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56화 (56/116)
  • 56화. Peripeteia

    통창을 스미는 햇살은 환했으나 하무경 상무의 집무실 내엔 평소와는 다른 낯선 어둠이 안개처럼 짙게 깔려있었다.

    비서실 막내 서이준이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무경을 긴장된 낯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경은 소파 테이블에 구둣발을 얹은 채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었는데, 그의 검지와 중지 사이엔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 한 개비만이 위태롭게 걸려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입고 있는 검은 슈트 베스트의 단추는 모두 풀어 헤쳐져 있고, 넥타이 또한 가슴께에서 덜렁거린다.

    아침부터 이렇게 헝클어진 모습을 보는 것이 처음이기도 했고, 무경이 내뿜는 엄청난 기운에 눌린 이준은 보고할 내용에 대해 입도 뻥끗 못 하는 중이었다.

    이준은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처럼, 굳게 닫힌 집무실 너머를 애타게 바라보며 무경의 오른팔인 태호를 떠올렸다.

    “서이준 비서님.”

    어느 때보다도 탁하고 낮게 깔린 남자의 목소리에 이준이 움찔거리며 다시 무경을 바라봤다.

    “예?”

    “두통약 좀 있어요?”

    무경이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아, 두, 두통약 말씀입니까? 늘 상비되어 있습니다! 그, 금방 가지고 오겠습니다!”

    이준이 말을 더듬으며 허둥지둥 나가려 폼을 잡았고, 무경은 테이블 위 두 다리를 가볍게 내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고 먼저 하고 가요.”

    풀어헤쳤던 베스트 단추를 단정히 걸어 잠그면서 데스크로 뚜벅뚜벅, 향하는 남자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에 마른침을 삼켰다.

    이준이 긴장된 낯빛을 해선 무경이 막 앉은 데스크 앞에 똑바로 손을 모으고 섰다.

    “보고드리겠습니다.”

    “네.”

    “시골집 욕실 말입니다, 상무님.”

    “네.”

    무경은 한숨처럼 대답하며 열 손가락을 맞물려 깍지 낀 손 위에 이마를 기대고 두 눈을 감았다.

    “인테리어를 어떤 식으로 할까요?”

    “알아서 하세요.”

    한껏 잠긴 무경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위압적으로 들려왔지만.

    “하지만 상무님 마음에 드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이준은 두 손으로 쥐고 있던 결재 철에서 페이퍼 몇 장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무경의 데스크 위에 살포시 올려두었다.

    “욕실 디자인을 상무님께서 좋아하시는 스타일대로 세 가지로 추려봤습니다. 왼쪽부터 시안 a,b,c입니다. 그것만 결정해주신다면 내일이라도 바로 공사 착수하겠습니다.”

    “알아서 하세요, 라고 방금 말씀드렸는데요.”

    5초면 될 것 같은데…… 라는 말을 꾹 삼키면서 이준은 제가 뽑아온 인테리어 디자인 시안을 그의 앞으로 용기 있게 조금 더 가까이 내밀었다.

    “하, 한 번만 봐주시면…….”

    이준의 미련한 행동을 고요한 시선으로 관망하고 있던 무경이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굳게 다물린 입술을 떼어냈다.

    “서이준 비서님.”

    “예, 상무님.”

    “진짜 나한테 왜 이러세요.”

    “예?”

    “나랑 그렇게도 일하기 싫으세요?”

    “……예?”

    “다른 임원 곁으로 갈래요? 보내드려요? 그러면 서로 편하지 않을까요?”

    이준의 눈이 휘둥그레 벌어져 빠르게 손사래 쳤다.

    “아, 아닙니다, 상무님! 저는 상무님과 일하는 게 너무 좋은!”

    “그럼, 일을 좀 똑바로 해!”

    쾅! 데스크 한편에 놓여있던 결재 철로 데스크를 세게 한 번 내리친 무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제 양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서이준 비서님, 내가요.”

    이준은 제 앞에 장승처럼 높게 치솟은 무경을 벌벌 떨리는 눈으로 올려다보았고 무경은 손바닥으로 제 가슴께를 툭툭 두드리며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있는 내가요. 안 그래도 복잡한 일투성이거든요. 그래서 머리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데요.”

