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49화 (49/116)
  • 49화. 싸구려 양배추즙

    [ ※ 추천곡 : 해오라기 – 사랑은 받는것이 아니라면서 ]

    비포장도로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무경은, 제 손에 들려있는 검은 봉지 안을 무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니 젊은 놈이 벌써부텀 위가 안 좋담서?! 이거 갖고 가가꼬 꼬박꼬박 처먹어라!!’

    막 마을회관을 나가려는 무경의 넓은 등짝을 향해 부임이 이 검은 봉지를 냅다 집어 던졌고, 그 안엔 정확히 양배추즙 30포가 들어있었다.

    ‘몸에 잘 받으면 말해라잉! 내가 더 맹글어서 갖다 줄 텡게!’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선 무경이 커다란 한숨과 함께 버드나무 아래의 하천을 어딘가 잔뜩 불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대한민국에 내로라하는 명의만 상대하는 내 몸에 어디 이런 싸구려 양배추즙을 들이밀어.

    허리춤에 비스듬하게 손을 얹으며 코웃음 쳤던 무경이 저 하천을 향해 이 같잖은 검은 봉지를 집어 던지려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런데, 이 망할 놈의 손이 이 빌어먹을 봉지를 차마 던지지를 못하는 거다.

    던지려고 팔에 힘을 꽉 주었다가 금세 또 풀고, 주었다가 풀고를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야 무경은 제 손을 서서히 내렸다.

    던지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던지지를 못하나. 이깟 싸구려 양배추즙이 대체 뭐라고.

    제 뒷머리를 짜증스레 마구 문질러 헝클어트린 무경이 츳, 혀를 강하게 내차며 다시 터벅터벅 마을 내의 비포장도로를 거닐었다.

    한 것도 없는데 녹초가 되어 집 앞에 도착한 무경이 녹슨 철제문을 끼익 열고 마당 안으로 한 발자국 들이던 때.

    “안녕, 자기?”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명품으로 치장한 대청마루 위의 여자가 저를 향해 씨익 웃으며 인사를 건네온다.

    천하의 미친년, 라주연이 제 눈앞에 있었다.

    ***

    요원이 ‘배추 서리 사건’의 진범을 잡기 위해 자리에 앉아 마을 내의 CCTV를 돌려보고 있는데, 성준이 이야, 감탄사를 자아내며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무경 씨 능력쟁이네. 역시 사람은 잘생기고 봐야 하는가?”

    ‘하무경’이란 이름에 요원이 즉각 반응하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무경 씨가 왜요?”

    “여자랑 별빛다방으로 들어가는 걸 내가 봤는데 말이야. 여자가, 키야.”

    성준이 쌍 엄지를 추켜세우며 또다시 과장된 감탄사를 뱉어낸다.

    “나 같은 놈은 어디 감히 말도 못 시킬 그런 여자더라니까?”

    “여자요?”

    “채 순경. 저분은 말이야. 그냥 여성분이 아니야.”

    정수기에 몸을 기대고 선 성준이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저분은 말이야? 세상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여신…….”

    쾅!

    “어이쿠, 깜짝!”

    성준이 제 가슴 위를 손바닥으로 짚으며 소음이 들려온 요원의 자리를 쳐다봤으나, 순경 모자를 푹 눌러쓴 요원은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파출소 밖을 튀어나간 뒤였다.

    ***

    시내에 딱 하나 있는 ‘별빛다방’에선 1985년에 발매된 해오라기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별빛다방 주인은, 아까부터 무경과 주연이 앉아있는 테이블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고고한 자태와 품격을 온몸에 두르고 있는 두 사람이 함께 있으니, 안 쳐다보곤 못 배길 만큼 그 시너지가 실로 엄청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앉아있는 공간만큼은, 촌스러운 꽃무늬 벽지와 소파를 자랑하는 시골 다방이 아니라, 마치 앤틱으로 유명한 유럽의 한 카페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성준이 ‘세상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여신’이라 칭한 그 라주연은 아까부터 맞은편의 무경에게 과한 애정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 자기는 이런 누추한 다방이랑도 참 잘 어울린다. 뭐랄까? 클래식한 맛이 있어. 확 잡아먹고 싶게.”

    “입 닫고 쌍화차나 마셔요.”

    그런 라주연을 바라보는 하무경의 시선은 길가의 돌부리를 바라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머, 자기야. 입 닫고 어떻게 쌍화차를 마셔? 마시려면 입을 열어야지?”

    주연이 무경을 바라보며 씨익 웃는다.

    저 미친년을 그냥.

    무경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나 쌍화차 처음 마셔보잖아, 자기야. 어머! 이 노른자 귀여운 것 좀 봐!”

