭찬 좀 날려주고 내키지는 않지만 일단 웃어주고 장단을 맞춰준 뒤, 무경은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무경이 정장 구두도 벗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왔으나, 그 상식 밖 행동에도 그 누구 하나 무경에게 뭐라 할 자는 없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상무님, 안녕하십니까.”

    그들은 그저, 무경의 앞에서 두 손을 앞으로 공손하게 모아 허리를 숙일 뿐이었다.

    “수고가 많으세요.”

    그들을 향해 가볍게 묵례한 무경이 대리석 계단을 뚜벅뚜벅, 밟아 올라 백운의 2층으로 향했다.

    백운은 총 3층짜리 저택이었는데, 층마다 거실, 다이닝 룸, 발코니까지 모두 갖춰져 있었다.

    2층 발코니 난간에 비스듬하게 기대선 무경이, 연회 장소인 정원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하태경과 하가경을 가라앉은 눈으로 내려다보며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찾았다.

    무슨 판을 짠단 말인가, 니들이. 감히, 나를 상대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탕, 튕겨 불을 붙인 무경이 눈매를 가늘게 찡그리며 스읍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후우-.

    그 담배 연기를 한숨처럼 길게 뱉으면서 두 팔을 난간대 위에 걸친 채 고개만 푹, 아래로 떨어트렸다.

    이상하구나. 내 고향 서울이 이제 나는 조금…….

    무경이 떨어트렸던 고개를 다시 꼿꼿하게 세웠다.

    시선만 내려 제 형과 누나를 다시 깔아보며 중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져 있는 담배를 다시 입가로 가져갔다.

    스읍. 후우.

    담배 연기를 몇 번이고 빨고 뱉는 행동을 반복하던 무경은, 고개를 뒤로 젖혀 아지랑이처럼 밤하늘에 길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잠시 감상하듯 바라봤다.

    그러면서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는데,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담뱃재를 툭툭 털면서 다른 손으론 주머니를 뒤적거린 그가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동시에 무경의 검은 눈동자가 잠시 흡, 크게 뜨였다.

    [채요원 순경] 담백하게 저장된 이름이 액정에서 별처럼 반짝거렸기 때문이다.

    “…….”

    무경의 입술이 잠시 작게 떨어졌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를 반복하면서 그는 액정 속 이름 석 자를 제 시야에 꼭꼭 새겨넣었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계속되는 진동에, 긴장한 사람처럼 마른침을 한번 삼킨 그가 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핸드폰을 제 귓가에 밀착시켜 어느 때보다도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뽐냈다.

    “하무경입니다.”

    [저 채요원 순경인데요.]

    “알아요.”

    무경이 담배를 입에 물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아는데 왜 전화를 그렇게 받으세요?]

    “내가 전화를 어떻게 받았죠.”

    [목소리도 되게 깔고 그리고 상대를 모르는 것처럼 ‘하무경입니다’ 하고 받으시니까, 저는 제 번호가 당연히 저장이 안 되어 있는 줄 알고…….]

    “왜겠어요.”

    담배를 빨면서 무경이 대답했다.

    “나한테 뻑가라고 그러는 거지.”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요원이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무경도 그녀와 똑같이 웃으며 담뱃재를 털었다.

    “뭐 해요?”

    [저는 지금 부임 할머니 댁에 있어요. 누군지는 이제 아시죠? 전에 하무경 씨가 소똥 펐던 그곳이요.]

    “모를 리가 있나. 내가 그 어르신한테 얼마나 욕을 처먹었는데.”

    짧아진 담배를 다시 입가로 가져가면서 무경이 말을 이었다.

    “내 평생 그런 상스러운 욕은 처음 들어봅니다. 머리도 얼마나 처맞았는지 가끔 깜빡깜빡하는 게 아무래도 내 뇌세포가 많이 죽은 것 같아요.”

    [마을 어르신들이 날 그만큼 아끼는구나, 하고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두 번만 아꼈다간 저세상 가겠네요.”

    [백야마을 어르신들 나름의 애정 표현법이에요. 하무경 씨가 싫었다면 애초에 그러지도 않으셨을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폭력이 정당화될 순 없지. 순경 아니에요? 폭력은 나쁜 거라며. 나한테 그래놓고.”

    그가 대화의 맥을 끊었다.

