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대화만 할게
도현과 요원의 웃음소리가 별빛다방 안을 가득 메운다.
별 웃기지도 않은 대화였는데 두 사람은 코드가 잘 맞는지 함께 웃었다.
여기에서 웃지 않는 단 한 사람, 나란히 앉은 도현과 요원을 서늘하게 노려보고 있는 무경뿐이었다.
“채 순경님,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재밌으신 분이네요.”
얼씨구.
“제가요? 그런 말은 또 처음 듣는데요. 김 작가님이야말로 되게 재밌으세요.”
절씨구.
“아니에요. 채 순경님 진짜 위트 있으세요.”
도현이 제가 시킨 생강차를 한 모금 후루룩 마시면서, 요원의 농담을 되새기다가 또 한 번 웃었다.
아주 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꽹과리 치고 드럼 치고 피아노 치고 다 하고 앉아있네.
“…….”
무경은 아까부터 웃지 않는 검은 눈동자로 그 두 사람을 직시하고 있었는데, 그의 기운이 범상치 않음을 깨달은 도현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채 순경님. 혹시 면사무소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제가 아직 길을 잘 몰라서요.”
“그럼요. 제가 모르면 또 누가 알까요.”
“하하. 그러네요. 순경분께 제가 크나큰 실례를 범했네요.”
그래. 넌 존나 실례를 범한 거야. 그러니 이제 그만 얌전히…….
“그럼 시간 되시면 저 길 좀 알려주실래요? 제가 보기보다 길치라서요.”
“아니, 근데 씨발.”
인내심이 바닥을 친 무경의 삐딱한 눈동자가 도현에게 직선적으로 꽂히며 거침없이 뇌까렸다.
“요즘 같은 세상에도 길치가 있나?”
“헉. 하무경 씨!”
무경이 뱉어낸 까칠한 욕설에 요원이 그를 만류하듯이 언성을 높였다.
당연했다. 요원은, 무경과 도현이 어떠한 사이인지 전혀 알 길이 없었으니 말이다.
반면 도현은, 남자의 이러한 모습이 너무도 익숙하다는 얼굴로 무경을 무던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작가 양반. 이거 없어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든 무경이 그것을 허공 위에 까딱 한번 흔든 뒤,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
“없으면 하나 사든가. 있으면 인터넷 뒀다가 뭐하나. 요즘은 내비도 잘 나오던데. 애새끼도 아니고 다 큰 어른 새끼가 뭔 길을 알려달래, 쪽팔리게.”
무경의 태도가 너무도 삐딱하여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은 요원이 두 남자 사이에 냉큼 껴들었다.
“그만하세요, 하무경 씨. 김 작가님. 저 마침 나가려던 길이니 알려드릴게요. 저와 같이 나가세요.”
요원이 테이블 위에 얹어놨던 순경 모자를 들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순간이었다.
“채 순경.”
그대로 손을 뻗어 요원의 손목을 덥석, 붙잡은 무경이 짜증으로 일그러진 얼굴 혹은 애타는 얼굴로 묻는다.
“나는?”
“하무경 씨요?”
“나랑 대화하고 있었잖아. 그럼 나랑 대화를 마무리 지어야지. 아직 나이밖에 못 들었는데 이게 대화예요?”
요원이 난처한 얼굴로 도현을 힐끗거렸다가 제 손목을 붙들고 있는 무경의 손을 쳐냈다.
“죄송하지만요, 하무경 씨.”
제 손을 무슨 음식 위에 앉은 똥파리 쳐내듯 쳐내는 요원의 태도에, 무경은 적잖은 충격을 받은 얼굴을 했다.
“전 아직 근무시간이고 제겐 마을 사람을 도와드리는 게 우선입니다. 그게 제 일이에요.”
“나는 마을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인지, 요원을 향하는 목소리도 죄다 삐딱선을 탄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지금.”
“그런 뜻으로 들리는데요, 지금.”
