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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과백야-57화 (57/116)
  • 57화. 블랙코미디

    토요일의 오전은 화창했다.

    6월로 접어들었지만, 마을이 산에 둘러싸여 있어 그런지 덥진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에선 짜디짠 바다의 냄새가 났고, 매미와 풀벌레 소리는 하루가 달리 선명해졌다.

    오늘 요원은 쉬는 날이었기에 이른 아침부터 화단을 관리했다.

    “아야.”

    호미를 쥔 갑순이 대문을 열며 들어와 요원을 불렀다.

    “오늘 부임 동상네서 잔치한다 항께 저짝 총각들도 잔 불러라잉.”

    “잔치요? 갑자기 웬 잔치?”

    “부임 동상네 손녀가 겁나 좋은 디 취직했다 안 하냐. 저녁에 다 같이 모일 거시다. 저짝 백수 총각은 필히 잔 불러. 머라도 잔 느껴야제.”

    “하무경 씨는 여기 없어요.”

    “또 어디를 가부러써?”

    “서울이래요.”

    “그 오사랄 놈은 백수 놈이 머시 그라고 바빠서 맨날 차비 낭비함시로 서울로 쏘다닌다냐잉.”

    “서울에서 볼일이 있는 모양이죠.”

    “이잉 백수가 참말로 일이 있겄네잉.”

    구시렁거리는 갑순의 말에 요원은 화단에 물을 주며 피식 웃었다.

    “맛난 것 잔 맥일라 했드만 또 글러 부렀구만?”

    갑순이 본심을 드러내며 집 안으로 들어갔고, 요원은 화단에 물을 주면서도 제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 수시로 확인했다.

    -보고 싶어요.

    요원이 그 메시지를 보낸 이후로 무경에게선 그 어떠한 연락도 없었기 때문이다.

    부담을 주었나? 내가 어젠 미쳤지. 어쩌자고 그런 말을…….

    자책하듯 제 머리를 콩콩 때리다가 그 생각은 금세 방향을 튼다.

    아니야. 잘한 거야. 내 마음속 감정이 싹튼 것을 확인했다면 그 감정에 물을 주어야 꽃이 피지.

    그 감정을 키우는 것이 바로 표현이 아니겠나.

    더는 회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이젠 인정해야 했다.

    나 역시 하무경이란 남자에게 제대로 감겨버렸음을.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핸드폰 진동 소리에 흠칫거린 요원이 얼른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이가 아닌 [김민수]란 이름에 요원의 얼굴빛이 조금은 침울해졌다.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귓가로 가져간 요원이 일부러 목소리를 고조시켰다.

    “안녕하세요, 민수 씨! 그간 잘 지내셨죠?”

    [요원 씨!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죠?]

    늘 맑기만 한 민수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늘 냉소적인 누군가의 목소리가 더욱 그리워지는 시간이었다.

    [요원 씨, 다른 건 아니고 제가 오늘 내려가려고 했었잖아요.]

    “아. 그게 오늘이었던가요?”

    아예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기에 요원이 난처한 얼굴로 목덜미를 긁적였다.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실은 오늘 마을 내에 갑작스러운 잔치가 생겼어요. 제가 도와드려야 하는 상황이라서요. 오늘은 시간을 낼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잘됐네요! 사실은 저도 일이 좀 생겨서 오늘 못 내려갈 것 같단 말씀을 드리려고 전화 건 거였거든요. 저 괜히 고민했네요?]

    민수가 하하, 웃는다. 요원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잘됐네요. 그럼 저희는 다음에,”

    [그래서 내일 내려가려고 하는데요.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다음’이란 핑계로 다신 보지 않으려 하였으나 민수가 대뜸 ‘내일’을 얘기했다.

    “내일이요?”

    [보여드릴 것도 좀 있고요.]

    “제게요? 뭘 보여주시려고 굳이 이 먼 길을…….”

    [기억 안 나세요? 제게 저희 상무님 사진 부탁하셨잖아요.]

    “아!”

