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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과백야-52화 (52/116)
  • 52화. 훔쳐 가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

    이봐요, 어르신! 이라고 무경이 외치기도 전에 부임이 먼저 소리쳤다.

    “니는 말이여! 그런 허황된 꿈을 애초에 꾸덜을 말어! 시방 니 힘으로 돈을 벌 생각을 하란 말이여!”

    “어르신. 제 말뜻은 지금 그런 게 아니라요!”

    “그 입 안 다무냐, 이 시끼야? 성님, 저 백수 시끼 저거 언제 철든다요?”

    아픈 뒤통수를 부여잡은 채, 부임을 황당무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무경의 귓전에 갑순의 점잖은 음성이 스며들었다.

    “아야. 우덜은 말이여. 일본 식민지 시절부터 6.25 전쟁통까지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다.”

    갑순이 무슨 말을 할지 대강 예측한 무경이 무언가 잘 풀리지 않는 불편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자고로 우리 민족은 말이여? 왜놈들한티 아적 이 한이 남아가꼬 말이여. 머시든 빼앗기는 데에 진절머리 나는 사람덜이라고.”

    그러니까 지금 재개발 이야기에, 왜놈까지 가는 거 아니야.

    무경이 심란한 표정을 애써 감추지 않으며 느른하게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또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래, 맞아. 나도 일본 놈들이 독도가 자기네들 땅이라고 말할 때마다 존나 빡이 치긴 해. 중국놈들이 김치와 한복이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할 때마다 존나 빡이 돈다고. 애초에 그럴 주장할 권리도 없는 것들이.

    “니 말이여? 우덜 나라가 왜 다른 나라에 비해 좀도둑질이 덜한 줄 아냐잉?”

    무경이 어쩐지 흥미로운 답변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슬며시 눈썹을 올렸고 갑순은 단단한 투로 말했다.

    “빼앗기는 심정을 우덜은 안다고잉.”

    그러고 보니 또 그렇네.

    우리나라에 방문한 외국인들이 가장 신기해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카페에 고가의 노트북이고 핸드폰이고 모든 것을 다 놔두고 자리를 잠시 비워도, 아무도 그것들을 훔쳐 가지 않는 나라.

    훔쳐 가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

    “12억이 머시여.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 마당에 우덜이 그깟 돈 몇 푼에 우덜의 이 아름다운 고향을 내주것냐잉? 너 같음 내주거써? 12억이 아니라 대통령이 와봐라. 우덜이 이 백야를 내주나.”

    하긴. 만약, 일본이나 중국이 우리에게 돈을 줄 테니 대한민국의 독도와 김치와 한복을 내놓으라 한다면.

    우린 과연 내줄 수 있나?

    나의 대답은 아니다.

    가만있어 봐.

    그럼 지금 우리 동녘이 백야 입장에선.

    씨발, 왜놈이야?

    이거 정말, 쉽지 않겠는데.

    눈썹을 매섭게 일그러트린 무경이 끙, 신음하며 제 배를 순간적으로 움켜잡았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하여 위가 또 쓰라렸기 때문이다.

    ***

    백야마을에 반가운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퇴근 후, 요원이 무경의 집 앞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7시가 훌쩍 넘어서였다.

    투명 비닐우산을 한 손에 쥐고 남자의 집 철제문을 쿵쿵, 두드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렸다는 듯 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

    큼직한 검은 우산을 쥔 남자를 바라보는 요원의 눈이 일순 흡, 커다랗게 뜨였다.

    아까 다방에서 보았던 모습보다 더 차려입어 화려해진 남자의 비주얼 때문이었는데.

    깔끔하게 넘긴 포마드 스타일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글렌체크 슈트가 그의 클래식한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는 마치, 한 마리의 고고한 학과 같다.

    투둑. 투둑. 투둑.

    우산 위를 때리는 빗방울 소리와 개굴개굴 개굴, 논에서, 밭에서, 하천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정겨운 개구리 울음소리.