“나중에 얘기해요. 네? 가세요, 작가님.”
작가님이 존나 다 얼어 뒤졌나.
“어딜 가.”
아래턱에 힘을 꽉 준 무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말 아직 안 끝났잖아.”
딱 두 걸음 만에, 빠르게 걷는 요원의 뒤를 금세 따라잡은 무경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홱 돌렸다.
거센 악력에 몸이 반 바퀴 되돌려진 요원은 이제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무경을 올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
당황한 요원의 얼굴을 극명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한참을 바라보던 무경이 입을 열었다.
“이따가 퇴근하고 우리 집에 올래요?”
“하무경 씨네요?”
“아니. 와라. 오늘은 달라는 소리 안 하고 넣고 싶다는 소리도 안 하고 채 순경이 원하는 모습으로 진지하고 또 점잖게 대화만 할 테니.”
무경이 요원의 손에 들려있는 지갑을 힐끗 쳐다보다가 그것을 조용히 빼앗아 들었다.
“저녁 먹지 말고 와요. 우리 집에서 같이 먹게.”
무경이 그 지갑을 요원의 순경복 앞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생글 웃었다. 찻값은 제가 계산하겠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이따가 꼭 와요. 명분이 필요하다면 내가 지금 만들어 드릴 테니.”
이제 무경은 제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잘그락 풀었다.
요원의 손목을 잡아 그 손목에 능숙한 손길로 채우다가, 시계가 맞지 않고 겉돌자 피식 웃으며 그것을 다시 빼내 요원의 손에 꽉 쥐여주었다.
“방금 난 시계를 분실했고. 채 순경이 찾은 겁니다.”
“…….”
“이따가 꼭 돌려주러 와요. 마을 사람 도와주는 게 우선이라면서.”
넋을 놓고 남자를 바라보던 요원이 제 손목을 붙잡고 있는 무경의 손을 황급히 떼어내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이따가…… 상황 봐서요.”
어느 때보다도 얼굴을 벌겋게 붉힌 요원이 무경의 시계를 제 주머니에 욱여넣는 모습이 보인다.
무경은 그 모습에 또 한 번 웃음 지었다.
“가시죠?”
도현에게 나가잔 신호를 보낸 요원이 다방 밖을 빠르게 빠져나갔고 도현은 이 모든 상황을 꽤 굳은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여자가 나가고 없는 자리를 바라보는 무경의 표정을 말이다.
제게로 닿는 시선을 알아차린 무경의 검은 시선이 도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옥죄며 말한다.
“우린 나중에 얘기하자.”
금세 180도 달라져 낮게 깔린 무경의 목소리에 도현이 제 두 손을 앞으로 공손하게 모으며 그의 앞에서 정중하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그러고는 요원의 뒤를 따라 별빛다방을 빠져나갔다.
“…….”
다시 자리로 돌아가 팔짱을 끼고 앉은 무경이 낮게 헛웃음 쳤다.
민심을 얻기도 부족한 시간에 나는, 여자 마음 하나 얻어보겠다고 아주.
근 한 달 가까이 됐는데 성과를 낸 게 하나 없다. 그런데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얼 하고 있나.
“하아…….”
자괴감에 빠진 얼굴로 이마를 괸 채 잠시 눈을 감았던 무경이 갑자기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재미있다는 듯 킥, 한번 실소했다.
갈수록 모든 상황이 예상을 빗나간 채 너무 흥미롭게 돌아가 웃음을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죄다 변수야.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갑자기 무경의 핸드폰이 떨었고 액정엔 [하태경 부사장 18N]이란 글자가 선명히 번쩍거렸다.
“…….”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무경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의 얼굴에선 이제 그 어떠한 웃음기도 하나 찾아볼 수 없었고 대신 살벌하리만큼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이 다방 내의 온도를 더욱 낮췄을 뿐이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멈추지 않고 울리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검지로 테이블 위를 툭툭툭, 박자에 맞춰 두드리던 무경이 느릿하게 손을 뻗어 핸드폰을 귓가에 밀착시켰다.