    요원이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맞다. 그랬지, 참.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남자를 믿기로 한 그 순간부터.

    내 정신 좀 봐.

    요원이 말아쥔 주먹으로 제 이마를 콩콩 때리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민수 씨. 제가 요즘 정신이 좀 없네요.”

    [아니에요. 죄송할 건 없고요.]

    “죄송하지만 사진을 그냥 메시지로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그거 보여주려고 오시기엔 너무 먼 길이잖아요.”

    [에이, 요원 씨. 사진은 당연히 핑곗거리죠. 요원 씨 얼굴 보러 가는 거예요, 저.]

    하하, 장난스럽게 웃던 민수가 조금은 사무적인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사진을 메시지로 보내드리는 건, 죄송하지만 조금 힘들 것 같아요.]

    “왜요?”

    [개인 핸드폰이긴 하지만 유출했다는 증거가 남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요즘 저희 상무님에 대한 보안이 내부적으로 심한 것도 있고, 제가 감사팀이라 이런 거에 많이 민감하기도 하고요.]

    괜히 대기업 감사팀 직원이 아닌 모양이네.

    요원은, 거절도 못 하고 착하기만 할 것 같던 민수의 또 다른 모습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민수 씨. 정말 죄송한 말씀인데요. 저는 이제 안 봐도 될 것 같아서요. 굳이 그것 때문에 이 먼 길을 안 오셔도,”

    [어? 저 이만 끊어야 할 것 같아요! 아무튼, 내일 봬요!]

    “미, 민수 씨? 민수 씨?! 김민수 씨!”

    전화가 멋대로 뚝, 끊겼다.

    “하아.”

    요원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찡그린 두 눈을 감았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오늘따라 유독 좋아서 찡그렸던 그 얼굴이 금세 온화함을 되찾는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고들 하지?

    이렇게 되려고 그런 일이 일어났던 거라고들 말하잖아, 왜.

    가까운 미래에 나는, 오늘 일을 떠올리며 같은 후회를 반복할지도 모르겠다.

    만나지 말걸.

    처음부터, 부탁하지 말 것을.

    ***

    저녁 6시 10분경에 무경이 탄 세단이 백운 앞에 멈춰 섰다.

    이미 백운 앞은 삐까뻔쩍한 고급 세단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태호가 내리기 전, 무경에게 몇 가지 사항을 보고했다.

    “회장님께선 몇 가지 검사가 있어 오늘 참석 못 하신다고 합니다.”

    클래식한 다크 브라운 컬러 계열의 슈트를 입은 무경은, 그에 어울리는 행거칩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며 코웃음 쳤다.

    “그런데도 하태경 부사장은 굳이 이 식사 자리를 오늘로 강행한 겁니까? 아주 불효자 새끼네요.”

    “오늘 꼭 하라는 회장님의 지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태호가 대답하면서 준비하고 있던 손거울을 무경의 앞으로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럼 우린 얼굴만 잠시 비치고 병원으로 가죠.”

    무경은 거울을 보면서 행거칩을 퍼프드폴드 모양으로 능숙하게 접었다.

    “회장님께선 검사가 끝나는 대로 요양차 별장으로 곧장 가신다고 합니다.”

    “갑자기 웬 별장. 여자라도 생기셨나?”

    행거칩 착용을 마친 무경이 농을 던지자 태호가 “상무님.” 하고 그를 나직이 불렀다. 언사가 적절치 못했음을 알리는 표정이었다.

    “농담입니다, 농담. 우리 차 실장님도 가만 보면 사람이 참 빡빡하셔?”

    무경이 가볍게 웃으면서 태호의 어깨를 툭 한 번 치자 태호가 큼, 헛기침하며 손거울을 거뒀다.

    “멋있으십니다.”

    “됐습니다.”

    태호의 칭찬을 끊은 무경이 막 뒷좌석 문을 열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오늘따라 유독 거대해 보이는 저택을 한참을 올려다보던 그가 곧 손에 힘을 주어 문을 덜컥 열어젖혔다.

