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50화 (50/116)

50화. 별빛다방에 별이 내렸다

주연은 무경에게 하관이 붙잡힌 채로 시선을 틀어 다방 입구를 살폈다.

“놓지 그래? 놓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주연이 목소리를 있는 대로 낮춰 작게 읊조렸다.

험악하게 구겨진 얼굴을 비스듬히 돌린 무경은 주연이 보고 있는 사람을 쳐다봤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무경의 입술이 일순 작게 떨어졌다.

막, 순경 모자를 벗는 요원의 새하얀 얼굴이 제 시야에 꽉 들어차서.

그녀다. 나를 밤새도록 잠 못 들게 한 여자. 나를 밤새도록 끙끙 앓게 한 여자.

어쩌면, 내 불안함의 모든 이유.

뛰어오기라도 한 건지 그녀의 가슴이 헐떡이고, 두 뺨은 평소보다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하무경 씨?”

그녀의 부름에도 무경은 답할 수 없었다.

“하무경 씨.”

무경은 제게로 한 발 두 발, 꽃잎처럼 다가오는 요원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였다.

좋아하는 배우가 주연인 영화의 한 장면, 혹은 청량한 광고를 보는 듯한 눈동자로 요원을 제 시야에 꼭꼭 새겨넣었다.

조금 전까지 그에게 억세게 붙잡혀 뻐근한 제 하관을 문지르던 주연은, 생전 처음 보는 무경의 표정에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여자를 바라보는 하무경의 눈빛은 저렇구나.

누군가에게 남자이고 싶은, 하무경은.

쿠쿡, 주연이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핸드백을 챙겨 든 주연이 말했다.

“대답 잘 들었어.”

주연이 옆에서 뭐라고 떠들어 대든 말든, 무경의 귀엔 지금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제 앞에 꽃내음을 풍기며 멈춰 선 이 여자 때문에 말이다.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혀 요원을 올려다보는 무경의 가슴이 이상한 박자로 뛰었다.

자꾸만 삐끗 무언가가 제대로 엇나간 느낌이 든다.

나사가 하나 빠져 기계가 겉도는 느낌.

“하무경 씨. 괜찮으시냐고요.”

삐딱하게 서있는 주연을 힐끔, 쳐다봤던 요원이 서서히 허리를 굽히고 무경의 귓가에 제 입술을 가까이 붙여 작게 속삭였다.

“저분. 하무경 씨 좋다고 따라다니는 스토커라면서요. 맞아요?”

훅, 갑자기 다가온 요원의 향기에 무경은 순간적으로 숨이 흡, 하고 멎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이면 테이블 밑으로 손가락 두 개만 펼쳐보세요.”

숨을 들이켠 만큼 뱉을 수 없었다.

“정말이라면, 제가 저분이 다신 하무경 씨 앞에 오지 못하게 조치를 바로 취해드리겠습니다.”

그저, 그대로 숨을 참은 채 멈춰있을 뿐.

“하무경 씨도 뉴스 보셔서 아시겠지만. 스토킹은 남녀노소 불문한 아주 심각한 범죄입니다.”

요원이 마지막 말과 함께 제 귓가에서 서서히 멀어진다.

“그러니, 어서요.”

꽃내음도 함께 멀어져간다.

무경은, 다시 허리를 세우고 제 손에 집중하는 요원의 모습을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이내 눈매를 찡그렸다.

그걸 정말로 믿었나? 착해 빠져선.

이 백야마을 사람들은 어딘가가 이상해. 정작 혈육들은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건만. 대체 왜, 백야마을의 이들은 나를 지키려 하는가.

얼마의 시간이 더 흘렀는지는 잘 모르겠다.

“빌어먹을, 주연아.”

침음과도 같은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불시에 튀어나왔다.

“자기야. 지금 나 부른 거야?”

핸드폰을 톡톡 터치하며 어딘가에서 대기하고 있을 기사에게 메시지를 보내던 주연이 눈동자만 치떠 무경을 쳐다봤다.

“니들이 맞다.”

