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53화 (53/116)

53화. 무자비한 유혹

그에게로 끌려가면서 요원의 다리와 부딪친 양은 밥상이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랗게 파동했다.

고개를 사선으로 비틀며 요원의 입술을 한입에 머금은 무경은, 놀라 벌어진 요원의 입술 안으로 검붉은 과일 맛이 나는 액체를 밀어 넣었다.

꿀꺽, 자동반사적으로 제 입안으로 넘어온 액체를 삼킨 요원은 남자의 셔츠 깃을 꽉 움켜잡았다.

남자를 바라보는 눈동자도, 남자의 옷깃을 틀어잡고 있는 손끝도 같은 속도로 흔들렸다.

“…….”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고 요원의 입안에 제 혀를 밀어 넣은 무경이 와인 맛이 남아있는 그녀의 혀를 진득하게 빨아올렸다.

“음.”

요원의 혀를 몇 번 더 빨던 무경이 입술을 떼어냈고, 잡고 있던 요원의 목덜미 역시 스르륵 부드럽게 놓으면서 완전히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아주 맛있는 와인이네요.”

다시 정자세로 자리 잡고 앉은 무경이 요원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다.

쿠쿵, 요원의 머릿속에 또 한 번 천둥이.

콰쾅, 격렬한 번개가 쳤다.

기분 탓일까?

비를 쏟는 밤하늘에서도 환한 빛이 정말로 번쩍거린 것만 같은 것은.

쿵쿵. 쿵쿵. 쿵쿵.

요원의 심장이 또다시 엇박자를 타기 시작한다.

삐이이이익-.

몸속 어딘가에서 다시금 경고음이 울린다.

“제대로 앉아요, 채 순경.”

셔츠 소매의 커프스 버튼을 툭, 풀고 부드럽게 눈을 휘어 미소 짓는 눈앞의 남자가 싱그럽게 말한다.

“우리 이제, 대화라는 걸 해봅시다.”

저를 무자비하게 유혹하면서.

그날 밤.

요원은 무경에게 감정까지 내주면 안 되었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제 인생에 어떠한 파급력을 몰고 올 수 있는지, 요원은 그때 정말로 몰랐었다.

***

그리고 요원이 모르는 건 또 있었다.

왜 분위기가 이렇게 야릇하게 전환됐는지, 에 대해서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가 말했듯 진지하고 또 점잖게 대화만 했었는데 말이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평소와는 달리 신사다운 모습으로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남자의 모습에서 성적 매력을 느꼈는지.

먼저 이 사달을 만들어 낸 건, 놀랍게도, 그리고 뜻밖에도 요원이었다.

정확히는 그가 제게 던진 말 한마디에 머리가 회까닥 어떻게 되어버렸다.

‘고생했네.’

그 말을 들은 순간, 그대로 남자의 넥타이를 끌어당겨 입술을 부딪쳤으니.

입술이 맞물리자마자, 그것이 도화선이라도 된 양 남자 또한 핀트가 하나 엇나간 것처럼 행동했다.

무경은 요원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제 발아래에서 거슬리는 밥상 다리를 발로 쾅, 사납게 걷어차 밥상을 저 멀리로 보내버렸다.

그 힘에 와인 잔이 옆으로 넘어가며 와인이 쏟아졌고. 흠칫 놀란 요원이 수건으로 그 와인을 닦으려 하였지만, 팔뚝이 다시금 붙잡혀 그에게 속절없이 끌려갔다.

그리고, 지금.

무경은 벽에 등을 기대앉아 있었고, 요원은 그의 위에 올라탄 야릇한 자세로 두 사람은 키스했다.

적막한 시골집 안을 가득 메우는 소리라곤, 두 사람의 가쁜 숨소리와 끈적하게 혀가 얽히는 소리와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뿐이다.

오늘은 비가 와 그런지, 톰과 제리는 지붕 위를 뛰어다니지 않았다.

제 위에 앉아있는 요원의 허리에 팔을 감고 키스하던 무경은 곧, 그 손을 서서히 올려 여자의 뒤통수를 꽉 붙잡았다.

무경은 요원의 입술을 머금고 있어도 부족하다는 듯, 그녀의 얼굴을 제게로 더 가까이 밀착시켜 여자의 입술을 계속해서 물고 빨고 핥고 깨물고를 반복했다.