    이번엔 그가 제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듯, 중지와 검지로 툭툭툭 빠르게 연신 두드렸다.

    “내 손과 발이 되어줘야 하는 내 비서가. 나를 편하게 만들어줘야 하는 내 비서가. 이거 하나를 알아서 못 해서.”

    긴 팔을 그대로 뻗어 조금 전 이준이 내려둔 페이퍼를 손에 꽉 쥔 무경이 그것을 허공에서 팔락팔락 흔들며 조금 히스테릭한 얼굴로 웃었다.

    “여기 있는 나한테 이따위 별 쓸데없는 일을 가져와서 정하라고!”

    무경은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회사에선 절대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특히나, 제 밑에서 일하는 사람에겐 더더욱 말이다. 늘 선을 넘지 않고 제 아랫사람들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는 몇 안 되는 임원이기도 했다.

    “아예 그냥 삽을 가져와! 내가 가서 땅 파고 씨발 다 할게!”

    회사 밖에선 욕을 입에 달고 살아도, 회사 안에서만큼은 늘 고상한 말만 구사하던 사람이다.

    “서이준 비서님. 서이준 비서. 서 비서. 서이준!”

    직원을 꾸짖을 일이 생길 때도 그는 언성을 높이는 것이 아닌 늘 눈빛으로 상대를 죽였다.

    “당신 제발 똑 부러지게 일 좀 하면 안 되겠냐?”

    그런 사람의 언성이 자꾸만 높아지니 이준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떨어트렸고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태호가 빠르게 뛰어 들어왔다.

    “상무님.”

    이준을 찌릿, 한번 노려본 태호가 양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거친 호흡을 내쉬고 있는 무경의 앞으로 걸어가 폴더처럼 허리를 굽혔다.

    “밖에 듣는 귀가 많습니다.”

    “차태호 실장님.”

    불안정한 호흡을 진정시키려는 듯 깊게 심호흡하며 넥타이 매듭을 다시 쭉 단숨에 끌어 올려 목을 옥죈 무경이, 집무실 내 행거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며 태호를 꾸짖었다.

    “막내 교육 좀 똑바로 시키세요. 내가 진짜 쟤 때문에 돌아버릴 것 같아서 그래.”

    슈트 재킷을 신경질적으로 잡아채 그것을 허공에서 반 바퀴 돌려 깔끔하게 입은 무경이 다시 단정한 목소리로 지시하며 집무실 밖을 나선다.

    “외부 일정 소화합시다.”

    ***

    외부 일정을 모두 다 마치고 동녘으로 돌아가는 세단 안은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한창 배워야 할 때이기에 태호는 이준을 자주 대동하곤 했는데, 조수석에 앉은 그는 여전히 기가 잔뜩 죽어 어깨를 펴지 못했고, 태호는 무경의 옆에 앉아 일정을 조율하고 있었다.

    “내일 백운에서의 만찬은 저녁 6시로 잡혀있습니다. 5시까지 댁으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내일 입으실 슈트는 새로 맞춰놨습니다. 퇴근길에 방 기사님이 댁으로 올려드릴 겁니다.”

    태블릿 PC 커버를 덮은 태호가 대답 없는 무경을 바라봤다.

    “…….”

    그는 이마를 괸 채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를 곁에서 오래 보좌한 수하로서 알 수 있었다.

    무경은 지금, 제 말에 하나도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태호가 맞다. 무경은 지금 혼자만의 복잡한 상념에 잠겨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전부터, 아니 과수원 일 그 이후로, 무경은 같은 상태였다.

    그래서, 히스테리를 부리는 사람처럼 답지 않게 예민하게 굴었던 게 맞다.

    그가 이러는 이유는 하나였다.

    서 씨의 귀싸대기를 날리면서 제 마음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여자를 향한 그 감정의 깊이가 제 생각보다 훨씬 더 깊고 짙다는 것을.

    동녘의 하무경 상무가 언제 폭력 한번 행사하고 다닌 적이 있던가. 오히려 늘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춰 대하려 애썼지.