    그리고, 이런 시골 환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눈앞의 남자가 묘하게 어우러져 주변을 환히 빛낸다.

    “안 들어와요?”

    남자가 몸을 살짝 옆으로 비켜주며 근사하게 미소 짓는다.

    그 순간에. 그래.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쿠쿵, 요원의 머릿속에 천둥이 쳤고. 콰쾅. 번개도 쳤다.

    쿵쿵. 쿵쿵. 쿵쿵.

    그때부터, 심장이 제멋대로 엇박자를 타기 시작한다. 페이스를 완전히 벗어났다.

    삐이이이익-.

    요원의 몸속 어딘가에서 요란스러운 경고음이 울려대며 제게 위험을 알렸다.

    대청마루를 지나 남자의 집 안으로 들어간 건, 그가 혼절했던 그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실례합니다.”

    요원이 비에 조금 젖은 어깨 위를 툭툭 털며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양은 밥상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 위에는, 밥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봉골레 파스타와, 리코타 샐러드와 와인 한 병과 와인잔 두 개가 정갈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저걸 다 어디에서 사 오신 거예요?”

    요원이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막 수건을 가지고 나오는 무경을 보며 물었다.

    “이 촌구석에서 저런 음식을 어디에서 사요. 재료 사서 내가 만들었지.”

    “하무경 씨. 자꾸 저희 동네를 촌구석이라고 표현하시는데요.”

    “촌구석 맞잖아. 배달도 하나 안 되고. 마을버스는 오후 5시면 끊기고. 그 시간이면 서울에선 직장인들 퇴근도 안 한 시간이에요. 그뿐이야? 시내에서 가장 큰 마트라고 찾아갔는데 어떻게 된 게 치킨 스톡이 하나 없어.”

    절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말발을 선보이며 무경이 요원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젖은 어깨를 닦으라고 가볍게 턱짓까지 하면서.

    “감사합니다.”

    마땅히 받아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 수건을 얌전히 받아든 요원이, 제 어깨 위를 툭툭 털었다. 무언가 억울해하면서.

    “그래서 맛은 장담 못 해요.”

    글렌체크 슈트 재킷을 벗어 아무 데나 휙, 집어던진 무경이 촌스러운 밥상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차려입으셨어요? 설마 시내에서 가장 큰 마트 가신다고 그렇게까지 꾸미신 건 아니죠? 그거 진짜 촌스러운 행동인데.”

    수건을 잘 개서 바닥 위에 내려둔 요원 역시, 그의 맞은편에 다리를 옆으로 비스듬히 풀어 앉았다.

    “내가? 내가 시내 마트 나간다고 이렇게 꾸몄다고?”

    이젠 헛웃음도 나오질 않고 무경은 자포자기한 한숨과 함께 와인병을 그러쥐며 대답했다.

    “데이트에 트레이닝복 차림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있지. 내가 그렇게까지 개차반은 아니라니까?”

    와인 오프너를 코르크 위에 박아넣으면서 무경은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데이트요? 지금 이거요?”

    요원이 손가락으로 자신과 무경을 번갈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거?”

    쿠쿵, 무경의 머릿속에 조금 다른 의미의 천둥이 쳤다.

    “데이트는 좀, 거창한 거 아닌가요?”

    그리고, 콰쾅. 번개도 쳤다.

    무경의 눈 밑이 잠시 잘게 경련한다.

    “나 참.”

    코르크에 박아 넣은 오프너를 돌리면서 무경은 다시 기가 찬 듯 웃었다.

    코르크를 펑 따면서 동시에 헛 하고 나직한 실소를 다시 한번 터트리기도 했다.

    “잠까지 같이 잔 사이에 이게 데이트가 아니라고 하면 나더러 뭘 어쩌란 거야.”

    “아니요. 전 그런 뜻이 아니라요.”

    “파스타에. 샐러드에. 와인에. 젊은 남녀 둘. 이게 데이트가 아니면 뭡니까? 응? 부녀회예요? 동창회인가? 채 순경, 나랑 지금 면접 봐요?”