    꺄, 거리며 사진을 찰칵찰칵 찍는 주연을 정말 질린다는 얼굴로 바라보던 무경이 하, 한숨을 내쉬며 티스푼을 들어 생강차 안을 저었다.

    “라 상무. 여긴 왜 자꾸 와요. 사람 불편하게.”

    “전엔 주연아, 하고 친근하게 불러주더니 이젠 또 라 상무야? 나 그때 자기랑 더 가까워진 것 같고 정말 좋았는데.”

    “그 자기 소리 말이에요. 어떻게 좀 안 되나? 듣기 진짜 거북한데.”

    무경이 메슥거린다는 얼굴로 제 가슴께를 문질렀다.

    주연은 입을 삐죽거렸고 무경은 찻잔을 쥐어 입가로 가져가며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왜 왔어.”

    티스푼으로 노른자를 푼 주연이 쌍화차를 호기롭게 한 모금 마셨다가 우엑, 소리를 내며 그 잔을 다시 내려뒀다.

    “어우. 내 취향은 정말 아니다.”

    남자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 마음에도 없는 여자에게 쏟는 시간과 돈.

    무경도 별반 다르지 않아 찻잔을 조금 거칠게 쾅, 내려두며 머리를 한번 쓸어올렸다.

    “있잖아요, 라 상무.”

    그러다가, 동녘과 신아의 파트너십을 떠올린 그는 다시 입가에 형식적인 비즈니스용 미소를 걸면서 뇌까렸다.

    “내가 지금 기분이 아주 개떡 같아서 말이에요.”

    “어머. 왜?”

    “잠을 통 못 잤어요. 손목도 좀 아프고.”

    누군가를 생각하며 몇 번이나 변태 새끼처럼 딸을 쳤다는 말은 예의상 생략했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라 상무.”

    무경이 주연의 쌍화차 잔을 손가락으로 탕, 한 번 튕겨 웃었다.

    “빨리 용건만 간단히 하고 좀 사라져주지?”

    쌍화차를 한 모금 더 마신 주연이 잣을 와자작 씹으면서 무경을 바라보다가 곧 입을 열었다.

    “하태경 부사장이랑 하가경 전무 말이야. 지금 판 짜고 있다는데. 혹시 아는 거 있어? 자기와 관련된 것 같던데.”

    점차 차게 식어가는, 제가 시킨 생강차를 비스듬히 깔아보고 있던 무경이 다리를 넓게 옆으로 벌리면서 소파 헤드에 두 팔을 걸쳤다.

    “판을 짠다고.”

    아예 고개를 뒤로 젖힌 무경이 남성미를 뽐내는 목울대를 훤히 드러내며 잠시 두 눈을 감았다.

    “그것들이 무슨 판을 짜는지 내 알 턱이 있나.”

    턱을 괸 주연은, 그의 앞섶을 마치 탐나는 음식을 보듯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침을 한 번 삼켰다.

    “내가 좀 알아봐 줄까?”

    눈꺼풀을 밀어 올려 천장을 가만 바라보던 무경이 그 피로한 시선을 다시 내려 주연을 직시한 채 픽, 웃었다.

    “뭐 수고스럽게 그래요. 새대가리들 머리에서 나오는 판이야 안 봐도 뻔하지.”

    “자긴, 그 두 사람 정말 안 무서워?”

    “글쎄. 무서웠다가 우스웠다가 그러네.”

    무경은 중얼거리면서 손님이 하나 없는 다방 안을 휘 의미 없이 훑었다.

    모든 것이 낡아빠진 곳이었으나, 에어컨 성능 하나는 또 끝내주게 좋아서 앞으로 자주 와야겠단 생각도 잠시 덧붙였다.

    “근데 그 말 해주려고 여기까지 왔나? 전화로 했어도 될 이야기를 굳이?”

    “뭐. 자기 얼굴도 보고 겸사겸사. 자기가 서울에 없으니 통 얼굴 보기가 힘들잖아?”

    “우리가 얼굴 보며 지내던 사이인가요, 어디.”

    “정나경이랑은 어떻게 되어가?”

    “정나경이 누구죠.”

    주연은 잠시 눈을 커다랗게 떴다.

    무표정한 얼굴로 귓불을 문지르는 무경의 태도를 보아하니 둘 중 하나다.

    진짜 기억을 못 하거나. 입에 담을 가치를 못 느끼거나.

    아무튼, 내 맘에 쏙 든다니까?

    “자기야.”

    자리에서 갑자기 일어난 주연이 무경의 옆으로 넘어와 앉았다.

    그녀가 뿌린 독한 향수 냄새가 무경의 코끝을 강하게 찌른다.

    이분은 향수로 존나 샤워를 하시나?