    무경이 웅장한 대문 앞에 도착하자 백운의 거대한 철문이 덜컹 육중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무경은 태호와 함께 돌계단을 밟아 성큼성큼 올랐고, 그제야 성대한 축하연회가 열리고 있는 현장이 시야에 잡혔다.

    드넓은 정원에 마련된 화려한 테이블, 자리마다 올려진 1++ 등급의 한우 스테이크와 비싼 연회 음식, 한 손에 트레이를 받치고 정신없이 샴페인을 나르는 하얀 턱시도 차림의 웨이터, 샴페인 잔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웃고 떠드는 수많은 정·재계 인사들, 한쪽에서 아무도 듣지 않는 바이올린과 첼로를 켜는 연주자들까지.

    고마운 사람들과 식사 한 끼는, 씨발.

    이럴 거면 호텔을 빌리든지. 존나 백운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고생하게.

    츳, 무경이 적나라하게 혀를 차면서 태호를 짜증이 묻은 얼굴로 쳐다봤다.

    “차 실장님은 지금부터 나 따라오지 마시고 방 기사님과 식사하세요.”

    “예?”

    “맛있게 많이 드세요. 이왕이면 포장도 하시고.”

    “포, 포장이요?”

    “어차피 부사장이 사는 건데. 언제 저 새끼가 밥 한번 산 적 있어요? 없잖아.”

    태호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제 곁을 지나치는 웨이터의 트레이 위에서 샴페인 잔을 손가락 사이에 재빨리 잡아챈 무경이, 인사들에 둘러싸여 있는 하태경과 하가경에게로 뚜벅뚜벅, 올곧게 향했다.

    “형님, 누님.”

    자신들에게로 가까워지는 무경을 알아차린 하태경과 하가경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가, 주변을 의식하듯 빙그레 미소 짓는다.

    “왔니?”

    동녘 그룹 삼 남매가 대놓고 서로에게 적대감을 내보일 땐, 한 공간에 단 세 사람만이 있을 때뿐이다.

    동녘 삼 남매를 겉으로만 보는 사람들은 이들이 의좋은 남매인 줄로만 알고 있으니 뭐 어쩌겠나.

    그 기대에 부응해 드려야지.

    무경이 금방이라도 하태경과 하가경을 품에 껴안을 것처럼 팔을 양옆으로 넓게 벌리고서 그들에게로 점차 더 가까이 다가섰다.

    “하 상무! 와주었구나!”

    하태경이 이에 합을 맞추듯 다가와 무경을 먼저 품에 꽉 끌어안았다.

    “고맙다, 하 상무. 모두 다 하 상무 덕이야.”

    하태경이 무경의 등을 다정하게 두드리며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는데, 외운 대본을 카메라 앞에서 읊는 영화배우가 따로 없다 생각했다.

    “제 덕은요. 모두 형님께서 노력하신 것에 대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제 온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태경 사장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이들의 형제애에 감동한 얼굴로 제 가슴에 손을 얹으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하 상무 없었으면 나 못 해냈네. 진심이야.”

    퍽이나 그렇겠다 이 씨발놈아, 라는 욕설을 꾸역꾸역 집어삼킨 무경은 경련이 일 정도로 미소 짓고 있는 제 입가로 샴페인 잔을 가까이 가져갔다.

    도저히 맨정신으론 이 순간을 버틸 수가 없어서.

    “어머, 나를 빼면 나 정말 서운해?”

    샴페인 한 모금을 삼키는 무경에게로 다가온 하가경이 그를 백허그하듯 뒤에서부터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무경의 귓가에 이런 말을 나직이 중얼거린다.

    “징그러운 새끼. 아주 지랄 생쇼를 한다?”

    무경도 화답하듯 그녀를 향해 씨익 웃으며 하가경의 귀에 제 입술을 바짝 붙여 다정한 어투로 속삭였다.

    “누님만 할까요, 이 썅년아.”

    이 얼마나 추잡한 우리들의 민낯인가.

    정말이지.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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