    [물론, 정당화될 순 없지만…….]

    요원의 한숨 소리가 이내 크게 울렸다.

    [하무경 씨는 좀, 뭐랄까. 가끔 대화하다 보면, 뭐랄까요? 주먹을 부른다고 해야 할지. 저는 물론 속으로만 생각하지만 어르신들은 그걸 행동으로 옮기시는 모양이에요.]

    “뭐?”

    무경의 음성이 조금 까칠하게 되묻는다.

    “주먹을 불러요? 내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헛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가 이젠 재미있다는 듯 하하, 웃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채 순경은 거기 왜 갔는데요?”

    [아! 오늘 여기에서 다 같이 모여서 식사하고 있어요. 갑자기 마을 잔치가 열려서요.]

    “갑자기 잔치는 왜.”

    [부임 할머님 손녀분께서 아주 좋은 곳에 취직하셨대요.]

    고작 그런 이유로 마을 잔치가 열리나.

    냉철함을 품은 무경의 새까만 시선이 다시 드넓은 정원으로 향한다.

    잘 차려입은 저들의 미소가 오늘따라 좀…… 역겹네.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매를 찡그렸다.

    [하무경 씨도 여기에 함께 계셨다면 참 좋았을 텐데요. 많이 아쉬워요.]

    혼란스러운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눈빛을 숨기듯, 무경은 잠시 눈을 감았다.

    [하무경 씨는 식사하셨어요?]

    내가 정말로 미쳐가는구나. 여자의 목소리에서 꽃내음이 나는 듯하니.

    “아직.”

    후, 무경이 한숨과 함께 피로한 목덜미를 문질렀다.

    [왜요?]

    “그냥. 오늘따라 잘 안 들어가네.”

    참 좋은 음식들인데.

    문득, 첫 만남에 갑순이 해주었던 국수가 떠올랐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이딴 초라한 음식을 내놓나, 하면서도 한 그릇 싹싹 다 비웠었지, 아마?

    째깍째깍. 얼마가 흘렀는지 가늠은 안 되어도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채 순경.”

    남자의 음성과 깊은 한숨이 밤공기를 갈랐다.

    “채 순경은 내가 보고 싶다고 했었나?”

    네? 하고 되묻는 여자의 음성은 투명했다. 감정이 고스란히 다 묻어 나올 만큼.

    “채 순경은 내가 보고 싶어요?”

    [……네? 전화가 잘, 안 들리나?]

    애써 연기하는 요원을 비웃듯, 무경은 폭탄 같은 한 마디를 터트렸다.

    “나는 채 순경을 좋아해.”

    흡, 요원이 건너편에서 불시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것이 생생히 전달됐다.

    그리고 그 뒤론 한동안, 지독한 적막이다.

    여자는 숨을 아예 멈춘 사람처럼, 모든 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작은 숨소리마저 들려오지 않음에, 혹시 채 순경은 기절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채 순경.”

    […….]

    “채 순경?”

    서서히 걱정되기 시작하여 무경의 삐딱했던 자세가 바로 섰다.

    “이봐요, 채요원 씨.”

    무경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잠시 제 핸드폰을 귓가에서 떨어트려 액정을 확인했다.

    여전히 액정 속 통화 시간은 바뀌고 있었음에 안심하며, 무경이 다시 핸드폰을 귓가로 가져가며 그녀를 불렀다.

    “채요원.”

    [네?!]

    폭탄처럼 커다랗게 터진 여자의 음성에 무경이 눈매를 살풋 찡그리며 잠시 핸드폰을 귓가에서 슬며시 떨어트렸다.

    “감동한 거예요, 아니면. 와 앞으로 이 새끼를 어떻게 떼어내지? 고민했던 거예요.”

    여자에게선 또 한동안 말이 없다.

    안 봐도 뻔하지.

    적갈색의 눈동자는 잘게 떨릴 테고 새하얀 피부는 더욱더 창백해졌을 것이며, 앵두 같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그녀는, 꽃향기가 나는 제 머리칼을 연신 쓸어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 아무것도 아닌 여자의 소소한 행동과 표정에, 내 가슴은 또 고장 난 듯이 쿵쾅거릴 테지.

    “아. 고백하면 이런 기분이구나.”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트린 무경이 킥, 자조적으로 한번 웃었다.