    우리 동녘 그룹은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은 졸부와는 급이 다르다.

    어릴 적부터 하 회장은 자식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하고 또 가르쳤다.

    그래서, 막내 비서에게도 ‘님’ 자를 꼭 붙여 말하는 내가, 그런 하무경이 시골 순경 하나 때문에 밖에서 손찌검을 행사해? 나를 아는 사람들이 들으면 놀라 뒤로 자빠질 얘기였다.

    지금 이 깊이의 마음으로도 그녀가 해달라는 건 모두 다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전 재산을 달라 하면 내 주머니 속까지 탈탈 털어 모두 다 그녀에게 갖다 바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에서 더 깊어지면, 그때 나는 어떻게 되나.

    이것 참, 난감하게 되었구나.

    무경이 곤혹스럽단 얼굴로 웃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둘 다 포기할 수 없다, 내가 말했던가. 어디에서 나온 근자감인가.

    그 당시엔 여자에 대한 마음이 이 정도의 진심은 아니었나? 그래서 모든 상황을 가볍게 여겼나.

    둘 다 갖는 것은 사실상 현실적으론 불가능한 얘기이니, 나는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여자를 포기하고 동녘을 내가 먹을 것인가.

    여자를 택하고 동녘에서 내쳐질 것인가.

    전자로 가게 되면 나는 여자만 잃는다.

    후자로 가게 되면 나는 모든 걸 잃는다.

    여자를 깨끗하게 단념하는 게 맞다. 그러면 세상이 내 것이 될 테니.

    그럼에도 나는 왜, 내가 여자를 택했을 때 일어날 일들을 머릿속으로 미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있나.

    회장님은 내게 받은 실망감으로 나를 내치실 테고 이 순간만을 기다렸던 하태경과 하가경은 날개 꺾인 나와 내 사람들 모두를 한꺼번에 추락시킬 것이다.

    차라리 회장님께 가서 동정에 호소할까. 무릎 꿇고 싹싹 빌어 봐? 나 한 번만 믿고 동녘 내게 주면 안 되겠느냐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솔깃했다가 이내 고개를 젓는다.

    아니다. 내가 내 아버지를 모르나.

    아버지가 그동안 날 가장 아끼고 예뻐하셨던 이유. 내가 당신의 자식 중, 가장 출중했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런 내가 실망감을 안겨드렸을 때, 그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간, 단 한 번도 실망감을 안겨드린 적 없던 자식이었으니. 그것도 여자 하나 때문에.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쪽이 훨씬 더 아픈 법이다.

    그래서, 나를 더더욱 절벽으로 몰아넣을 양반임이 틀림없다.

    그렇게라도 깨닫고 또 배우라고. 누구보다 더 강해지라고.

    하긴. 회장님 말씀도 틀린 것 하나 없지.

    그깟 여자에, 인정에 휘둘려 회사의 이익을 포기하는 내가 과연, 회장님처럼 동녘을 늘 우선으로 두는 수장이 될 수 있을까?

    오늘이라도 회장님을 찾아가 말할까.

    이 프로젝트는 못 하겠다고. 백야는 그냥 잊으시라고. 차라리 다른 프로젝트를 내게 맡겨달라고. 그건 내가 반드시 기필코 이뤄드리겠다고.

    그러다가 또, 얼마 전 들었던 하 회장의 말을 기억 속에서 더듬거린다.

    ‘니 이거 정말 못 하것냐잉? 강요는 안 할 텡께 못 하거씀 지금이라도 말해라잉. 니가 못 한다 하믄 그 프로젝트는 하태경이한테 갈 텐께. 태경이 아직 밖에 있제?’

    안 되지. 그건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될 일이지.

    아버지께 남은 시간, 앞으로 길어야 11개월.

    그때까지 내가 아버지를 속이고 백야를 지키고 있을까? 길어야 11개월이지 더 짧으면 6개월일 수도…….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이내 멈칫했다.

    차디찬 웃음이 남자의 잇새를 비집고 흐른다.