채 순경은 두상도 참 예쁘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손을 아래로 내린 무경이 벨트 버클에 자연스레 손을 갖다 댔다.

요원은 무경의 뺨 위에 두 손을 살포시 얹은 채로, 눈도 지그시 감고, 남자가 하는 대로 제 입술을 온전히 맡긴 채였다.

채 순경은 키스도 참 잘하지.

철컹. 묵직한 금속성이 쟁쟁히 울리면서 남자가 버클을 풀었다.

무경이 고개를 반대편으로 기울여 요원과 키스하며 요원의 바지 안에 제 손을 집어넣었다.

“흡.”

그제야 요원의 감겨있던 눈꺼풀이 번쩍 뜨이면서 남자의 어깨를 뒤로 밀어냈다.

그러나, 남자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더 급해진 듯, 한쪽 팔로 요원의 허리를 휘어잡아 고정하고 요원의 팬티 안에 다른 손을 집어넣을 뿐이다.

남자의 손가락이 어느 한 부분에 깊숙이 들어가려 하자 요원이 남자의 어깨를 뒤로 퍽, 강하게 밀쳐내며 그에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하아, 하아…….”

젖은 제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면서 요원은, 숨을 한꺼번에 토해내듯 그렇게 거친 숨을 내쉬었다.

“하무경 씨, 저는 아무래도 이만 가봐야…….”

요원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제 주머니를 급하게 뒤적거렸다.

“시간이 늦어서요.”

남자의 메탈 시계를 꺼낸 요원이 쭉 뻗어 있는 남자의 긴 다리 옆에 그것을 내려두며 일어서려던 순간이었다.

“채 순경.”

몸을 반쯤 일으켜 세운 요원의 손이 덥석 붙잡혔다.

“혹시 그거 알아요?”

무경은, 요원의 손을 잡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제 머리를 짜증스레 쓸어올리며 요원을 올려다봤다.

“남자가 이렇게 다 세워놓고 싸지를, 아니.”

찡그려진 미간이 그의 현 기분 상태를 나타내는 듯했다.

“사정을 못 하잖아요. 그럼 그 기분이 말이에요.”

하아, 내가 왜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해.

무경이 작게 중얼거리다가 다시 요원을 보며 미소 지었다.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미소였다.

“잘 들어봐요. 그 기분이 말이에요. 체한 것처럼 어딘가가 답답하고. 그리고 진짜, 진짜…….”

무경이 힘을 주어 요원을 제게로 훅, 당겼다.

쿵. 요원은 무릎을 꿇은 자세로 그의 앞에 다시 몸을 낮추게 되었고 무경은 그녀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곧 제 이마를 요원의 어깨 위에 툭, 기대며 칭얼거리듯이 나직이 중얼거린다.

“……진짜 너무 아파.”

쿵. 요원의 심장이 어딘가로 추락한다.

콰쾅. 천둥 번개는 물론이고 이제는 소용돌이까지 급속도로 휘몰아치며 요원의 머릿속을 정신없이 헤집었다.

눈앞이 다 아찔해져서 요원은 그대로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을 째깍째깍 조금 더 전으로 되돌린다.

두 사람이 대화만 하던, 그 시간으로.

***

“하무경 씨는 형제가 있어요?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시는지.”

포크로 샐러드를 뒤적거리던 무경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부모님 계시고. 형 하나에 누나 하나에 남동생 하나. 뭐, 그 정도.”

“와, 정말요? 너무 부러워요.”

무경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포크를 내려두며 뭐가요, 라고 조금은 까칠하게 물었다.

“저는 외동이라 늘 외로웠거든요.”

방울토마토를 포크로 콕 찍은 요원이 포크를 입가로 가져가며 또 빙그레, 눈을 휘어 웃는다.

“그래서 예전부터 형제가 많은 친구가 참 부러웠어요.”

“내가 아까도 얘기했을 텐데. 늘 예외는 있다고.”

“또 예외예요?”

“우리 형, 누나는 말이에요. 내겐 남보다 못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럴 리가요. 괜히 피는 물보다 진하단 말이 있는 게 아닌데요. 단지 표현을 못 하는 것뿐이겠죠.”

“아니.”

남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채 순경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느른하게 팔짱을 끼며 비 내리는 바깥세상으로 눈을 돌린 무경이 굳게 다물린 입술을 열었다.