“하무경입니다.”
[회사에 또 없더구나. 요즘 어딜 그렇게 다니냐.]
그대로 팔을 뻗은 무경이 조금 전까지 요원이 마시던 찻잔을 손에 그러쥐며 답했다.
“공사가 다망하여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을 시간이 없네요, 제가.”
요원이 입술을 댄 자리에 제 입술을 갖다 대고, 남은 차를 깔끔하게 모두 다 마신 그가 잔을 달칵 내려뒀다.
“무슨 일로 제게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제 젖은 아랫입술을 엄지로 슥 문질러 닦은 무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뒷주머니로 손을 뻗어 지갑을 잡아챘다.
[사장 취임식이 예정보다 빨리 진행될 것 같다. 회장님의 지시고.]
“그렇습니까. 축하드립니다.”
무경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카운터 앞에 섰다.
[토요일에 시간 좀 내라. 백운에서 고마운 사람들과 식사 한 끼 할 예정이니.]
고마운 사람들 좋아하네.
“제가 부사장님께 고마운 사람이었습니까.”
[고맙기만 할까. 가장 축하받고 싶은 사람인데.]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참석해야죠.”
무경은 저를 보며 얼굴을 붉히는 젊은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며 싱긋, 친절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언젠가 형님께서도 저를 꼭, 같은 마음으로 축하해주시리라 믿겠습니다.”
[그런 일이 하 상무에게도 생긴다면 말이다.]
하태경이 짧게 조소하는 것이 무경에게 생생히 전달됐다.
이 씨발놈이.
무경이 괜히 하태경을 [18N]이라 저장한 것은 아니었다.
***
별빛다방에서 나오자마자 무경은 정말 백수라도 된 양 건들거리며 마을회관 안으로 들어섰다.
어르신들의 인심을 사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라면 또 노력이라고 해야 할까.
“이잉, 백수 총각. 니 마침 잘 왔다. 한 젓가락 하고 가야.”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앉아 굴전을 부치던 백야마을 어르신들이 무경을 발견하곤 곁으로 오라 손짓했다. 개중엔 갑순과 부임도 함께였다.
“또 멋하고 싸돌아 다녔냐잉.”
무경이 갑순의 곁에 앉자 갑순이 그에게 나무젓가락을 건네며 꾸짖는 투로 물었다.
“제가 이 나이 먹고 어르신께 허락이라도 받고 돌아다녀야 합니까?”
“야 이눔 시끼야!”
부임이 또 호통쳤고 무경은 고막이 나갈 것 같은 제 귀를 사납게 마구 문질렀다.
백야마을 어르신들의 소소하고도 행복한 시간은 계속되었다.
“만약, 백야마을이 재개발에 들어간다면.”
무경이 느닷없이 던진.
“어르신들은 어떨 것 같습니까.”
그 질문 전까진 말이다.
“그게 시방 먼 소리래? 재개발이라니.”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에.”
사용하지도 않은 젓가락을 내려둔 무경이 어르신들을 바라보며 생글 웃었다.
재개발보단 사실, 강제 철거라고 표현하는 게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이 마을 어르신 그 누구 하나도, 이 터전을 나갈 마음은 없어 보이니.
침묵이 흘렀다.
마을회관 내의 어르신들은 마치, 내일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전해 들은 사람들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무경은 그들을 비웃듯이 싱그럽게 웃는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물론 그냥 한다는 건 아니고. 한 가구당 뭐, 12억씩 준다고 하면요.”
그리고 또 잔인하게 물었다.
“조용히 합의 보고. 나가시겠습니까?”
그로부터 얼마의 정적이 더 흘렀을까.
퍽! 소리와 함께 무경의 머리가 기우뚱 앞으로 휘청인 건 불시에 벌어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