    독한 냄새를 견딜 수가 없던 무경은 날렵한 코끝에 기다란 검지를 갖다 대며 미간을 찌푸렸다.

    주연이 그런 무경의 어깨에 턱을 넌지시 기대며 웃었다.

    “거절할 거라는 건 잘 아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래. 거절할게요.”

    무경은, 제 어깨에 기댄 주연의 턱을 잡아 올려 옆으로 홱 차갑게 치워냈다.

    “아직 듣지도 않았잖아!”

    “이미 들은 것 같아요. 아니 사실은 듣지 않아도 될 것 같고. 무엇보다도, 궁금하지가 않아요.”

    주연을 보며 싱긋, 미소를 한번 지어준 무경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연은 그의 손목을 잡아채 다시 남자를 자리에 확, 끌어앉혔다.

    이게 진짜 처돌았나?

    그때부터, 무경의 살벌한 시선이 주연을 강하게 쳐다본다.

    “라 상무. 내가 분명 오늘 기분이 아주 개떡 같다고 얘기했지? 여기에서 더 개떡 같아지기 전에 적당히 좀 해라. 많이 참아주고 있는 게 라 상무 눈엔 정말 안 보이나?”

    “자기, 나랑 결혼해.”

    무경의 성질머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주연임에도, 답지 않게 무리수를 둔다.

    “어차피 할 거. 그거 나랑 해.”

    주연은 늘 결혼하잔 얘기를 장난처럼 하곤 했었는데, 지금 주연의 눈빛은 장난과는 거리가 멀어 무경의 눈썹이 움찔, 다 떨릴 정도였다.

    “우리 잘 어울려. 자기도 잘 알잖아.”

    주연은 그가 당황한 틈을 타서 다시 무경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자기. 신아 잘 알지?”

    아까의 웃는 얼굴이 아닌 비장한 빛이 그녀의 얼굴에 피어났다.

    “우리는 파벌싸움 따위 없어. 동녘 말고 신아 가져. 내가 자기 줄게. 줄 수 있어. 자기도 그랬잖아. 내가 신아를 먹게 될 거라며? 장담한다며? 맞아. 나 그 정도로 능력 있는 여자야.”

    무경을 생각하는 주연의 감정.

    “나 허튼소리 안 해. 줄게. 정말이야. 동녘 그룹의 하무경에게라면 우리 신아 맡겨도 돼. 나 자기 진짜 걱정돼서 그래.”

    우정이라 하기엔 너무 깊고, 사랑이라 하기엔 또 어딘가 부족한, 그 애매한 한 끗 차이.

    “라 상무가 내게 신아를 준다고.”

    무경이 되물으며 주연에게로 느리게 손을 뻗었다.

    “응. 줄게.”

    주연은 여전히 무경의 어깨에 턱을 기댄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지금.”

    잠시 커다란 숨을 쉬며 말을 멈춘 무경이 주연의 턱 끝을 살짝 붙잡아 그녀와 시선을 똑바로 맞췄다.

    “나는 라 상무가 언젠가 신아를 먹게 될 거라고 장담까지 해줬는데. 라 상무는 지금 내가…….”

    뒷말을 잇지 않고 그녀를 고요한 눈동자로 얼마간 더 바라보던 무경의 입매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걱정된다는 말을 지껄이는 건가?”

    한껏 비틀리고.

    “감히 내 앞에서?”

    작정하고 뒤틀렸다.

    “응? 아니, 하 상무. 난 그런 뜻이 정말,”

    “아니 근데 씨발, 이것들이 단체로 다 짰나?”

    갑자기 튀어나온 남자의 까칠한 욕설에 주연이 반사적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니들은 왜 다 나를 걱정해.”

    주연의 하관을 턱, 움켜잡는 무경의 악력이 조금 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거셌기에 주연이 몸을 흠칫 떨었다.

    “상무야. 라 상무야. 너 진짜 왜 이러니. 나 말고 그것들을 걱정해야지? 네가 날 몰라?”

    무경의 새카맣게 빛나는 서늘한 눈동자가 주연을 금세 뚫어버릴 듯한 날카로운 창살처럼 느껴졌다.

    “신아를 왜 나를 준다고 그래. 난 동녘 가지면 되는데. 지금 네가 나를 동정해? 네가?”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이 하무경을, 누가 감히.

    말도 안 되는 화가 활화산처럼 치밀어올랐다. 이런 걸 보통 과민반응이라 하던가. 보통 때라면 코웃음 쳤을 일임에도, 나는 대체 뭐가 그리도 불안해서.

    “…….”

    “…….”

    살벌한 침묵의 기운이 다방 안을 잠식했을 때에.

    딸랑.

    다방 입구에 달린 종이 청명하게 울리며 누군가가 다급하게 다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0