“가끔은 나와 같은 피가 도는 그들 때문에 잠 못 이룰 때도 있는데요.”

빗소리에 섞여드는 남자의 목소리에서 구슬픔을 느꼈던 것도 같다.

“왜…… 가족 때문에 잠을 못 이루세요?”

“왜요, 라고 묻는다면 글쎄요.”

남자가 세살창 밖을 바라보며 피식, 웃는다.

그러다가 그 시선을 서서히 다시 요원에게로 돌려 눈을 맞추며 그 누구에게도 여태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본심을 조금 꺼내 보였다.

“무서워서?”

정말이다. 어쩔 땐, 자다가도 미친놈처럼 벌떡 일어나 제 몸을 샅샅이 살피기도 하는데.

“가족이…… 무섭다고요?”

요원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언에 고개가 자동으로 옆으로 기울어졌다.

“왜, 무서운데요?”

“글쎄요. 그냥 무서워요. 그냥.”

무경은 다시 실소하며 요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착용했던 넥타이를 한 손으로 잡아 가슴께로 빠르게 비틀어 내렸다.

맞다. 나는 사실 그들이 무섭다.

우습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해왔던 건, 내게 최면을 걸기 위해서였다.

나는, 언젠가 내 등 뒤에 칼을 꽂을 그들이 진심으로 무섭다.

그래서 나는, 채 순경 나는.

그들보다 더 높은 곳에 있어야 해.

그러기 위해선, 당신의 어머니가 사랑해 마지않던, 당신들이 사랑하는 이 백야마을을 먹어야만 하는데. 밀어버려야만 하는데. 없애야만 하는데.

내가 살기 위해선 그래야만 하는데.

그런데 나는 왜…….

복잡한 심경의 무경이 제 와인 잔에 와인을 콸콸콸, 넘치기 직전까지 가득 채워 한잔 그대로 들이켰다.

백야마을에 이사 온 첫날, 요원과 대청마루 위에서 식사하면서 어렴풋이 들었던 어머니에 관한 얘기가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그날, 별 감흥 없이 ‘유감이네요.’라고 감정 없이 말했던가.

유감은 유감이었다. 당신의 사정 따위 딱히 배려할 마음도,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던 것을 제외하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다.

나는 당신이, 그리고 당신의 사정이, 정말로 신경 쓰여.

그래서 문제야. 존나 큰 문제.

“어머니가 왜 돌아가셨어요.”

무경의 돌발 질문에 잠시 움찔거렸던 요원은 곧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뺑소니요.”

의외의 대답에 무경이 눈썹을 한번 올렸다.

“새벽에요. 과수원 가시다가. 운동하신다고 과수원까지 걸어 다니시고 그랬거든요.”

무경은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 있다.

“범인은 결국 못 잡았어요.”

상대에게 감정이 없는 상태에서 위로는 오히려 더 쉽다는 것을.

“인적 하나 없는 새벽이었고. 그 길은 CCTV도 없었거든요. 지금처럼 차량마다 블랙박스가 달려있던 때도 아니었고.”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싶은 상대의 앞에선, 그 어떠한 말도 쉽게 꺼낼 수 없다는 것을.

“저흰 정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요원은 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이젠 다 잊었나 싶다가도, 가끔은 소름 끼칠 때가 있어요. 그 범인이 혹시 외부인이 아니라 이 근처에 사는 사람은 아닐까. 나와 웃는 얼굴로 한 번쯤은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은 아닐까. 뭐 그런 생각들에…….”

요원이 입을 꾹 다물자 무게가 상당한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한참 동안, 그 누구도 함부로 끼어들 수 없는 침묵이 흐르나 싶더니.

“고생했네.”

어느 때보다 진심 가득한 남자의 목소리가 요원의 귓전을 착 감아 살며시 간질인다.

“고생 많았어.”

요원이 조금 놀란 얼굴로 무경을 쳐다봤다.

무경은 그대로 팔을 뻗어 요원의 머리 위를 상냥하게 쓰다듬으며 또 말했다.

“고생했어.”

그 순간이다. 요원의 머리가 회까닥 어떻게 되어버린 것은.

그대로 팔을 뻗어 가슴께에서 덜렁거리는 남자의 넥타이를 틀어잡은 요원이 그를 제게로 확, 끌어당기며 격렬하게 입 맞춘 순간은.

또 다른 음란한 밤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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