    “쥐구멍이든 뭐든 구멍이란 구멍엔 죄다 찾아 들어가고 싶네요. 처음이거든.”

    누군가에게 좋아한다, 먼저 진심을 담아 고백한 것은.

    “뭐라도 좋으니 아무 말이나 좀 해보지?”

    여자에게서 너무 오랜 시간 말이 없자 무경은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고백이 처음이었으니 실연을 당한다면 그 또한 처음일 것이다.

    무경은, 입술 안 여린 속살을 초조한 듯 답지 않게 깨물다가 이젠 제 뒷머리를 짜증이 밴 손끝으로 문질러 헝클어트렸다.

    “차라리 범죄자라 고백을 할 걸 그랬지.”

    […….]

    “그럼 적어도 이것보단 덜 불안,”

    [좋아해요.]

    여자가 왜 한동안 아무런 말 못 했는지 어느 정도 알겠다.

    [저도…… 좋아해요.]

    나 또한 그러고 있었으니.

    [좋아해요.]

    말만 못 할까. 여자의 ‘좋아해요’ 그 한 마디에 나는…….

    [좋아해요, 하무경 씨.]

    무릎이 완전히 꺾였는데.

    “하무경 씨?”

    난간대를 붙잡으며 비틀거리는 무경의 등 뒤로, 불시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

    요원의 고백에 반쯤 넋이 나가 있는 무경은, 아주 느린 동작을 연상시키듯 아주 천천히 고개를 비스듬히 뒤로 돌려 저를 부른 누군가를 쳐다보았다.

    그곳엔 정나경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샴페인 골드 컬러의 드레스를 입고, 수줍은 듯 머리칼을 귀 뒤로 연신 꽂으면서 무경에게 살짝 고개 숙여 묵례하는 여자.

    “오랜만이죠? 우리.”

    죄다 각본처럼 짜여있는 저 여자의 가식적인 새까만 모습에서 무경은, 새하얀 누군가를 떠올렸다.

    “채요원 씨.”

    그 여자의 이름을 불러본다.

    “아니. 자기야.”

    정나경에게 일부러 들으란 듯, 그런 간지러운 호칭으로 상대를 부른 무경은 매혹적으로 웃으며 핸드폰 속 그 사람에게 물었다.

    “나 지금 가면, 내 밥 있나?”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정나경을 직시한 채 뚜벅뚜벅, 정나경에게로 다가간 무경이 다시 핸드폰 속 요원을 향해 말했다.

    “그럼 나 지금 가. 너 보러 가.”

    통화를 종료하자마자 주머니 속에 핸드폰을 욱여넣은 무경이 시선을 비스듬히 떨어트려 제 앞의 정나경을 잠시 응시했다.

    정나경은 놀랐던 표정을 애써 지우고 무경을 올려다보며 예쁘게 웃어 보였다.

    눈을 반으로 접어 웃는 그 작위적인 표정이 제 비위를 건드리는지, 아니면 이 여자가 뿌린 독한 향수 냄새 때문인지.

    “으.”

    무경은 적나라하게 눈살을 찌푸리면서 제 코끝에 검지를 슬며시 갖다 댔다.

    아주 쉽게 모욕을 주는 무경의 행동에 정나경의 웃고 있던 표정에도 점차 균열이 생겼다.

    작위적인 미소가 사라지기 직전의 표정을 음미하듯 쳐다보던 무경이, 제 허리를 슬쩍 굽혀 정나경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붙여 이런 말을 작게 속닥거렸다.

    “싸구려 냄새.”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나경은 제 드레스를 꽈악 틀어쥐었다.

    바르르 떨리는 여자의 몸짓을 무던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다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무경이 그대로 정나경을 지나쳐갔다.

    뚜벅뚜벅, 계단을 향하던 그 단단하고 무게감 있던 걸음이 점차 가벼워지고.

    타타탁!

    계단을 빠르게 밟아 내려가는 무경은 이제 아예 백운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 상무님?!”

    빨라지는 걸음만큼 심장은 뛰었고, 목을 옥죄는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달리는 무경의 얼굴엔,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던 소년 같은 해사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나는 다시 가야겠다, 저 백야마을로.

    서울 이곳은 이제 조금, 무서우니.

    서울 이곳이 점차 나는, 싫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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