    사람의 말문을 틀어막는 화법에 잠시 입을 벌리고 있던 요원이 불시에 눈매를 찡그렸다.

    “그런데 하무경 씨는 왜 자꾸 말씀을 그렇게 하시죠?”

    “내가 말씀을 또 어떻게 했죠.”

    “좋게 말씀하셔도 되잖아요. 왜 항상 날이 서 있어요? 지금 나랑 싸우잔 거예요? 상대랑 싸우고 싶어서 그래요?”

    “이 정도로 날을 세웠다고 하면 정말 곤란한데요.”

    “봐요. 또 그러시잖아요. 저 그냥 갈까요?”

    요원의 강력한 한 수에 이번엔 무경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자,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순식간에 찾아왔고 빗소리는 더욱 커다랗게 스며들었다.

    “하. 죄송해요, 하무경 씨.”

    요원이 반쯤 열린 세살창을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저도 날을 세우고 있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네요. 오늘 좀, 여러모로 피곤해서요.”

    마음에도 머릿속에도 매캐한 연기가 꽉 들어찬 기분이었다.

    조금 전, 그에게서 느꼈던 감정을 최대한 외면하고 싶었다.

    그래서, 평소와는 달리 예민하게 반응한 모양이다.

    아직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 없는 이 남자에게 마음마저 줘버리면, 감정적으로도 휘말리면.

    그땐 정말 큰일 날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이 지난번부터 저를 지독하게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를 조금 더 알아가기 전까지는, 최대한 몸을 맞대는 행위도 자제해야 할 것 같다 다짐했다.

    분명, 그런 마음으로 마당을 밟고 지나왔는데…….

    막상 남자와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니, 그 마음이 서서히 변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오늘 밤 잘하면 나는, 남자와 하룻밤을 더 보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머릿속뿐만 아니라 그 생각이 온몸을 지배한 것 같았다.

    몸이 벌써 남자를 원하고 있는 듯하니. 상상만으로도 단전이 찌르르르 울릴 만큼.

    비 내리는 백야마을의 밤은 운치 있고, 대청마루 위를 적시는 빗소리는 더욱 운치 있으며, 제 눈앞의 남자는…….

    “채 순경. 와인 테이스팅 하는 법에 대해 좀 알아요?”

    요원이 세살창으로 향해있던 고개를 서서히 돌려 다시금 무경을 바라봤다.

    “테이스팅이요?”

    요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대답했다.

    “글쎄요. 잘 몰라요. 저는 와인보단 막걸리를 더 선호해서.”

    “테이스팅 과정엔 네 가지가 있어요.”

    품격있는 자세로 요원의 잔 위에 와인 병을 비스듬하게 기울여 적색의 와인을 채운 무경이, 이젠 그 병을 제 잔 위로 옮겨와 똑같은 적색의 와인으로 잔을 적당히 채운다.

    “보고 맡고 맛보고 생각하기.”

    와인 병을 장판 위에 내려둔 무경은 와인잔의 스템 부분을 중지와 검지 사이에 끼운 뒤 허공 위로 가뿐하게 들어 올렸다.

    스웰링 후, 코를 대고 향을 맡는 무경의 검다 못해 푸른빛까지 감도는 듯한 눈동자가 와인 잔을 바라보다가 곧 요원을 직시했다.

    “그런데 사실.”

    남자의 그 강렬한 눈빛에 가슴이 꿰뚫리는 듯한 기분을 받으면서 애꿎은 제 옷깃을 꽉 틀어쥐고 숨을 죽이는 요원이다.

    “이건 하수들이나 하는 거고.”

    다시 스웰링을 한 무경이 피식, 웃으며 다음 말과 함께 와인을 제 입에 한 모금 가득 머금었다.

    “우리 고수들은 말이에요.”

    와인을 입안에 머금은 그가 팔을 쭉 뻗었고, 남자의 손에 목덜미가 붙잡힌 요원은 순식간에 꼼짝없이 그에게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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