    아 나 씨발, 이젠 여자에 미쳐 내 아버지가 하루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라고 처앉아있네, 이 불효막심한 새끼가.

    왜? 아주 물 떠놓고 고사라도 지내지.

    무경이 반성하듯 창문에 제 머리를 쿵쿵 박으면서 감고 있는 눈매를 사납게 일그러트렸다.

    그때, 지이잉 하고 핸드폰이 울렸다.

    느른하게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거둔 무경이 제 주머니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꺼내 실눈을 뜨고 액정을 확인했다.

    -하무경 씨. 서만재 씨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잘 마무리 지었어요.

    누군가에게 들어온 메시지에, 창문에 기대고 있던 삐딱한 몸을 곧장 바로 세운 무경이 눈을 제대로 뜨고 나머지 메시지를 빠르게 읽어내렸다.

    -폭력은 잘못된 행동이 맞지만, 그래도 고마워요. 날 위해 나서줘서. 어젯밤에 얼굴 보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안 계셔서요. 이번엔 또 어딜 가셨나요.

    그리고, 시야에 새겨지는 여자의 마지막 다섯 글자.

    -보고 싶어요.

    비현실적인 그 다섯 글자에 지금껏 무경을 괴롭혔던 온갖 고뇌와 짜증이 눈 녹듯 한꺼번에 사르륵 녹아내렸다.

    아주 우습게.

    보고 싶다고, 내가. 채 순경이 날 보고 싶어 한다고.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찼던, 꽉 막혔던 가슴이 한방에 시원하게 뻥 뚫린 기분.

    -보고 싶어요.

    그 아무것도 아닌 다섯 글자에 무경은, 이 어려운 문제에 관한 결정을 아주 쉽게 내릴 수 있었다.

    아주 우습게.

    당신이 지키고 싶어 하는 당신의 터전, 백야마을. 내가 동녘으로부터 지켜줄게.

    그러니 너는 내게, 지금처럼 조금만 더 내게, 까맣게 속아주기를.

    무경의 입꼬리가 행복한 듯 올라서며 조수석에 여전히 침울하게 앉아있는 이준을 나직이 불렀다.

    “서 비서님.”

    “예, 예! 사, 상무님!?”

    화들짝 놀란 이준이 긴장된 낯빛으로 무경을 돌아보았다.

    무경이 그런 이준을 보며 싱그럽게 미소 지으며 부드러운 투로 사과했다.

    “아깐 미안했습니다.”

    “……예?”

    “그 욕실 인테리어 디자인 시안. 다시 좀 볼까요?”

    무경이 손을 뻗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이준이 아, 예! 외치며 제 서류 가방을 다급하게 뒤적여 구겨진 시안들을 그의 손에 잘 쥐여주었다.

    무경은 그 석 장의 페이퍼를 꼿꼿하게 허공에 들고서 시안을 대강 살폈다.

    “셋 다 좋네요.”

    제 입가를 어루만지면서 피식, 웃기도 한다.

    “셋 다 너무 좋은데요, 서 비서님?”

    “……예?”

    하무경의 롤러코스터급 기분 변화에, 태호와 이준, 그리고 방 기사 모두가 무경을 낯선 이 보듯 쳐다봤다.

    제게로 쏟아지는 그 시선을 다 알면서도 무경은, 입가에서 흐르는 웃음을 차마 멈출 수 없었다. 딱히 막지 않았다.

    그래. 날 미친놈이라 부르고 또 생각해.

    나는 정말로 미쳤으니.

    .

    .

    .

    [Peripeteia]

    동녘 그룹의 정문 앞에 무경이 탄 고급 세단이 부드럽게 멈춰 섰다.

    이준이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뒷좌석에서 내린 무경이 풀어헤쳤던 슈트 재킷의 단추를 정갈하게 걸어 잠그면서 동녘 그룹 본사의 높은 빌딩을 감상하듯 올려다보았다.

    찰칵.

    그를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가 핸드폰 카메라 버튼을 누른 건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으며.

    그 누군가는 바로, 민수였다.

    *Peripeteia(페리페테이아): 극적 반전이나 운명이 격변하는 것.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