무경은 재미있는 장면을 보는 사람처럼 요원을 보며 피식 웃었고, 또 주연에게 말했다.

“그래. 니들은 나를 존나게 걱정해야 해.”

내가 어쩌면, 백야마을을 차지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미래가 보인다. 하무경 인생이 좆되는 그림이.

“채 순경.”

선득해진 마음과는 달리, 무경은 요원의 옷깃을 잡아 제게로 천천히 끌어당기며 웃음기 밴 느른한 음성으로 말했다.

“큰일 났어.”

요원은 그의 손길에 순순히 끌려가다가 일정 거리에서 멈춰 서려는 듯 소파 팔걸이를 꽉 붙잡았다.

“왜요, 하무경 씨. 무슨 일인데요?”

저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요원의 얇은 목덜미를 큼직한 손으로 뒤덮은 무경은, 금방이라도 그녀에게 키스할 것처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요원을 올려다보며 매혹적으로 웃었다.

“나 말고.”

“…….”

“채 순경, 너.”

그래, 맞다. 채 순경 자기는 정말 큰일 난 거다.

하무경은 채요원에게 완전히 감겨버렸고.

그리고 나는 앞으로 너에게 더, 지독히도 감겨줄 작정이었으니.

그렇게, 별빛다방에 별이 내렸다.

***

주연이 떠나고 별빛다방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무경은 요원에게 주연과의 관계를 사실대로 실토했다.

친구라고 하기엔 사이가 그리 좋은 건 아니고, 그저 지인이라 하기에도 모호하다고.

또 거짓말이었나, 싶었으나 정말로 스토커처럼 자기를 귀찮게 하는 존재라고 하기에 또 참았다.

요원은, 제가 시킨 오미자차를 티스푼으로 휘휘 저으면서 계속해서 시계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무경은 또 웃음이 흘렀다.

그동안 늘, 제가 여자들 앞에서 해오던 행동이었으니.

“나랑 있는 이 시간이 꽤 지루한가 봐.”

무경이 제 메탈 시계를 손가락으로 탕, 한 번 튕겼다.

“그런 게 아니라.”

요원은 에어컨 바람이 싸늘한지 찻잔을 두 손으로 꼭 그러쥐었다.

“하무경 씨 이상 없는 것 확인했으니 저도 그만 들어가봐야 하지 않나, 싶어서요.”

무표정한 얼굴이 꼭 인형 같다는 생각을 했다.

“보고 안 하고 나왔거든요.”

“이상 있었다고 보고하면 되죠. 하무경이 어떤 여자한테 당하기 직전이었다고 하면.”

무경을 잠시 물끄러미 응시하던 요원이 제 상체를 조금 숙여 무경에게로 가까워졌다.

“하무경 씨는…….”

무경은 제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깔아 요원의 말간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존나 이대로 끌어당겨 키스하고 싶다고.

“살면서 진지해 본 적이 없으시죠?”

그런 생각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질문이 날아 들어와 남자의 가슴에 퍽, 강하게 박혔다.

잠시 찡그렸던 눈매를 부드럽게 휘어 웃으면서 무경은 팔짱을 꼈다.

“왜 없을 거로 생각해요?”

“그냥, 그래 보여서요.”

“내가 가벼워 보인단 뜻인가?”

“조금은요. 네.”

요원의 단호한 대답에 무경은 엄지로 제 미간을 긁어 올리며 낮게 웃었다.

만약 요원이, 동녘 그룹의 하무경 상무와 딱 2분만 앉아있어도 그런 생각이 바뀔 텐데 말이다.

물론, 그건 일 적인 이야기고.

따로 반박할 수 없는 까닭은, 무경 역시 요원을 만나고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끌리는 여자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가벼워질 수 있는지에 대하여.

무경은 평소보다 건조해진 제 아랫입술을 엄지로 문지르면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가벼워 보여서 싫다는 건지, 그래서 좋다는 건지, 도저히 가늠이 안 되네.

내가 치는 농에 웃어주고, 내가 던지는 음담패설에도 싫은 내색 한번 안 하고, 내가 키스하면 적극적으로 받아주고, 그런 거 보면 날 싫어하는 것 같진 않은데.

그것참, 교묘하네.

제 입술을 계속해서 문지르던 무경은 이내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눈썹을 한번 들었다 내리며 결론을 지었다.

뭐, 아무렴 어떤가 싶다.

너에게 지독하게 감겨주기로 작정하였으니, 내가 더 숙일 수밖에.

“내가 실은 채 순경에게 궁금한 게 참 많아요.”

“저에게요?”

“내가 여태 채 순경 나이도 모르고 있었던데.”

“아. 그런가요?”

“말해준 적 없잖아요.”

“없죠.”

“그러니까. 모르니까.”

검지로 생강차가 담긴 찻잔의 표면을 긁어내리던 무경이 요원을 응시한 채 물었다.

“몇 살?”

요원은 순간, 고막이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만큼 남자의 목소리는 다정했으므로.

별것 아닌 질문에 갑자기 두 뺨이 홧홧해졌다.

마치, 다방에서 소개팅이라도 보는 듯한 기분에.

흠, 헛기침한 요원이 시선을 찻잔으로 내리며 대꾸했다.

“서른이요.”

“서른.”

남자가 주억거리며 티스푼으로 찻잔 안을 휘젓는다.

“가장 좋을 때네.”

“그런가요?”

“이십 대는 세상을 너무 몰라 어리숙하고 사십 대는 세상을 너무 잘 알아 약은 사람이 되고. 삼십 대는 너무 어리숙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약지도 않은. 적당하게 감성적이면서도 적당하게 현실적인.”

찻잔 안에서 원을 그리며 돌아가던 티스푼이 불시에 멈췄고.

요원과 눈을 맞추며 매혹적으로 생글, 웃어 보인 무경이 또 말했다.

“가장 예쁜 나이죠.”

요원은 생각해보았다.

만약, 이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만약, 하무경이란 남자가 제 소개팅 상대였더라면.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을 휘어잡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곧은 눈빛, 고고한 자태, 자신감에 가득 찬 표정.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뽐내고 있으면서도 눈을 휘어 웃을 때 보이는 천진난만한 소년 같은 미소, 고고한 품격 속 어딘지 모르게 장난기 가득한 말투.

삶을 대하는 태도가 가벼운가 싶다가도 얼핏 보이는 진지한 사상 등이 한데 어우러지며, 상대는 분명 저를 무자비하게 유혹했을 것이라 판단했다.

꼭, 지금처럼.

“그러는 하무경 씨는 몇 살이신데요?”

남자는 ‘내가 몇 살일 것 같아요?’라는 진부한 작업 멘트 따위는 말하지 않고 곧바로 궁금한 점을 해결해 주었다.

“서른넷.”

“서른넷.”

그의 나이를 입가에서 다시 읊조려보던 요원이 무경을 똑바로 바라보며 눈매를 부드럽게 휘어 웃었다.

“그럼 하무경 씨도 가장 예쁜 나이네요.”

“세상에 예외는 늘 있죠.”

입가로 찻잔을 가져가는 남자의 손짓이 참 우아하다는 생각을 순간 했다.

“하무경 씨가 예외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건가요?”

“나는 한 번도 예쁜 나이였던 적이 없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요원은 무경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무경보다 더, 그에 관해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알고 싶은 것이 많았다.

“이유가 뭐 있어.”

다 식어 빠진 생강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무경은 중얼거렸다.

“너처럼 안 예쁘니까.”

찻잔을 내려둔 무경이 시선을 창밖으로 틀었다.

촌스러운 꽃무늬 커튼 사이로 보이는 인영을 확인한 검은 눈동자가, 어느 순간에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저 빌어먹을 안 예쁜 새끼가 두 시간 안에 꺼지라니까 왜 아직도 여기에 있어?

창밖의 누군가와 눈이 맞았기 때문이고.

무경과 눈이 맞은 그 상대는 정확히 2분 후에 딸랑, 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다방 안으로 들어왔다.

“채요원 순경님. 안녕하세요?”

하도현, 자칭 김도현 작가의 달갑지 않은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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